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3 피츠 로이


어제 영국 청년이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가 엄청 힘은 들면서 라구나 토레보다 안 멋있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는 안갔을 거라고 해서 
신나게 귀를 팔랑거리며 쉽게 포기하고 툼바도라는 다른 코스를 골랐는데, 
가는 길에 그 코스가 매우 힘들고 카프리 호수가 아주 좋다는 얘기를 또 주워들어서 또 포기, 가는 길에 카프리를 볼 수 있는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를 다시 선택했다. 
도중에 어제 재회했던 이스라엘 청년들을 만났는데 
이렇게 좋은 날씨에 거길 안 가면 완전 후회이고 천천히 가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강력히 추천해서 
그럼 또 가야겠구나 맘을 고쳐먹고 일단 가보기로 했다. 

일단 가장 가까웠던 카프리 호수는 파도도 치고 비치까지 있는 대형 호수였다. 
거기서부터 포인세노트까지는 길도 너무 좋고 별로 힘도 들지 않아서 완전 만족했다. 
노닥노닥 하다보니 예상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세시간 만에 포인세노트 도착. 
라구나 로스 토레스까지 올라갈 시간이 얼추되기는 하지만 
마지막 1km 예상시간이 한 시간 25분인 걸로 봐서 난이도는 내 수준에 죽음.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포기했는데
거의 99%를 갔다가 포기하고 내려오는 커플을 만났다. 
그래 뭐 꼭 끝까지 다 갈 필요는 없지. 

포기가 전혀 고민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역설적이지만 가는 길이 충분히 멋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가는 길과 정상의 차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동네 산들은 가는 길에 보는 풍경들이 굉장히 멋있고
끝까지 가서 보면 그 앞에 펼쳐지는 호수가 하나 추가된다.
날씨에 따라 물색이 되게 멋있을 수 있지만, 
내게 한 시간의 개고생과 바꿀 정도로 탐나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의 산들은 화려한 앞통수를 자랑하며
가는 길에 이미 충분한 미모를 뽐내주기에 
굳이 정해진 코스의 길이 아니더라도 멋진 자태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많다.
오늘은 특히나 맑은 하늘에 새털 같은 구름들이 산을 에워싸 내내 좋은 경치를 즐기며 갔다.

엄청난 구름이 앞을 가렸다는 어제는 대신 무지개를 봤다니 
피츠 로이는 흐리나 맑으나 부지런히 단장하고 손님을 맞이 하는 성실한 산인 모양이다.

어제의 피자, 오늘의 호박파이가 성공적이어서 오늘 저녁도 숙소 식당에서 해결했다. 
주문하면서 너무 클까봐 걱정했는데
반전 사이즈의 아담한 스테이크와 되게 맛있는 감자가 나와서 남김없이 다 먹었다.
요건 좀 더 줘도 괜찮았는데 어제 양이 많다고 얘기한 걸 들으셨나 ㅋㅋ 
한 가지 실수는 어제 먹은 오트로문도 맥주를 기억을 못해서 다크를 시킨 것. 
직원이 용케 내가 어제 먹은 게 골드라며 몇 번을 알려줬는데
나의 틀린 기억으로 우기다가 삽질 --;;

어딜가나 꼭 있다-시리즈에 들어갈 법한 게 
나름 산행길인데 너무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이다. 
무려 통굽구두에 핸드백을 들고 올라가는 분을 발견. 
옛날에 설악산을 헥헥거리며 올라가는 내게 
고무신을 신고 내려가시며 고생한다고 얘기해주시던 할머니들은 내공이려니 하고, 
비교하자면 기념촬영을 위해 태종대의 바위를 한복에 힐을 신고 내려가던 새신부 쯤?
암튼 대단하다.      

작은 동네라 약속 없이 사람들과 계속 마주쳤다. 
어제 만났던 이스라엘 청년들, 
한국 여행자들, 
우수아이아에서 만났던 히치하이킹 프랑스 커플,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만났던 부부까지...
이렇게 쉽게 여러 번 마주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참, 딱따구리도 또 봤다^^

이곳의 캠핑장은 구덩이 화장실만 갖추고 있어서 공짜다. 
물은 너무 맑아서 생수통에 담아도 투명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물보다 깨끗한 맛~
대신 이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 '씻기'는 물을 퍼서 반경 30미터 밖에서 해야한다고 한다. 
캠핑장에서 잠깐 쉬는 사이 산모기가 아주 잠깐 앉았다 갔는데 
맵도록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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