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 끊을 때부터 산만한 일정은 어느 정도 예고됐었다. 타오르미나를 가려고 생각했으면서도 갈아타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논스탑인 팔레르모를 눌러버렸으니.
문제는 딱 팔레르모만 숙소정보를 알아놓지 않았다는 것.
역마다 있는 관광안내소와 인터넷 카페를 믿고 그냥 탔다.
슬리퍼가 아닌 그냥 좌석으로 2등석을 끊었는데 좌석 훌륭하고, 게다가 맨 뒤쪽 빈칸에 들어가 일찍 불 끄고 커튼을 쳤더니 아무도 안 들어와서 독방으로 잘 썼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 기차가 팔레르모 전에 있는 떼르미니라는 역에 서더니 갈 생각을 안한다.
전광판에는 어느덧 1시간 연착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고 30분 더 있다가 출발한다던 기차에서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다 빠져나갔다. 이럴 땐 이유 따지지 말고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장땡. 나까지 내리고 나니까 금새 기차문도 잠겼다.
결국 그 기차는 달리기를 포기했고 기차승객들은 역 밖에 서 있던 럭셔리버스를 타고 팔레르모로 왔다. 한 시간 반 연착인데 버스도 아니고 기차가 이러기는 인도 이후로 처음이다. 그래도 인도에서는 그 기차가 가긴 갔는데...
팔레르모 역에서부터는 예견된 재앙의 연속.
토요일이라고 문 닫은 관광안내소를 보니 아무 생각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숙소정보가 있는 곳 중 가장 가까운 아그리젠토행 기차표를 끊었다.
여기서부터는 팔레르모만의 장기자랑.
앉아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영어로도 해주는 것 까지는 고맙지만 그 내용인 즉슨 원래 몇 번 플랫폼으로 들어올 기차가 다른 번호로 들어오니까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기차는 계속 들어오는데 남이 먼저 와 있으니 다음 기차도 계속 플랫폼을 바꿔야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말해주는 게 어디냐 싶긴 한데 문제는 반드시 다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
어느덧 나의 기차도 들어올 시간이 되서 나 역시 기차랑 술래잡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술래잡기의 대략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기차가 들어온다
-내 기차가 아니다
-옆 사람한테 물어 본다
-다음 기차랜다
-온 기차가 안 떠나고 내 기차 시간이 지난다
-매표소에 물어 본다
-플랫폼이 바뀌었다고 한다
-바뀐 데서 기다린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몇 번 반복하다가 기차만 들어오면 무조건 달려가서 물어 본다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아니라고 한다
-원래 기다리던 데서 다시 기다린다
-다시 처음부터 또 시작한다.
결국 아예 매표소 앞 전광판에 기차 들어오는 표시가 보일 때까지 죽치고 있다가 기관사 아저씨한테 직접 행선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탑승에 성공했다. 표 예매할 때 아그리젠토행 기차가 여럿 있었는데 대체 몇 시 기차의 연착분을 탄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할일 진짜 없는데 그냥 바쁜 척 하고 싶을 때 팔레르모 기차역 술래잡기 강추. 기차가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음 기차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 스릴도 만점이다.
플랫폼이 6개 밖에 안 되니 두 시간에 끝났지 로마 떼르미니역 같았으면 이 빌어먹을 나 잡아봐라 하느라 집에는 다 갔다. 로마에서는 거의 칼같이 떠나던 기차였는데 살레르노에서 20분 연착을 하더니 팔레르모에서는 여기까지 왔다. 시칠리아에서 기차를 또 탈 수 있을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