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이기심과 복잡한 자기욕구를 극복한 도인같은 이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로 해당된다. 그런데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남에 대한 관대함을 키울때 성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찰성을 갖추었을 때 옳고 그름, 잘한 일, 못한 일, 절대선, 절대악의 이분법적 규정이 훨씬 덜해지고, 피해의식과 방어의식, 심한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산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대안을 찾을 수 있는 힘은 성찰성에서 온다고 믿는다(인용문-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 권인숙).
그들(맥러플린과 데이비드슨)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믿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때때로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를 낳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준다며, 그 부작용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은 기대대로 살지 못했을 때 분노를 자아내며,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또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완전히 책임지는 것을 미루게 하고, 철저하히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을 회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존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자존감을 '자해적 자존감'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와 유사한 자존감으로 자신의 고립, 고독을 과장해 비장미에 빠져들고자 하는 자존감도 있다. 이 경우는 자해 수준은 아닐망정, 외부의 적을 실제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동시에 협력할 수 있는 일마저도 적대관계로 만드는 '자기이행적 예언'을 통해 자신의 독선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강한 자존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왜곡된 자존감을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과격한 공격성으로 변질되기 쉽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A.애들러). 내면적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살펴볼 때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일수록 부정부패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부정부패가 가장 덜한 것도 그 나라들의 가족주의가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가톨릭국가들이 프로테스탄트 국가보다 부패가 더 심한 것도 가톨릭 국가들은 가족중심적인 반면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개인주의와 자립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입양 문화도 가톨릭 국가들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앞서 있다. 같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의무를 더 강조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부패의 정도가 한결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뜨겁게 분노한다. 그러나 뜨거움을 잠시 누르고 잘 살펴보면 그러한 부정부패의 이면엔 거의 대부분 인간적인 연고와 정실 같은 것들이 개입돼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가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끈끈한 가족주의도 가세하고 있다. 꼭 사악한 탐용만이 부정부패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말이다.
연고주의, 정실주의, 가족주의는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갖고있거니와 일상적 삶에서 치열하게 실천하는 것들이다. 그 누구도 그걸 감히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한국에선 연고와 정실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여러 번 찾아가도 안 될 일을 그런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전화 한 통화로 가볍게 해결할 수 있다. 이걸 부정부패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가벼운 '새치기'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새치기'에 브레이크가 있는 지 의문이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법에 의해 적발공개된, 큰 부정부패에 대해서만 분노할 뿐 부정부패 그 자체에 대해 분노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는 내 처지에 비추어 본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이어 고승덕은 "뇌물죄는 민간이 공무원을 접대하는 경우 뿐 아니라 공무원이 다른 공무원을 업무상 접대하는 경우에도 엄연히 성립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감사기관이나 예산부서에서 하는 이른 바 '관관접대'는 뇌물죄의 사각지대에 있다. 뇌물죄가 사정기관과 국회는 피해가고 하위 공무원만 단속하는 식이 되어서는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이 신드롬(情신드롬)이 사법부에도 만연되어 있는 탓인지는 알 수 없어도......공무원의 뇌물수수가 5천만원이 넘을 경우 징역 10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받도록 되어 있지만, 1974년 이래 20년간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실형선고비율도 20%를 넘은 적이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들쥐의 일종인 레밍(Lemings:일명 나그네쥐)은 종족 수가 폭발적으로 늘면 떼지어 바닷가 절벽으로 밀려가 뛰어내린 뒤 죽을때까지 헤엄친다고 한다......그래서 디지털레밍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는 레밍처럼 사이버상에서 떼로 몰려다니며 집단행동을 하는 이용자들을 가리킨다.
황희의 이런 태도는 줏대가 없는 태도라는 이유로 곧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이수원은 이 일화가 옳고 그름의 시비를 초월하여 중용의 방법을 좇아 갈등을 해결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갈등의 해결방식엔 '분배적 해결방식'과 '통합적 해결방식'이 있는데, 중용은 통합적 해결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수원은 시비나 호오는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사물을 지각할 때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걸 설명하기 위해 굴원의 '어부사'를 제시했다. 굴원이 초나라의 관직에서 쫓겨나 창랑의 강가에서 우수와 탄식으로 세월을 보낼 때 한 어부를 만나 신세타령을 했다고 한다. 세상은 모두 혼탁한데 자기만이 홀로 깨끗하다고 굴원이 탄식하자, 어부는 한 수의 노래를 지어 들려줬는데 그것은 "창랑의 물이 깨끗하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으리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에서 사물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디에 쓰려는가에 따라 달리 지각된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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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궁금해지는 한국인의 특성.
나의 어디까지가 공동체적인 특성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적인 특성인지 궁금한만큼이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의 어디까지가 남들과의 부분집합이고 여집합인지.
처음엔 뭔가 싹 정리되는 느낌이었지만 나중엔 다시 혼란상태.
그래 남의 손으로 코닦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야^^
많이 쓰는 것이 곡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준만.
여전히 사람을 부글거리게 만드는 파워가 있다.
워낙 많이 읽는 사람이다 보니 자기가 쓴 건 아니래도 읽을만한 인용문들을 잘 골라주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
그러나 룸싸롱사건의 실망감을 아직 잊어버리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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