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강한섭이 말하는 이명세


출처 : FILM2.0   2005. 09. 21
 
감독과 평론가의 17년에 걸친 우정과 논쟁



강한섭이 말하는 이명세

2005.09.21 / 강한섭(서울예대 영화과 교수) 


서울예대 영화과 강한섭 교수가 이명세 감독의 신작 <형사 Duelist>를 보고 1989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로부터 17년, 두 사람은 밀회와 상박의 의미심장한 시간들을 거쳐왔다. 강한섭 교수가 그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A4 10쪽에 이르는 장문의 원고를 싣는다

1. 다짜고짜

“나는 통합영화시대의 제1호 감독이다.” 내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이명세가 나에게 다짜고짜 던진 제1성이다. 때는 1989년 6월 24일 13시경, 장소는 종로 3가에 위치한 옛날 단성사극장 앞 광장. 비공식 시사회에서 <개그맨>을 처음 보고 ‘아니, 대한민국에도 이런 멋진 영화가 있다니’ 충격을 먹은 평론가는 중간에 사람을 놓아 개봉일에 감독을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띄워놓은 참이었다. 1회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이 광장으로 쏟아지고 얼마 후 검은 바지, 검은 남방 차림으로 나타난 감독에게 평론가는 좋은 영화를 보았다고 시네루를 던졌다. 그러자 감독이 통성명도 나누기 전에 당연하다는 듯 폼을 잡으며 대화를 외면하고 마치 독립 투사의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톤과 음색으로 파고다공원 쪽을 향해 ‘통합영화시대’를 외쳤던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렀다. 이명세는 한국의 중견 감독을 넘어 거의 임권택 선생님 정도의 권위에 육박하는 국가대표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무려 제작비 1백억 원이 투자된 일곱 번째 작품 <형사 Duelist>를 완성하고 목하 밀려드는 취재와 인터뷰 스케줄에 비명을 지르는 척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오만해진 이명세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십수 년 전 네가 스스로 호명한 ‘통합영화 1호 감독’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느냐?” “물론! 나의 영화 연보에 실패작은 없으며, 나는 모든 작품을 통해 통합영화의 개론과 각론을 쓰고 있다.” 기가 막혀버린 평론가가 이제 아주 절망적으로 물었다. “(코웃음을 치며) 그래, 그렇다면 통합영화시대 제2호 감독은 누구냐?” “불행하지만 아직 없다.” “아니, 뭐라고? 그렇다면 통합영화란 계룡산 1인 신흥 종교구만. 너는 홍상수를 칭찬하고 김지운도 싹수가 보인다고 했잖아?” "(잠시 곤혹스러운 모습, 하지만 곧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바뀌며) 아직 영화를 진화적 관점에서 찍는 후배들이 없어. 물고기 다리가 퇴화되어 지느러미로 헤엄친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고 모두 물고기의 겉모습만 바라보고 있잖아.” “(속으로) 진화? 퇴화? 다리? 물고기? 아니 이 못말리는 본질주의자가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 친구 문화진화론 제1호 평론가를 선언한 내 책을 읽고 감동 먹은 거 아냐?”

감독이라는 창작자와 평론가라는 비평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인간의 하찮은 육감과 이성을 가지고 무한대의 항시 변하는 세상과 우주를 경험하고 분석한 다음 표현하고 게다가 그것을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원래 창조와 평가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며 그도 아니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미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제 분수를 알고 살았던 시절에 종일 놀고 질문하며 살고 싶은 특별한 '끼'를 가진 아웃사이더들은 제사의 무당이 되거나 초야나 광야에서 하늘의 섭리와 땅의 도리를 궁리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요즘에는 세상이 참 좋아져 무당들을 예술가로 대접하고 일류 무당은 엄청난 출연료에 더해 제작 지분의 반을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시비 가리기의 도사들은 동서고금의 온갖 사이비 이론을 마치 제것인 양 끌어들여 세상이 이러니저러니 하며 중생들을 훈계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창작자와 비평가는 이렇게 원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두 직업은 신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 근대 시민들이 중세의 전제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투쟁 전략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창작자와 비평가는 그러므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며 내가 세상을 알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비판할 수 있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슈퍼맨들이다. 창작자와 비평가는 오만과 독단으로 세상과 승부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최고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다. 자본에 빌붙고 권력에 신경 쓰는 놈들은 감독도 비평가도 아니다. 이명세와 강한섭은 최소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 배짱으로 우리는 17년을 서로 싸웠다.

