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립|Flipped|2010


어린애 둘 나오는 영화를 이렇게 몰입해서 보게 될 줄이야....
참 특별한 첫사랑이다.
모두와는 다르겠지만 하나쯤은,
혹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로 그 때의
그 기억과 닮았을.

그래도 좋아-였던 줄리와
왠지 싫어-였던 브라이스의 콩당콩당 첫사랑 이야기.
화면속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것 같은 1960년대의 미국이 배경이다.
브라이스네 누나 머리모양을 보는데 갑자기 백투더퓨처 생각이^^

 수박냄새가 좋았다는 줄리
베니와 준에서도 준을 돌보더니 
이제는 남동생을 돌보는 착한 형이 된 에이단 퀸
부부싸움 후 각각 어린 딸을 찾아와서 하던 얘기들: 
아이를 존중한다는 건 이런 것이겠지.

줄리가 아빠를 따라 요양원에 있는 정신지체장애인 삼촌을 만나고 오면서
가족임을 실감하는 모습을 보는데
얼마 전 끝난 일드 아임홈의 마지막이 겹쳤다.

관계란 손에 닿아야 하는 것임을.

편견에 사로잡힌 브라이스의아버지,
-아마도 하고 싶던 음악에서의 좌절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듯한
모자라도 최선을 다해 마음은 지켜가는 줄리네 아빠,
'지혜'가 생각나게 해준 할아버지,
조용히 할 일들 하시는 엄마들.
첫사랑을 둘러싼 두 가족이야기랄까.
이런 귀여운 영화의 감독이 로브 라이너라니.
더 반갑지 아니한가...!

 드디어 생각났다-브라이스네 엄마 힐러리 닮았다^^

나의 절친 악당들|Intimate Enemies|2015(본의 아닌 스포)

어쩌지, 나 하나도 안 놀랐음...

임상수와 류승범의 영화가 일주일도 안되서 심야반으로 쫓겨나다니...
어쩔 수 없이 좀 떨어진 극장을 찾아가서 봤다.

뭐래...
하수인들 잘라버릴때까지는 분해서 잠이 안오고
그거라도 잘라버리고 나니
눈 앞에서 원흉을 놓치고도 해피한거야? 그런거야?
'회장님'에게도, 시키는 대로 사는 노비들에게도, 거기에도 못끼는 딱한 것들에게도 
공평하게 다 X같은 세상에서는
복수도 찌질해진다는 나름 냉철한 진단이신지.
이왕 내지를 거면 갈때까지 갈 수 있는 비책을 장만한 뒤에 영화를 만들었어야지.
시원하려다 짜증남.

그래도...
승범도 승범이려니와
지누 같은 남자는 맘에 쏙 듦.
임상수는 이번에 좀 실망이지만
지누때문에 못 버리겠네 ㅋㅋ

주연배우 못 벗길때
대신 조연배우 막 벗겨대는 감독들 정말 재수 없었는데
임상수의 예의도 맘에 든다.

그러나...
저열한 인격에 저렴한 욕은 잘 맞는 짝이라해도
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욕은 좀 많이 피곤했다.
김주혁 진짜 욕.봤.다.

웬지 풍기던 무국적 영화의 스멜...
ㅎㅎㅎ역시나 투자책임자가 외국인.
한국사람 돈으로 만들었다면
야반도주해야했을지도^^
이상하게도 이번 영화는
누구 보라고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만들고 싶은대로 만든 영화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나게 만들고 본인도 별로 여러 번 봤을 것 같지 않아.

시키는대로 한 죄...
'돈의 맛'에 이어 또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시네.
하지만 이번엔 이미 깨달아버린 다음이었다우.
그런 걸 이런 영화로 만들 줄은 몰랐지만.
암튼 니들만 해피하고 보는 나는 안 시원한 마지막.
꼭 죽여야 맛은 아닌데 암튼 그렇다고....

참 또 하나 찝찝한 거.
예고편 하나에 쓰인 음악이
Smells like teen spirit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왔다.
마디는 비껴갔지만 난 표절로 판정.
이건 진짜 실망.

카트|Cart|2014


영화가끝난 뒤 올라온 자막은
일산 홈플러스의 뒷얘기를 떠올려 주었다.
까르푸가 홈에버로 바뀌며 직원들이 해고되었고
이랜드가 홈에버를 인수하면서 해고문제를 방치했다가
그나마 홈플러스가 인수하면서
노조간부들이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직원들이 복직되었던 곳.
그 뉴스를 보고 한 번 가봤던 그 '마트'의 직원들은 유난히 친절했다.

솔직히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선-악이 명확한 구도에서
굳이 그 그지같은 인간들에게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
힘이 없어서
배신을 하고 제 살길을 찾아간대도 다 이해해줘야할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예상됐고,
싸움을 알았을때나 지금이나
나의 지지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서.

