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7 미라도르 토레스



오늘 아침엔 빠트리는 것 없이 다 챙겼지만 
역시나 인터넷이 안되서 미리 예약하는 알뜰 절약은 하지 못했다. 
예약하면 1500페소 정도 쌌는데. 
역시나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어서 이곳의 약점은 인터넷. 
아이폰 보다 아이패드가 와이파이에 취약한 걸 처음 알았다. 더 나중 모델인데도 뭐냐......

오늘은 프란시스코 아저씨가 태워다 줬는데 
아침으로 나온 재료로 만든 내 샌드위치를 보더니 
진짜 배부르겠다며 농담을 한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 들었다! 
짐 맡길때 마리아 언니가 돈내라고 장난칠때도 싫다고 하고 왔는데^^
두번째 타는 버스라 능숙하게 휴게소에서도 제일 먼저 내리고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규모도 작고 찾기도 헷갈리는 센트럴 토레스 캠핑장을 
결국 헤매고서야 찾았다.  

제일 비싼 7500 페소를 받으면서 부엌도 식당도 없다. 
싱크대가 있고 음식할 야외테이블이 여럿이라 일행끼리 어울리기 좋고 
부엌이 없으니 아무 때나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면 
테이블이 넉넉하지 않을 때는 난감하다는 단점이 결정적이다.
저녁 무렵 거짓말 처럼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바람을 몰고 다니나...? 

오늘은 대망의 미라도르 토레스.
이제까지 생각했던 토레스 델 파이네의 난이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 
내가 체력적인 한계를 절감하던 설악산, 북한산의 고행이 절로 떠오르는 코스였다. 
돌길오르막이 계속 될 때부터 버벅거렸는데 마지막 한 시간은 헐...
정말 고생한 게 아까워서 올라가는 전형적인 고문형 등산이다.
나 이런 거 정말 안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잠깐 캠프 칠레노 근처가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을 들으며 걷기에 딱 일 정도로 좋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탄광 아니면 돌밭이라 가는 길의 풍경도 지금까지 중 제일 별로. 
이 코스는 중간의 잠깐 숲길과 목적지의 놀라운 경치를 위해 발목과 무릎을 불태워야하는 곳이다. 
특히 마지막 한 시간은 완전 지옥코스!
앞으론 금수강산이라도 여기만큼 힘들다고 하면 나는 패스하는 걸로.
보통 다른 코스들은 예상 소요시간보다 훨씬 적게 걸렸지만 
오늘은 그보다 딱 30분 일찍 끝났을 뿐이고, 
계속 메고 다니던 작은 배낭이 무겁게 느껴진 건 처음이다. 

>오르막길 팁: 경사가 어지간 할 땐 보폭을 줄여서 여러 걸음으로 나눠 걸으면 숨이 덜 차다.
경사가 급할 땐 까치발로 딛는다. 
>내리막길 팁: 여러 번 움직이더라도 두 발의 높이 차가 적은 곳을 딛으면 무릎의 부담이 덜하다.

나름 몸으로 배운 기술을 연마하며 걸었지만 오늘은 뭔짓을 해도 그저 한숨 뿐...

천천히 내려오다 보니 신발이 문제가 생기거나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커플1. 둘이 같이 천천히 걷는다.
커플2. 각자 자기 페이스로 걷다가 앞 선 사람이 간간이 기다렸다가 간다.
속도가 비슷해서 계속 같이 내려왔는데 처음엔 둘 다 똑같이 보였지만
나중엔 확실히 달라졌다.
같이 천천히 걷던 커플-좀 힘든델 지날 때 가볍게 격려의 키스를 하더니 
신기하게도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중간에 기다렸다 만나던 커플은...처음엔 서로에게 미안하지 않아서 괜찮겠다 싶었지만 
나중엔 앞 선 사람은 쉬엄쉬엄 더 편하게 가게 되고 
처진 사람은 쉬지도 못한 채 계속 걷느라 더 지쳐가니 
혹시 열 받을 때 아주 좋은 땔감이 되어줄 듯 ㅋㅋ

남들은 그렇다치고
내일 내 다리는 내 다리 일까, 남의 다리 일까.
제발 내 다리였으면.

한밤중에 천둥같은 바람소리에 깨서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반. 
낮에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하나 믿고 설렁설렁 텐트를 쳤던 게 화근이다. 
이 캠핑장은 원래 평화로운 줄 알았는데--;; 
하지만 내겐 경험이 있다.
이래뵈도 그랜드 파이네에서 이틀이나 살아남았지~
찢어지지도 않았지~
이렇게 시끄러워도 잠만 잘잤지~
오늘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헐.....텐트가 진짜로 
무.너.졌다. 
실감이 안나서 잠시 멍하다가
언능 일어나 짐만 빼고는 텐트를 질질 끌고 바람 적은 곳을 찾아다녔지만
--없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대충 텐트를 치고 
돌멩이도 구할 없는 어둠 속에서 제일 애처롭게 펄럭이는 텐트자락을 깔고 앉아 텐트를 지키며
내일 아침에 철수를 해야 하나, 아니면 캠핑장 텐트를 다시 빌리나, 방을 빌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정말 다행인 게 춥지는 않아서 침낭만 깔고 잘 생각도 했는데
흙바람이 불고 있어서 포기.
그러는 사이 눈에 들어온 건 
열 시가 되야 해가지는 동네에서 아홉 시 열 시면 잠드느라 보지 못했던 밤풍경. 
움직이는 건 구름인데 
별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것 같았고 
눈쌓인 산 꼭대기까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힘센 달이 둥실 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달 구경을 하다가
이렇게 쭈구리로 텐트를 지키며 밤을 새느니 그냥 또 무너지더라도 들어가서 자자 하고 들어갔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미친 듯이 펄럭이던 텐트가
또!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침낭 위에 텐트를 덮은 꼴로 비몽사몽 잤다.
오늘의 소원은 그저 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텐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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