2. “나는 그런 감독이 아니야”
이명세는 중증 왕자병 환자다. 그는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소설책을 본 문제 학생이었고 군대에서는 ‘악질 개인주의자’로 찍혀 탄압당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고향집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치유 불능의 말기 환자가 된 것에는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나는 한국영화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1989년의 한국영화 베스트 원으로 <개그맨>을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막가파식 코멘트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독립영화를 시작하면서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모두 실천해 버렸고, 이명세의 <개그맨>은 충무로 영화의 70년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경을 제시했다. 이 두 천재가 걸어갈 90년대의 10년이 한국영화를 결정할 것이다.”

<개그맨>은 1988년 크리스마스-신정 특선 프로로 단성사에서 개봉될 예정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기술 시사를 보면서 너무나 재미있어 하는 차에 전화가 걸려오자 “잠깐 상영 중지!”를 외칠 정도였다. 그러나 시사가 끝나고 주위를 살펴보자 자신과 감독을 빼면 모두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앞서 개봉한 <다이 하드>가 성탄절이 다가올수록 관객이 급증하는 파죽지세의 흥행 기록을 수립해 버렸다. 그래서 지방 배급사들의 반응도 영 아니었던 <개그맨>의 예고 간판은 철거되었다. 그러다 혹시 모르지 하며 완성한 지 반 년이 훨씬 넘어 기본적인 광고만 하고 그때만 해도 모두가 피해갔던 방학 전 비수기 프로그램으로 간신히 개봉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케팅도 포기하고 언론 리뷰와 관객 반응도 별로였던 영화의 흥행은 불 보듯 뻔했다. 돈도 못 벌고 명예도 얻지 못한 대역죄를 범한 충무로 신인감독은 지금처럼 그때도 ‘조기 퇴출’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몇몇이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충무로에 천재가 나타났다고. 그중 한 사람이 지금은 여성영화인회의를 이끌고 있는 채윤희 씨다. 그때 상당한 자금력을 가진 신생 영화사로 소문났던 삼호필름의 이사로 일했던 그는 이명세가 두 번째 작품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1990년 12월 30일 오후, 겨울의 짧은 해가 서산을 향해 다이빙을 하기 직전쯤, 이명세와 나는 피카디리극장 옆 골목의 한 허름한 대폿집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방금 전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상영 중인 피카디리극장의 매표소 입구가 ‘전회 매진’을 알리는 영광의 입간판으로 봉쇄되는 것을 목도했다. 우리는 영화하는 사람들이 이 판을 못 떠나는 몇 가지 도락 중에서도 으뜸인 ‘흥행 숫자’ 맞추기 내기를 즐기다 곧 감독과 평론가의 대결 구도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너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여자 주인공 미영의 짧은 여행 시퀀스는 너의 십팔번인 현실과 꿈의 관계를 날카롭고 성실한 삶의 체험을 통해 보여 주는 명장면이다 등등의 의례적 찬사를 보내고 곧 다음과 같은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개그맨>에 비하면 습작에 불과한 작품이다.” “<개그맨>의 페이소스 넘치는 반문명, 반체제의 풍자는 다 어디로 가고 표피적인 개그들이 휘날리고 있다.” “너같은 악질 스타일리스트들은 변화하는 세계의 역사성 보다는 자아 성찰을 통한 진리의 획득이라는 반계몽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쉽다. 그러면 바로 그순간 네가 혐오하는 관습의 유령이 너의 의식을 개인화, 관념화의 진공 상태로 만들 거야.” “이명세를 이명세답게 만드는 것은 허깨비처럼 우리의 생각을 고착화시키는 관습의 파괴자로서지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에서 얻게 되는 범속한 깨달음 같은 게 아냐.” 비평가의 줄 펀치를 맞으면서도 이명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의 독설이 끝나자 이명세가 한마디로 사태를 종결지었다. “네가 잘못 봤어. 나는 그런 감독이 아니야.”

3. 이명세 매니저
1992년 2월 중순의 늦은 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첫사랑>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걸작의 탄생을 눈치채 버린 사람들이 강원도 양구 근처 모텔에서 충무로 야사를 안주 삼아 로케이션 헌팅의 첫날밤을 보내고 있었다. 제작 실장 김태균(<화산고>의 감독), 연출부 친구들, 나, 그리고 훌륭한 반전(反戰)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촬영 직전에 뇌일혈로 쓰러져 사회 활동을 접은 시인이자 영화감독 이세룡 형.

