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오디세우스처럼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이름을 비밀에 부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들은 세개의 이름을 갖는데, 마누시(집시)끼리만 아는 부족에서의 이름이 있고, 이방인들 즉 가드제(Gadje)에게 알려주는 이름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비밀 이름이 있다. 비밀 이름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안고 일생에 단 한 번 귀엣말로 불러주는 이름으로, 오직 엄마 한 사람 밖에 모른다. 아무도, 아기 본인도, 아빠도, 그 어떤 사람도 결코 그 이름을 알아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뿐인 진짜 명명으로 간주된다. 이 이름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우며 너무나 철통처럼 호위되기에, 어떤 사악한 영도 그 이름을 가로채거나 그 주인을(혹은 그의 넋을) 앗아가지 못한다.
유혹자에게 있어서 유혹은 상대를 홀리는 것, 납치해서 붙잡아 두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유혹은 사랑이 아니다. 유혹자에게 있어 단 하나의 진정한 실패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매이는 것이다. 진정한 카사노바는 여자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욕망되어지기를 욕망할 뿐이다. 심미성(유혹)에서 윤리성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때부터 권태가 싹트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세 번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애 의해(우주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다), 다음에는 다윈 때문에(우리는 동물이며, 원숭이와 거의 흡사하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로 인해(우리는 우리 무의식의 꼭두각시다) 모욕을 맛 본 인류는 이제 자존심의 마지막 쪼가리들만 겨우 움켜쥐고 있는 상태다.
유혹하려면 타자를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스스로 유혹당하지 않으면 안된다......이타주의는 나르시시즘이라는 토양에서만 자랄 수 있는 연약하고 가냘픈 꽃인 것이다......사랑은 자살이다.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유혹의 귀재였던 두 여자, 클레오파트라와 마릴린 먼로를 보라, 두 여자 모두 당대 최고의 남성을 유혹했고, 스스로를 소멸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려면, 이기적인 어린아이, 자기중심주의에 완전히 매몰된 그 괴물을-오래 전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던-완전히 죽여야 한다.
<>앞에서 한 얘기를 완전히 뒤집고 있다.
잔인한 짓이긴 하지만 병마개 따위로 칠면조의 귀를 막아보면 이 가엾은 짐승은 자기 새끼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새끼들을 자신을 위협하는 다른 동물로 착각하여 가차없이 죽여버린다......부모 펭귄들은 새끼 수 천 마리가 빽빽대며 울고 있어도 그 가운데서 제 새끼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다......카나리아들은 바이브레이션과 발성을 수정하기 위해 노래와 관련하여 비축해놓은 뉴런들을 매년 갱신한다......다른 새의 둥지에서 자라는 뻐꾸기 새끼들은 그 새 새끼들의 고유한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양부모들을 유혹한다(속인다).
왜 나이트클럽에서는 고막이 터지도록 음악을 크게 트는 걸까? 이브 르크뤼비에 같은 작가는 소리가 알코올이나 춤 등과 마찬가지로 전두엽을 제어하는, 즉 감성이나 이성을 단절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을 대뇌변연계의 활동, 즉 본능, 감정, 정열, 야만성, 터부로, 특히 성적 감수성으로 이끄는 작용을 한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좀 더 신경생리학적인 관점에 따르면, 강렬한 소리는 콜린성활동을 봉쇄한다. 바로 이럴 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갈증이 일어나면 음료를 찾게 되고(따라서 클럽의 매상이 오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술도 마시게 되어 연애작업이 순조롭고 원활하게 굴러간다. 결국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때로 수컷들끼리의 다툼이 더욱 고도화되기도 한다. 생쥐 암컷은 방금 성관계를 가진 수컷이 아닌 다른 수컷 앞에 가면 프로락틴 분비가 저럴로 차단된다. 그로 인해 수정란이 자궁점막에 착상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저절로 피임의 효과가 발생한다(소위 브루스 효과).
더한 강적도 있다. 일부 여우원숭이 및 원숭이류에서는 덩치가 작은 놈(마우스여우원숭이)이나 큰 놈(짧은꼬리원숭이)이나 할 것 없이 우두머리 수컷이 지배당하는 수컷의 남성호르몬 분비와 생식활동을 거의 막아버린다. 이 같은 양상은 토끼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떤 동물을 자기 어미를 모른 채 자라게 하거나 여러 실험을 통해 어미와 자식을 경쟁상태에 지속적으로 놓아둠으로써 부모자식 간의 애착이 생기지 못하게 한다고 치자. 그 수컷(자식)과 암컷(어미)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지극히 원만하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의 금기는 부모자식 간의 애착과 가족적 사랑에서 기원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이 점에서 그리스신화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오이디푸스는 아주 어릴 때 버려졌기에 생모와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알아보지도 못했다.(여기에 그의 상징적 실명이 있다. 그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자기 눈을 스스로 찔러 멀게 한다). 그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자기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반면 같은 오이디푸스가 딸 일렉트라와 함께 유배생활을 할 때에는 근친상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아버지와 딸의 애착은 서로에게 충분히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지 않았던 사람, (아직까지는) 애착을 품지 않는 상대하고만 성관계를 할 수 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이 같은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는 결국 사랑하지 않는-적어도 가족적인 사랑이라는 차원에서는-사람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
<>역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것은 결과만으로 따다 붙인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이론이다. 끝부분의 논리는 재미있긴 하지만(올드보이 생각이 나는군...) 사랑과 가족간의 애착에는 좀 구분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타자가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할 때 그 타자에 대해 에로틱한 끌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잘 설명된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인질이 가해자를 심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기이하지만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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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잡학을 다 긁어놓아서 신선한 상식정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전체을 관통하는 주제라든가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실용정보를 원한다면 그닥 영양가가 없을 수도. 발랄한 어조는 지루하지 않게 읽는데에는 도움을 주나, 스스로의 유머감각에 도취한 나머지 자기논리를 뒤집는 오류도 나타난다.
'유혹'이라는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좀 긴 수필쯤 되겠다. 그러고 보니 인문보다는 문학분류가 낫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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