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을 지나 언덕을 넘어가는 기차. 아말피 해안도로의 전망도 근사했지만 빈틈없는 초록의 언덕을 달리는 이 기차도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시칠리아가 이렇게 푸른 섬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내가 가진 상상속의 아일랜드와 비슷한 느낌. 여기도 아일랜드이긴 하네?
역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아그리젠토 도착 전의 어느 역에서 사람들이 단체적으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내렸다. 마치 다 아는 동네사람들처럼. 오기도 전에 편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신전으로 유명한 시칠리아의 도시 아그리젠토. 사실 신전의 도시래 봤자 그리스나 로마 같겠지 했는데 버스타고 오는 길에 언뜻 보니 대리석도 모자이크도 아닌 황토 빛의 신전들이 묘한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근데 이건 그나마 버스라도 타고난 다음의 여유 있는 생각이다.
내리는 순간부터 상당히 번잡스러워 지도 하나 없이는 밖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나던 팔레르모와 달리 아그리젠토는 나름 센트랄 역이라면서 역 앞에 웅장한 갈림길만 나 있다.
역 앞에 한가해 보이시는 할아버지가 숙소주소를 보시더니 가볍게 7킬로미터라고 하시길래 또 숫자 개념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갈림길만 나오면 100% 실패를 자랑하는 방향치인 관계로 이상한 민가촌에 접어들었다. 깨끗하고 높게 지은 듯한 주택가에 자가용들만 다니고 무슨 가게나 식당 같은 간판도 하나 안 보이는 길을 한 30분 걷다가 결국 다시 역으로 기어 올라갔다.
사실은 그냥 평화로운 주택가일 뿐이었는데 오가는 사람도 없고 집들이며 차들도 다 훌륭해 보이고 또 여기가 시칠리아이다 보니 나 혼자 이 평화로운 주말에 마피아들의 기습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라는 촌스러운 상상을 좀 하게 된 거다.
결국 버스표를 사고 숙소로 간다는 버스를 탔는데 한 30분이 넘고 캠핑장들을 다 지나도록 아저씨는 내려줄 생각을 안 한다. 돌아보니 승객도 나 하나다. 아저씨도 혹시 마피아? 늙은 날 잡아다 뭘 하겠어까지 진도가 나갔는데 아줌마 승객이 하나 탔다. 여기서 이 아줌마와 아저씨가 부부다-할 정도로 성의 있게 상상하는 성격은 아니라 잠시의 의심을 접고 있었더니 어느덧 캠핑장 정문 앞에 차가 섰다. 그라찌에-프레고 한 세트 등장하시고 나는 비수기의 특권을 누리며 침대 4개짜리 방갈로를 혼자 차지했다. 빨래도 하고 씻고 캠핑장 앞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장도 보고나니 평화가 찾아온 듯 하다. 사실 배낭 멘 채로 아그리젠토 기차역 인근의 주택가를 정처 없이 헤맬 때도 해지기 전에 어딘가에서 편히 고생스럽던 낮시간을 옛날 생각처럼 하게 될 거라고 믿기는 했었지만.
시칠리아 버전 웰빙황토집^^
나는 정말 비를 몰고 다니는 것일까. 비가 또 온다. 기뻐하며 캠핑장에서 빨래도 다 해 널었는데. 게다가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비라 넓다고 좋아라 했던 오두막이 좀 썰렁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이 때. 소리 없이 문밖을 서성이는 그림자. 헉-
나가보니 그 소리 없는 그림자는 아까 나를 뒤에서 들이받았던 캠프에서 키우는 백구다. 짜식, 무게 잡으면서 알아서 내 오두막 현관에 자릴 잡다니 정말 듬직하다. 화장실갈 때 따라와 주면 더 고마울 텐데. 이탈리아의 개들은 덩치는 커다란 녀석들이 사람 잘 따르고 온순하다. 터키의 개들에 비하자면 천사와 악마-수준. 그나저나 하필 캠핑장에서 자는 날 밤비가 내리다니 음. 그러고 보니 날씨에 따라서는 안 좋을 수도 있는 숙소.
바로 요녀석.
드디어 사원 구경 시작. 무작정 걷기 시작한 엠포리오 거리는 걷기엔 참 좋은 길이지만 어느새 ‘고속’도로로 이어져서 질주하는 차들이 아슬아슬 비껴갈 때면 도로변에 이따금 등장하는 납작한 동물시체들 생각이 아찔하게 나기도 했다.
여의도에서 63빌딩 찾아가듯 언덕배기의 사원을 향해 도로변에서 예쁜 산책로 같은-우리나라로 치면 논둑길을 걸어가다 보니 경계선이 등장. 철책을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맘 단정히 먹고 다시 도로변으로 나서는데 맘 좋게 생긴 아저씨가 태워주었다. 말도 거의 안 통하는 사이인데 열렬한 초대의 행렬이 이어진다. 가족이 있냐고 한 마디만 물어봤으면 될 것을 혹시 외로운 독거노인이 아닐까 하는 기우에 마음이 기울어 그라찌에로 마무리 하고 냉큼 내렸다.
진흙으로 빚은 것 같은, 그래서 신을 위한 인간의 창세기를 연상시키던 신전들은 가까이서 보니 황토바위로 지은 것들 이었다. 감흥은 바뀌었지만 색감의 독특함은 여전하다. 아름답지만 아직 색을 입히지 못한 것처럼 불완전함이 보이는 웅장한 신전의 흔적들.
8유로로 모든 사원을 볼 수 있는 입장권을 파는데 콜로세움 하나가 10유로이던 로마에 비하면 인심 후한 편이다.
언덕에 나란히 선 템플삼형제 맞은편에는 쓰러진 기둥들이 가득한 넓은 사원터가 하나 더 있다. 막 만지고 막 올라가도 되는 곳이다. 딱 하나 우뚝 남아있는 신전입구 기둥과 그 옆에 즐비한 무너진 기둥들에서 시간의 느낌이 커진다. 이런 옛터들은 언제나 시간의 묘한 기운에 취하게 한다. 수많은 영웅들이 지나간 바로 그 자리에 생명이 없어 더 오래 남아있는 것들과의 대비.
전에 어린이 과학책에서 읽은 건데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신기한 옷을 한 벌 얻는단다. 이 옷은 추우면 덥혀주고 더우면 식혀주고 몸이 자라면 같이 자라는 요술 옷인데, 이 옷은 바로바로- 피부. 언제부턴가 사람은 살아있을 땐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아직 따라잡지 못하는 신기한 생체공장을 돌려대는 놀라운 생명체이다가 심장이 멎는 순간 전부 다 똑같이 소멸이 시작되는 존재라는 것이 새삼 신기해졌다. 뽑아도 살아있는 몸에서는 계속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해서 재미로 헌혈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궁극이 유한을 만들고 유한이 보다 긴 유한을 만든 자리를 보면 갑자기 우주의 비밀이 사람에게 있다는 말을 알아들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신전을 내려오다가 도로변에서 보이는 신전을 찍고 돌아섰는데 차를 세우는 것인 줄 알았는지 또 착하게 생긴 아저씨가 멈춰주었다. 다시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대화 끝에 내가 안 본 사원하나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행선지가 바뀌었다. 아몬드 나무에서 갓 딴 아몬드도 처음 먹어보고 작지만 지층이 보이는 특이한 볼카노 템플도 구경했다.
적극적인 호의는 황송하면서도 불안하다. 권하는 이후 일정을 계속 거절하면서 이렇게 친절한 사람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어쩌겠나. 이것이 떠돌이의 숙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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