우리는 그때 충무로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입신하여 고공을 비행하던 이명세의 큰 허파에 더욱 뜨거운 야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시나리오 죽인다.” “작품 나오겠다.” “흥행도 따논 당상이다.” 나는 그때 이미 공정하고 양식 있는 평론가의 직분을 망각하고 이명세 팬클럽 회장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참 그날 아침 장충동의 영화사를 출발하면서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흥행 실패로 별 볼일 없었던 강우석이 우리 팀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계절은 겨울인데 안타깝게도 설악산 골짜기의 눈도 벌써 흐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명세의 30대는 절정을 향해 차오르고 있었다. 그는 곧 영화의 계절을 봄으로 바꿨다. 그리고는 봄에 시작하는 첫사랑의 모든 것을, 그 떨리는 우리 모두의 경험을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과 충돌로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내가 보기에 이명세의 대표작은 단연 <첫사랑>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한국영화의 걸작 하나가 있다면 그게 바로 <첫사랑>이다. “너는 위대하게 35세에 걸작을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는 그 이후 다시는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나의 지적에 이명세는 역시 동의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에게 실패작은 없다. 그때그때 소재에 맞게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 진수를 뽑아내는 것이다. 나의 불륜의 사랑, 나의 신부의 사랑, 그리고 나의 첫사랑. 모두 중요하다. 아니, 나의 안성기 과장, 나의 우 형사, 나의 남옥이와 나의 슬픈 눈동자. 모두 최고다.” “웃기지 마라. 허세 부리지 마라. 너는 35세에 시간의 비밀을 알았다. 그것은 너의 두려울 정도의 몰입과 직관, 그리고 상상력으로 얻어진 거다. 너는 ‘첫사랑은 진화하지 않는다’부터 출발했다. 당연하다. 첫사랑은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몰래 떨면서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21세기의 청춘들도 그렇다. 그래서 첫사랑은 시인 정현종이 간파했고 네가 완벽하게 표현했듯이 시간의 회귀와 영겁을 증명하는 바로 시간의 비밀을 여는 단초인 거다. 그래서 너는 시간의 상대성을 발견한 거야. 바로 너는 아인슈타인이 고등 방정식으로 증명한 상대성을 직관으로 터득한 거야. 그러니 이제 솔직하게 고백해봐. 너의 걸작은 <첫사랑> 하나라고.” “아니, 나에게 실패작은 없다. 굳이 호감이 가는 작품을 고르자면 <첫사랑>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리고 <형사 Duelist>다.” “지독한 친구.”

1993년 1월 22일 아침. 명보극장을 향해 이명세 팬클럽이 가기 시작했다. 매표구에서 그들은 입장권을 사고 감독에게 흔들어 보였다. 꽤 많았다. 거의 1백여 명 회원이 줄을 서자 꽤 길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사랑했던 관객들은 오지 않았다. 차갑게 외면했다. <첫사랑>은 격동의 사회문화 혁명기를 보내고 있던 한국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이며 유치찬란한 영화로 매도됐다. 흥행 성적은 1주일 상영에 총 4,917명! 오후 5시쯤 다시 찾아간 명보극장 앞에 이명세가 혼자 검은 바바리에 가방을 가로 메고 정면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우리는 극장 옆 물만두 집에서 술을 시켜 식도에 부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힘을 내자고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이번에 다시 만나 그때 얼마나 충격이 크고 분했었냐고 물어보았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때 명보극장 앞 건널목을 건너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어. 나같이 건방진 놈이 두 작품 연속 흥행했으면 얼마나 더 건방지게 됐겠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어, 정말.”

