사실 텐트를 덮고 있는 동안 다 알고 있었다, 바람만 겁나 부는 게 아니라 비도 온다는 것을.
그냥 나가라는 신호냐 싶었지만 두 번째로 들어왔는데 정말 아깝잖아...
어제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화창한 캠프에서 뭉기적거리려 했는데,
이 무너진 텐트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사이 누가 뭉개진 텐트에 발이 걸렸는데 그 속에 사람이 있는 걸 보더니 놀라서 너무 미안해하며 지나갔다.
나를 안 밟은 게 다행이지^^
하지만 더 무너질 것도 없는 텐트보다는 배고픈 게 더 급한 일이다.
버너 불도 꺼버리는 바람때문에 설겆이 하는 싱크 사이에서 밥을 했다.
센 바람에 내 얼마 안 남은 가스를 헛되이 바칠 수는 없다.
공공구역에서 민폐끼치는 게 좀 미안했는데 남들도 버너 들고 슬슬 오기 시작
-그래 이렇게 바람불 땐 여기 뿐이라니까~
그 사이 싱크 옆 창고에 볼일 보러 온 레인저 아저씨에게 어제 텐트 무너진 얘기를 하고
좋은 자리 좀 알려달라니까 텐트를 봐주겠다고 한다. 올레!
아저씨는 바쁘니까 그동안 먼저하고 있으려고 일단 돌밭이 아니라 텐트 폴이 들어갈 만한 자리에 텐트를 다시 쳤다. 무거운 돌도 많이 주워놓고.
결국 끝날 때까지 아저씨는 오지 않았는데 텐트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준 것만으로도 기쁘게 고마웠다.
비가 찔끔씩 오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지금도 걷고 있을 거다 생각하고 길을 나선 것이 12시.
오늘은 Curenos가는 길인데 어제를 보상해주듯 맘에 드는 걷는 길들이 나왔고
다행이 다리도 내 다리-완전 뻗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단련된 듯한 기분이랄까?
물을 여러 번 건너야 해서 신발이 좀 젖었지만 덕분에 찬 토레스 델 파이네 물에 발도 담가보고,
목적지 없이 다섯시간을 걷다가 돌아왔다.
텐트를 만나기 100미터 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너졌을까, 아직 서있을까.
비슷한 색깔의 늠름한 텐트를 보면 내가 저렇게 잘 했나-그럼 그렇지를 반복했다.
그랜드 파이네의 대찬 바람도 살아남아서 기특했던 나의 텐트.
......오늘은 또 무너져 있다.
아침에 폴에다가 제법 공들여 돌멩이 망치질을 했는데도.
뭐, 조금 실망은 했지만 이젠 놀랍지도 않아서 재건작업에 들어갔는데 아침의 레인저 아저씨가 나타나셨다.
쓱 보더니 폴을 몇 개 더 가져와서 돌멩이 망치질 없이 맨손으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또 반했다^^
아저씨가 손을 봐준 텐트는 내가 친 것 보다 덩치가 더 커졌고 든든해졌는데!
바람이 이제는 안분다. 대신 비는 계속 온다.
-토레스 델 파이네 주크박스
폭포나 흐르는 물이 나올 때,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
호수 전망이 있거나 멈춰 선 곳에서는, 삶에 관하여
초록의 숲길에서는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과 슈만의 파필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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