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Snowpiercer|2013





슬픈 새로운 시작도 결국은 희망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꼬리칸에서 한칸씩 앞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의외로 개성보다는 한 덩어리로,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로 느껴지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죽음은 끝이라기보다는 나아가기 위해 팔다리를 잃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은 죽었지만 인류는 멸종되지 않았고.

갇혀 있던 남궁민수가 오히려 세뇌에서 자유로왔던 것,
사회적 학습을 겪지 못한 요나가 자신보다 작은 아이를 돌보는 것,
커티스가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은 것은
희망적인 인간관으로 보였다.
특히 아비규환의 꼬리칸에서 평범하게 망가졌다가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희망을 넘겨받은 커티스는
왜 인간을 과거의 기록이 아닌 그 과오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로 바라봐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생존열차에 무임승차했으니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이 인류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일치해야 할 것이다.
나의 답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그 운명을 미리 알려주고 선택권을 주었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선택하듯 절박한 사람들은 결국 이 기차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올라탄 기차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게될 운명이라면
이 기차는 생존을 가장해 죽음보다 못한 삶으로의 유혹이었을 뿐이고
누구에게든 인간다운 삶은 그 질서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

위대한 능력자가 영원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공정한가?
윌포드는 물론 뛰어난 개인이지만
그가 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상상했던 모든 것, 목표했던 모든 것은
전부 인류에 빚을 지고 있다. 모든 문명의 진보도 그렇다.
그의 노력의 열매는 빼앗아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 역시 인류에 빚진 만큼은 내려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메리토크라시라는 신자본주의 궤변의 헛점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사실 가장 으스스했던 곳은 학교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기차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말하자면 북한 같은 기차 안에 살며
배운대로 살 것이며, 만들어진 미래외에 다른 것은 살아낼 수 없다.
사람이니까, 아마도 예외가 생길 수 있겠지만 영화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윌포드가 그속에서 자라난 충직한 아이들이 아닌 다른 후계자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작은 그냥 평범한 헐리웃 액션영화 같았다.
이유없이 무작정 적대적인 대비로 사건을 이끌어가는.
하지만 반전 같은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졌고,
반란의 대격돌 장면은 청명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묵직하게 흘러갔다.
멋있다, 긴장된다-보다는 다르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커티스와 남궁민수, 커티스와 윌포드의 고백은
인상깊게 남을 독특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목적을 잃지 않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새 인류의 장을 열던 마무리에서는
기뻐할수도 슬퍼할수도 없는 채로 그저 그 계속되는 삶을 목도하게 되었고.

아마도 앞 칸에 탄 사람들의 예약금으로 윌포드는 기차를 개발했을 것이지만,
그 투자자들은 결국 스스로 세뇌와 차별이 아니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독재국가에서
위대한 독재자를 칭송하는 추종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 돈은 야심가의 꿈을 실현시키고, 그에게 절대권력을 선사했으며
그 댓가로 돈의 주인들은 차별을 획득했다.
돈의 주인들이 재력을 즐기는 유일한 방식이 차별이니
클럽, 의상실, 스파 같은 생존과는 무관한 그 공간들은
꼬리칸 몇 칸 따위완 바꿀 수 없는 필수 공간이 될 수 밖에 없다.
눈으로는 다 볼 수 있으니 공존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현실세계와 달리
굳게 닫힌 문으로 격리되어 있는 열차는 오히려 현실감있는 상징이다.

마음에 들었던 장면들.
꼬리칸 화가 승객이 아이를 잃은 두 부모에게 아이들의 초상을 그려서 건넨다.
-생존필수품은 아닌 예술에게도 자리를 찾아주려는 것 같던 꼼꼼한 노력이랄까...
요나가 성냥을 얻으러 커티스를 찾으로 왔을때
엔진칸 윌포드 앞에 우람늠름 서 있던 커티스의 모습
-단 한 컷으로도 증폭되는 이야기의 에너지!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제일 강렬하게 기억나는 배우는 틸다 스윈튼과 존 허트였다.
에드 해리스가 이름의 존재감 뿐이었던 것과 달리,
그 엄청난 분장속에서도 살아있던 표정과 눈빛!
올란도 이후로 처음보는 틸다 스윈튼이고, 기억도 잘 안나는 해리포터의 존 허트가
이런 배우들이었다니...놀랍고 즐겁다.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은 앨리슨 필.
인트리트먼트에서의 환자때 잠깐 인상깊었다가
요즘 뉴스룸에서는 완전 밥맛인 매기를 연기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앨리슨 필은 정말 에너지 폭발이다.
투다이포의 니콜 키드먼을 생각나게도 하는.
이런 역을 만나는 것은 배우에게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시간 동안 흥미진진과 이런 저런 생각을 동시에 하게 해주는 설국열차-정말 반갑다.
이 모든 이야기가 질주하는 기차-라는,
누군가는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고까지 하는 섹슈얼리티에서 시작했다니,
봉준호 감독이야말로 급이 다른 진정한 변태^^

딱 하나, 설국열차에 대해 맘에 들지 않는 건
어마어마한 크레딧이 올라갈 정도의 CJ 영화라는 것.
윌포드가 전시장에 내놓은 윌포드의 세계에
주머니 탈탈 털어 구경가는 꼬리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를 CGV에서 봤으니 더더욱 완벽--;;
좀 서글프다.
파는 물건처럼 대체가능한 것들을 안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말야...

 탈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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