나의 대표 감독 이명세가 세상과 불화하기 시작하자 평론가도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영화상 심사만 맡으면 어김없이 이명세와 이명세의 배우들과 이명세의 기술인들을 밀었다. 1993년 제14회 청룡상 여우주연상은 <첫사랑>의 영신이 김혜수가 받았다. 김혜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 속에 있다. 영화각본상도 이명세가 받았다. 상대성 이론을 직관으로 표현했으니 당연하다. 그때 심사위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첫사랑> 옹호론에 손을 들어주었다. 작품상도 <첫사랑>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눈길이 냉랭해졌다. 작품상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받았다. 기술상은 <그대안의 블루>의 안상수 디자이너에게 돌아갔다. 결국 그 한을 영화평론상에서 풀었다. <첫사랑>의 미술감독 조융삼의 디자인은 지금도 내가 아는 한국영화 최고의 프로덕션 디자인이다. 그 무렵 어느 모임에서 존경하는 평론가 김종원 선생이 나를 소개하면서 ‘이명세 감독의 매니저’라 호칭했다.

4. 사막을 건너다
이명세의 작품 연보에는 흥행 실패에 따른 타의에 의한 두 번의 ‘사막 건너기’와 욕망의 통제에 의한 두 번의 ‘자의의 휴식기’가 있다. 1993년 1월의 <첫사랑> 대패부터 1994년 중반 네 번째 작품 <남자는 괴로워>의 촬영에 들어가기까지가 첫 번째 사막기고, 1996년 다섯 번째 작품 <지독한 사랑>마저 관객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또다시 유랑해야 했던 1999년 상반기까지가 두 번째 사막기다.

첫 번째 시련기에 나는 이명세를 많이 위로하지 못했다. 내가 멋모르고 설쳐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학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YS정권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고 요즘의 ‘문화 산업 5대 강국론’에 해당하는 ‘<쥬라기 공원> 한 편의 수익이 현대 자동차 150만 대 수출액과 맞먹는다’와 같은 엉터리 어용 영화 정책을 판매하는 한심한 교수였다. 그래서 새벽 조찬부터 시작해 오전에 강의 잠깐 하고 오후에는 각종 정부 위원회로 뛰어다녔으며 그 사이사이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얼굴을 내밀어 사소한 부를 축적하고 세속의 명예를 쌓아가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괴로워> 촬영장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아마 시사회도 바빠 가보지 못한 것 같다. 아무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1995년 2월 중순에 개봉된 <남자는 괴로워>는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3월 중순경 이명세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SOS 전화가 왔다. 서초동의 한 냉기가 도는 오피스텔에서 만난 이명세는 지치고 낙담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평정심을 잃고 한국의 ‘무식한’ 평론가와 기자 놈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의 잇단 흥행 재앙은 당당하게 오만했던 이명세의 평상심을 온통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는 실직한 안성기 과장만큼 외롭고 비참했다. 그렇다고 영화 주인공처럼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빌딩 복도를 헤집고 다니거나 빗물을 차면서 거리에서 춤출 수도 없었다. 그는 흥행을 아주 섬세하고 치밀하게 분석하는 감독이다. 영화 흥행 통계를 살피다가 ‘장르 20년 주기설’을 만들 정도다. <남자는 괴로워>는 1965년 작 <1등 과장>의 리메이크다. 그래서 1995년이면 한국이 단군 이래 최고 호황이라는 3저 호황기인데 직장에서의 퇴출과 자살이라니 사회를 잘못 읽었구나 하자 그가 바로 받아쳤다. “천만에. 원래 경기 호황기에 가난한 이야기, 불행한 이야기가 장사되는 거야. 여유가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불황기에는 여유가 없어져 해피 엔딩의 드라마가 장사되는 거야.” 이 정도의 흥행 전략가인데 번번이 화살은 과녁을 훨씬 벗어났다.

