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시골집에서는 열 명 정도 되는 가족 전부가 제각기 독상을 두 줄로 마주보게 늘어놓고 밥을 먹었습니다....인간이란 것은 왜 하루 삼시 세끼 밥을 먹는 것일까. 정말 모두 엄숙한 얼굴로 밥을 먹고 있군.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어서, 가족이 삼시 세끼 시간을 정해놓고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서 밥상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밥알을 씹는 것은 집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기도하는 의식인 것은 아닐까.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 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을 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렇지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ㄴ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림은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익살 밑바닥에 있는 음산함을 간파당하여 하루아침에 경계당하게 되는 것도 싫었고, 또 어쩌면 이것이 내 정체인 줄 모르고 또 다른 취향의 익살로 간주되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는 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저절로 한쪽 정강이에 생긴 것이 크면서 치유되기는 커녕 더 심해져 뼈에까지 닿아서 밤마다 겪는 고통은 변화무쌍한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퍽 기묘한 표현입니다만) 그 상처가 점차 혈육보다 더 정답게 느껴지고 그 통증은 상처의 살아있는 감정, 사랑의 속삭임으로까지 느껴졌던 저라는 남자에게 예의 지하운동 그룹의 분위기는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했습니다.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도시락 통에 먹다 남긴 밥알 세 알. 천만 명이 하루에 세 알씩만 남겨도 쌀 몇 섬이 없어지는 셈이 된다든가 혹은 하루에 휴지 한 장 절약하기를 천만 명이 실천하면 얼마만큼 펄프가 절약된다는 따위의 '과학적 통계' 때문에 제가 지금가지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밥알 한 알 남길 때마다 또 코를 풀 때마다 산더미 같은 쌀과 산더미 같은 펄프를 낭비하는 것 같은 착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어두운 마음을 가져야 했는지.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과학의 거짓', '통계의 거짓', '수학의 거짓'이며 밥 알 세 알을 정말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곱셈 또는 나눗셈 응용문제라고 쳐도 정말이지 원시적이고 저능한 테마로서 전등을 안 켠 어두운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몇 번에 한 번쯤 발을 헛디뎌서 변기 구멍 속으로 떨어질까 혹은 전차 문과 플랫폼 사이의 틈새에 승객 중 몇 명이 발을 빠뜨릴까 같은 확률을 계산하는 것 만큼 황당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정말 있을 듯 하지만 제대로 발을 걸치지 못해서 화장실 구멍에 빠졌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그런 가설을 '과학적 사실'이라 배우고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서 두려워하던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처세술만 믿다가는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걸."
처세술의 재능? 저는 정말이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한테 처세술의 재능이라니! 그러나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속이는 것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느니 하는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 얘기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Guy Charles Cros
불안과 공포 따위로 사람을 겁주는 놈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가 두려워
죽은 자의 복수에 대비하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계략을 꾸미지/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中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들에 괴로워하는 것이 싫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괴로워할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묘한 기쁨.
인간실격이라는 과격한 제목을 봤을 때 대충 실격과는 거리가 먼 얘기일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이상을 생각나게도 하고 거짓말 증후군에 대한 가장 정직한 서양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생각나게도 한다.
작가는 다섯번의 자살시도 끝에 이른 나이에 연인과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전적이라는 이 수기를 읽고 나서는 살았던 그도, 그렇게 죽은 그도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많은 부분 비교도 안되는 스케일로 증폭되어 있지만 어쩐지 잘 알 것만 같은 인물, 이방인의 뫼르소와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도 닮았지만, 이 두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열망을 가졌을 것 같은 인물, 요조.
이런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좀 옮겨주면 안될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 책에는 요조의 수기가 3개로 나뉜 형식의 '인간실격'과 뮤지컬 지저스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원작인가 싶은 유다의 시점에서 예수의 최후를 그린 '직소'가 실려 있다. 남들은 꿀꿀하다던데 난 재미있었다,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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