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기계 공장 패들은 우측으로 150미터 가량 뒤떨어져서 전진해오고 있다.
이제는 성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작업대에는 희색이 넘친다. 가련한 '집토끼'들의 만족-그래도 우리는 개구리보다 세지 않느냐!

간수가 장갑을 쥐는 순간, 슈호프는 기중기에 가슴이 눌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만일 다른 쪽 장갑에까지 간수의 손이 닿는다면-그때는 영창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하루 300그램의 빵, 더운 국은 사흘에 한 번밖엔 주지 않는다. 순간, 슈호프의 머릿속에는 영창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려 하루하루 쇠약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생활로 되돌아 오는 것도, 배부르지는 못하더라도 견디어낼 만큼은 먹을 수 있는 현재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도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닌 것이다.

"너희는 수염난 늙다리(스탈린을 가리킨다)의 자비를 바라는 거냐! 그 녀석은 말야, 친형제까지도 믿지 않는단 말야. 하물며 어디서 굴러다니던 개뼈다귄지도 모를 너희 같은 건 염두에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해!"
특수범 수용소에는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 마음대로 울분을 터뜨릴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스치 이지마에서는, "소련에는 성냥이 부족하대"하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는 것만으로, 영창에 들어가서 10년형의 연장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층의 침상에서 마음대로 지껄여대도 밀고자에게 고발당할 염려가 없다. 그리고 보안부에서도 문제거리로 삼으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말을 오래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거 보십시오, 이반 데니소비치. 지금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당신의 영혼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싶어한다는 증겁니다. 어째서 당신은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지요?"
슈호프는 힐끔 알료사를 바라본다. 두 눈이 마치 촛불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슈호프는 휴우 한숨을 내뿜었다.
"어째서냐고?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꼭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꿩 구워 먹은 소식이 되기가 일쑤고,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음'이라고 퇴짜를 맞을 게 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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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는 조금 상상이 간다.
마지막의 반전을 능가하는 마무리에 이르면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저 폭로와 센세이션으로 이 책의 소명이 다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읽은 내가
작가의 사그러들지 않은 유머감각을 즐거워할 수 없었겠지.

두려움은 지금 견디기 힘든 어려움 보다는
더 나빠질 미래,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온다.
밖에서 보기에는 더 떨어질 밑바닥도 없어 보이게 절망스러운 죄수들에게도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건 오히려 그들이 희망적이라는 역설인가.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언성만 높아도 두려워지는데
한 다리 건너 보고 듣는 폭력에 대해서는 점점 무뎌져만 가고 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주인공을 미치게 만드는 고문은
못자고 못먹어 정신없는 주인공에게 누군가 유령처럼 다가와
그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네 아버지를 죽여버리겠어'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두려움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건 고문으로도 안 칠텐데'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배우라는 자부심은 분명 아니었는데
보고 들은 게 많을 수록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뎌지는 것,
그래서 점점 그런 폭력에 대해 그 즉시 일어나는 마음의 분노의 강도를 꺽는 것
-이게 모든 폭력을 몰아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나름 평범하고 '행복하기까지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읽을수록 그의 하루에 익숙해져 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각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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