그래서 운이 좋아 만들게 된 <지독한 사랑> 때는 한 번 더 실패하면 충무로에서 영구 추방이라는 강박관념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략가의 분석을 동원해 ‘소프트 포르노란 무엇인가’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명세류 소프트 포르노를 동양 최대의 대한극장에서 개봉했으니 장사가 될 리 없었다. 비평가들의 반응도 다시 냉랭했다. 대한극장 앞에서 마주친 강수연 씨가 나에게 “강한섭 씨만 별 네 개 줬대?”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해 대종상에서 나는 예선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래서 박종원 감독, 편장완 교수, 신철 제작자 등과 의기투합해 대종상 총 18개 부문에서 17개 부문에 <지독한 사랑>을 후보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본선 행사가 펼쳐진 전라도 무주로 이명세와 같이 갔다. 결과는 ‘최다 부문 후보 지명, 전 부문 탈락’의 진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대종상의 스타는 <접속>의 장윤현이었다. 장 감독의 차를 타고 3명이 서울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한 시골 다방에서 장윤현이 “우리 세대의 젊은 감독들도 이명세의 <첫사랑>을 보고 또 보고 있습니다” 했다. 장 감독, 참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1996년 여름부터 1998년 말까지 이명세는 참 외로웠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자주 만났다. 현장에서 독재를 부려야 할 이명세가 평론가와 시사회를 보러 다녔다.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며 특강도 많이 했다. 실패한 영화감독에게 학생들이 환호할 리 없는데 말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우리 학교 영화과 신입생 OT에도 따라와 학생들과 술을 마셨다. 그러다 사건이 났다. 시사 주간 ‘타임’지의 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토론토영화제를 정리하는 기사에서 한국영화를 발견하고 그중에서도 <지독한 사랑>이 으뜸으로 매혹적이라고 크게 소개한 것이다. 그래서 전화기를 잡고 “명세야, 너 타임지에 났다! 그것도 사진까지”하며 알려주었다. 기사를 복사하고 영어 원문을 번역까지 해줬다. 시사회 때 만난 기자들에게도 주었다. 그래서 몇 신문에 ‘타임지 이명세 감독 극찬’이라는 기사가 났다. 참 유치한 시절이다.

5. 장인(匠人)
나는 이명세가 항상 다음 영화를 만들다가 녹음실에서 사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작품의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 끝날 때마다 10년은 늙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동년배인데 이 감독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인다. 내가 이런 긴 글을 쓰는 것도 <형사 Duelist>가 그의 유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의 장인 기질은 1999년 20세기의 마지막 작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 박중훈의 다음 대사에 잘 나타나 있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내가 글을 쓰지 않은 유일한 이명세 영화다. 그때 평론에 흥미를 잃고 대신 이명세 프로듀서를 하려고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자와 투자자를 만났다. 모두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평했지만 이명세라고 하면 고개를 저었다. 유치찬란한 멜로 감독이 액션영화라니 그것도 도시 액션이라니 곤란해 했다. 이명세에게 항상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신철 제작자도 할까 말까 하다가 “한섭아, 시나리오는 참 좋다”한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이 감독도 많은 제작자를 만났다. 한동안은 명배우 명계남 씨의 이스트필름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이명세가 전화를 걸어 흥분했다. “아, 참, 이창동 감독, 그 놈이 시나리오 이렇게 쓰는 게 아니래.” 그래서 시나리오가 충무로를 돌고 돌다 결국 태원영화사로 갔다. 영화는 대성공하고 이명세는 복권됐다. 그리고 21세기가 열렸다. 그러나 이명세는 제작사와 불화했다.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 진저리를 치며 한국의 영화 현장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한국의 영화학’을 처음부터 다시 쓰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6. 뉴욕 브룩클린과 이멜

나는 이명세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흥행에 성공시킨 99년 여름 이제야 몇 년 전 그에게 빌려줬던 1백만 원이 넘는 돈에 원금에 이자를 더해 2백만 원쯤 돌려받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인격을 믿고 차용증을 안 쓴 것이 화근이었다. 이명세는 계약금을 두둑하게 줄 테니 차기 프로젝트나 빨리 계약하자는 충무로 제작자들을 뿌리치고 그해 겨울 어느 깊은 밤 술자리에서 돌연 “조국에서는 더 이상 이룰 게 없다”는 정말 그의 소녀 취향적 '뽀시시' 영상 스타일만큼이나 살 떨리는 발언과 함께 “할리우드로 가 세계 일류들과 싸워 꼭 승리하고 금의환향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돈을 받지 못해 낙담하는 필자에게 “네 돈은 이자를 복리로 쳐 달러로 갚겠다”며 비장하게 말했다. 이듬해 4월 그는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정말 태평양을 건너가 버렸다. 그 이후 그는 잊을라치면 전화나 메일을 때려 팬 관리를 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이다가, 조국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불안했는지 몇 번 귀국하여 ‘피가 한 방울도 안 나오는 놀라운 공포영화’의 트리트먼트를 완성하여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덕션에 주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니 절대로 자기를 배신하면 안 된다며 점차 열정이 식어가던 그의 국내 지지자들을 협박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명세의 뉴욕 브루클린 시절의 절정은 리들리 스콧도 선댄스영화제도 유럽의 회고전도 아니다. 그는 뉴욕에서 영화의 고전들을 보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철학자가 되었다. 정말이다. 한국의 지인들에게 보낸 여러 메일들 중에서 2001년 10월 2일자가 압권이다. 그래서 전문을 소개한다.

“아직도 떨림이 남아 있어서, 어떤 말로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정말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느낌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좀 더 오랫동안 묻어두었어야 할 말들을 오늘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오늘 2시에 만났습니다. 정확하게 10월 1일 2시입니다. 오늘은 날도 흐리고(이 곳은 요 며칠 계속 흐립니다) 비도 오고 해서, 사실은 이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은 먹었었지만 잠시 망설였습니다. 만약에 안 갔다면...? 뭐, 그래도 인연이 있으면 만나기는 했겠지만, 좀 더 시간이 걸렸겠죠.

오늘은 이상하게 눈도 일찍 떠졌습니다. 다른 날 같았으면 아마 더 침대에서 뭉기적거릴 텐데, 눈을 떴더니, 그런대로 몸도 가볍고 해서 일찍 나갔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그래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 5분 전에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다른 시간 같으면 그곳에는 젊은 사람들로 꽉 차는 장소인데, 오늘은 낮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이 곳 낮 시간은 그렇게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은 장소입니다. 정각 2시가 되자 피아노맨이 들어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와 웃음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버스터 키튼입니다. 오늘 그가 보여 준 이야기는 카메라맨(<THE CAMERAMAN>, 1929)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쯤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나는 영화를 영화로 찍는 5명을 안다, 그 5명은 오즈 야스지로, 페데리코 펠리니, 채플린, 자크 타티, 버스터 키튼이라고요. 이 명단은 이곳에 와서 만든 겁니다. 그 명단을 만들게 된 계기는 올 초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린 펠리니의 라는 작품이었읍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영화다'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 생각에는 누가 영화를 영화로 찍는가를 한 번 생각해봤죠. 그 참에 필름포럼에서 자크 타티 회고전을 했읍니다. 그때 <위고씨의 휴일>이란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영화라고 생각해서 추가했고, 언제나 영화제에 가면 누구를 좋아하는가? 물을 때마다, 내가 채플린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버스터 키튼(처음에는 채플린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의 비디오 <STEAMBOAT BILL.JR>를 보곤 버스터 키튼 역시 영화를 영화로 찍는 사람이구나 하고 명단에 올렸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확실하게 안 것입니다. 그는 정말 영화를 영화로 찍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대로 내가 생각했던 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영화라는 것이, 어떤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는 공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영화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영화적인 것만이 영화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의 한계입니다. 분명히 영화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유한한 것처럼. 그 한계를 인정해야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한계라는 것이 바로 각 예술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화는 단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정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좋은 영화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수는 쪼개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수는 확장의 대상이지, 결코 분석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문답과 같은 것입니다. '차나 한잔 들고 가게' 속에서 어떻게 선을 분석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론 짓는 것은 ‘분석 대상이 되는 것은 아직 그 정수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시가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 흥분 상태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버스터 키튼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한섭형 잘 지내지? 명세"


처음 메일을 읽고 참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감독에게라면 돈을 떼이더라도 가만히 있겠다 했다. “좋은 영화는 분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화두는 분명 나같이 영화를 찢고 나누고 해체하는 일로 먹고사는 영화 글쟁이들을 무장 해제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싶었다. 학생들에게 메일을 소개하자 몇몇 마음이 아름다운 학생들은 건드리면 곧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감동을 주체할 수 없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감상적인 글쟁이가 아니다. 그래서 이명세의 메일을 물신화하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일갈했다. “이명세는 영화 철학의 오사마 빈 라덴이다. 경계하라!”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영화를 영화로 찍는 5명을 안다”, “영화적인 것만이 영화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단순해야 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정수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명세는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고 그 진리에 도달하려면 육체와 정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변하지 않는 정수(essence)로서의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는 중세 인식론의 담론에 기초하고 있다. 어떤 사물과 현상에 불변의 정수가 있고 그 정수를 영혼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거짓말이다. 근대의 철학 천재들을 거명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머릿속에는 영혼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예술의 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영화의 에센스는 끊임없이 변한다. 작품 그 자체는 의미가 없고 오직 작가, 작품, 관객,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환경들 사이의 관계의 조합에서만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질주의자들은 위험하다. 진리를 유일한 것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빈 라덴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 그리고 부시와 같은 패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자가 다 세계 평화에 암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명세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예술 근본주의자들은 속물적인 세상에 분노하면서 그 울부짖음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의 기본 성격을 오해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오해의 힘으로 영화 예술이라는 우물의 깊이를 더해 마침내 지층의 심연에 도달해 펄펄 끓는 마그마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명세가 돈 주겠다는 제작자들을 뿌리치고 더 큰 영화의 승부를 위해 뉴욕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고집스러운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평하면서 “마치 영화 스타일의 백과사전을 보는 것 같다"고 격찬한 이명세의 눈부신 스타일은 이렇게 그의 고집과 노력의 산물이다. 이명세는 본질주의자로 태어나 본질주의자로 살다 죽어야 하는 운명적인 예술가다.

7. 확신범들이 만드는 세상
신들의 무덤 판테온에 모셔진 위대한 영화감독들 중 세 사람이 이명세를 찾아왔다. 오손 웰스, 알프레드 히치콕, 오즈 야스지로. 시간순이다. 거인 웰스는 동물원에서 만났다. 한 뚱뚱한 남자가 앞에 걸어가다가 뒤 돌아서 이명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래서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개그맨>에서 배창호 감독을 캐스팅했다. 영화는 꿈인가 노스탤지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꿈속의 꿈에 불과한 것인가. 착한 일본 사람 오즈는 이명세의 책상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준비할 때였다. 인사를 하고 너무 반가워 차라도 대접하려고 방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이미 사라져버렸다. 오즈의 <태어났지만...>과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 두 작품을 연결하는 공통 부호는 무엇일까? 히치콕 감독과의 조우에 대해서 이명세는 2002년 3월에 쓴 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친구가 보낸 통영의 매화 소식만 없었다면, 나는 요 근래 따뜻한 날을 그저 이상 기온의 현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창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춥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봄이 온 것 같다. 정말 봄이다. 어떻게 지내시는가? 이제 새 학기니 매년 똑같다 해도 분주하시겠지. 생각보다 2차 시나리오가 잘 진행되고 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꾼 꿈의 화두 역시 풀었음을 알립니다. 10년 전 히치콕이 내게 M자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그동안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생각했었지. 미스티, 미스터리, 머더(Murder)... 그래서 그 때부터 영화 속에는 안개가 들어가기 시작했지. <첫사랑>의 안개는 그 꿈과 연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았던 거지. M이란 맥거핀(Macguffin)이였거든. 이제 다음 영화에는 맥거핀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맥거핀이란 대중영화입니다.”

그리고 지금 2005년 9월. 이명세는 뉴욕 프로젝트를 일단 접고 서울로 돌아와 M프로덕션을 서울예술대학 남산 캠퍼스에 차리고 자기 말로 ‘영화 사상 가장 빛나는 감각 액션’을 보여 주는 <형사 Duelist>를 피와 땀으로 완성하고 관객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제 M이란 무엇인가? 관객을 영화 속으로 안내하는 흥분, 두려움, 열정의 가공 장치 맥거핀인가? ‘성공 시나리오 X를 찾아서’라는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는 이번 가을 학기 나의 ‘시나리오 워크숍’ 강좌의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자 몇몇 재미있는 답변들이 나왔다. “M은 그림자예요. 실체보다 크고 돌아보면 사라져 버리니까요.”, “M은 맥도날드 햄버거의 머핀이죠. 머핀은 달콤하지만 맥도날드보다는 던킨 도너츠가 맛있으니까요.” 자라나는 우리 학생 아이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선생님들이다.

요즘 이명세의 답변은 “M은 M으로 시작되는 모든 단어들이다. 미스티, 미스터리, 머더, 맥거핀, 마릴린 먼로, 그리고 M 스쿨....” 이렇게 요설을 하는 이명세가 괘씸해 “요즘 너에게 M은 머니야” 하니까 옆에 있던 김홍준 감독이 “모어(More) 머니"라며 거든다. 모어 머니를 넘어 맥시멈 머니임에 틀림없다.

8. 세상의 중심에서 큰소리치다

이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통합 영화란 무엇이며 이명세는 정말 2호가 없는 1호 감독인가를 따져보자. 우선 통합 영화는 대단한 발상이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를 걸면 반드시 실망한다. 위대하지만 동시에 뻔한 소리기 때문이다.

“통합 영화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이미지와 사운드 구분은 육체/정신 이원론 수준에 머물고 있는 유치한 유럽 예술영화 감독들이나 하는 소리다. 예술과 돈도 목표는 하나고 메시지와 비주얼의 대결 구도도 쓰잘 데 없는 일이다. 사단칠정론에 따른 장르론도 할리우드 메이저의 프로덕션 라인업에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원래 둘이 아니라 하나고 예술가가 도통하면 세상의 불이(不二)함을 알고 온갖 나눔과 차이를 꿰뚫어 그 본질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시종여일(始終如一)의 표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맞고요. 지당하고요. 옳습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 즉 나누어지기 전의 통합으로서의 세상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것이 예술가의 존재 이유고요,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걸고 끝없는 절단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과학자예요. 그런데 최소와 기본으로서의 본질과 최대와 현상으로서의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 극대와 극소의 양 극단을 모두 왔다 갔다 해야지요. 그런데 과학자는 숫자와 등식을, 예술가는 이미지와 비유법에 의존해 세상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죠. 그것도 모르셨나요. 이명세 감독님. 당신은 세상의 정수를 추구하는 참 용기 있는 감독임에 틀림 없지만 장선우도 그래요. 김기덕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면 용기 있는 감독은 너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문화진화론 제1호 평론가의 이러한 멋진 설명을 이명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기가 설립한 M 스쿨의 주임 교수는 오즈, 펠리니, 채플린, 타티, 키튼 다섯 명뿐이고 자신은 이 다섯 영화 신(神)들의 세계를 통합하는 1호 감독이란다.

<형사 Duelist>의 반응은 관객과 전문가 공히 3할 열광, 3할 시큰퉁, 3할 불만, 나머지 무관심인 것 같다. 이명세가 목표로 했던 맥시멈 머니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고 제작비 1백억 원을 떨어버리고 나면 판돈을 걸고 달려든 도박사들 모두 각기 원금에 약간의 모어 머니 정도 나눠가질 것 같다. 그래서 “블록버스터를 목표로 했으면 동원이와 지원이의 운명적인 키스 신 정도는 있어야지” 하니까 대결 장면에서 칼날들이 부딪치는 것이 ‘쪽, 쪽, 쪽...’ 입 맞추는 거라며 그것도 모르냐는 식이다. 기가 막혀 “시나리오 문제 투성이야.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플롯이 빠져 있어. 슬픈 눈과 남순이가 왜 첫눈에 반하는지와 슬픈 눈이 왜 병조 판서를 배신하는지가 없어” 하면 “영화는 소설이 아니라 시야. 이미지야” 하면서 플로베르의 일물일어(一物一語)론까지 들먹이며 교수의 자질을 시비한다.

요즘 나도 일당백 결의로 세상의 속물 영화 담론과 싸우고 있지만 할 말이 없다. 당신은 “여전히 철 안든 아이 같다”는 중앙일보 이후남 기자의 도전에 “영화란 영원히 영(young)한 거다”로 답변하는 독선과 후안무치, 그리고 자신만만. 그래서 이 엇갈리는 대화에 흥미를 잃고 자리를 일어서려고 “세상의 중심에 서서 큰소리치는 것이 바로 생존이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명세 이 독선의 고집쟁이 또 아니란다. 영화는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연애 편지를, 그것도 작은 쪽지를 관객을 향해 띄우는 것이란다. 그러면 이것이 행운의 편지가 되어 도미노식으로 전염병이 되어 세상에 퍼지는 것이 영화란다. 그래서 관객은 어부란다. 통합영화 1호 감독이 풀어놓은 무한의 물고기 중에 능력껏, 취향에 따라 몇 마리 잡아가는 거란다. <형사 Duelist>는 반드시 흥행해야 한다. 그래서 이명세 좀 타락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명세 나한테 또 전화 걸어 새벽까지 술 마시자고 할 거니까. 그리고 진정한 영화, 영화의 진수, 어쩌고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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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르면서 저렇게 대화가 가능한 두 사람의 관계도 재미있고
넘쳐나는 애정으로 까대기를 하고 있는 강한섭은 귀엽다.
예술근본자든 악질스타일리스트든 간에
평생 겸손의 미덕 같은 것에 비굴하게 넘어가지 말라, 이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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