카트가 넘어선 지점은
배신이 없어도 넘지 못하는 산의 높이와
배신을 해봤자 끊어질 수 없는 연대였다.
아쉬움이라면
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걸고' 싸우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 뿐인데.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그렇듯 노동에도 치별이 없었으면 한다.
수학여행비를 벌기 위해서든
병든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든
노동의 가격은 노동자가 아닌 노동을 기준으로 해야한다고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걸 싶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삶을 위해 생긴 일터들이
사람들 다스리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런데 거기에 더해 온갖 원가절감 방식을 사람이 사람에게 쓰고 있다.
부지영이 그 생각을 안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그 지점이 상업영화로 넘어서는 문턱이었겠지,

하지만 이야기의 강렬함을 넘어서는 인상깊은 장면들과 이야기의 흐름은
재미있었다.
몰래 카메라 같은 앵글로 시작하는 마트직원들의 모습,
힘이되어 줄 것 같았던 노조위원장의 인간적인 자폭,
그리고 엔딩.
강렬한 불만이라면
좀 ^&&%%&했던 음악...?

연대를 막는 것은 '특정화'과정이다.
나보다 못해보이는 형편에 대해 동정하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무식한 집행에 대해 의문을 품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열심으로 복종하는 사람의 노동과
필요한 만큼의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의 노동이
노동으로 연대할 수 있다.

감동의 염정아.
평범한 찬사는 그녀의
화장기 없어 표정이 드러났던 얼굴이었지만
회사의 알바 투입을 알리려 달리던 그녀는
정말 절박하고 서툴러 보였다.

'미스터 고'에서 같은 우정출연일 줄 알았던 김강우.
정말 못하는 게 없으시다^^
편파적으로 멋진 남자.

편의점에서 알바해본 적 있는데
그때의 시급은 기억나지 않지만
태영이가 백룸에서 라면쓰레기 버릴 때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보여주는 부지영의 선택. 
그 좁은 자리에서 편의점 안주와 안팔리는 술을 모아 회식하던 재미도 생각나지만....
 
별로 지킬 것 없이 살고 있지만
늘 뭔가를 지키기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신념,
특히 그것이 연대에 뿌리를 두었을 때는
더더욱 큰 존경심이 생긴다.
나는 늘 존경심을 가지고 지지하지만
이런 지지도 보탬이 되기는 하고 있을까요...?

스토너|존 윌리엄스|김승욱|RHK|2015

자식이라고는 윌리엄 밖에 없어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에서 식구들을 묶어주는 것은 힘겨운 농사일뿐이었다. 저녁이 되면 세 식구는 등유 램프 한 개로 불을 밝힌 작은 부엌에 앉아 노란색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대략 한 시간 동안 들리는 소리라고는 대개 등받이가 높고 딱딱한 의자에서 식구 중 누군가가 지친 듯 몸을 움직이는 소리, 낡은 집 어딘가에서 목재가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스토너는 자신이 무엇을 할 생각인지 아버지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중요한 목표라고 판단한 것이 옳다는 감정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듯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거듭된 주먹질을 받아들이는 돌덩이처럼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어머니는 그의 정면에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고, 주먹 쥔 손은 양뺨을 누르고 있었다. 스토너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마음 깊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라 어색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슬론이 전쟁 1년 만에 부쩍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 후반인 슬론은 실제 나이보다 열 살쯤 더 늙어 보였다. 멋대로 헝클어져 있던 강철색 곱슬머리가 이제는 하얗게 변해서 뼈만 남은 머리 위에 생기 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검은 눈도 습기의 막이 한 꺼풀 씌워진 것처럼 흐릿해졌다. 길고 주름진 얼굴은 예전에 얇은 가죽처럼 강인해 보였지만, 지금은 아주 오래돼서 바싹 말라버린 종이처럼 약해 보였다. 빈정거리는 말을 잘하는 단조로운 목소리에도 잔 떨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시는구나. 1년, 2년, 아니 10년 뒤라도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거구나. 때 이른 상실감이 몰려와서 그는 시선을 돌렸다.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스토너가 심호흡을 하자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쭉날쭉한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개 속에서 반짝였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힘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는 안개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 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연애를 했다.   

읽다가 와 닿은 묘사들을 옮겨 적었는데
스토너의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 첫번째를 빼면
모두 스토너의 결정적인 순간들이다.
첫 번째는 농업을 배우라고 들여보내 준 대학에서
문학으로 진로를 정한 뒤 부모에게 알리던 장면이고,
두 번째는 스토너에게 문학을 권하고 참전을 말리던 스승 아처 슬론,
마지막은 그의 마지막 사랑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시작.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문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때나,
이디스에 빠져 결혼했을 때나,
찰스 워커를 교육계에 들여놓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홀리스 로맥스와 맞설 때,
캐서린과 연애하고 헤어질 때,
스토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루어낸 사람인데
얼핏 많은 것을 인내하고 기다리며 살아온 인생 같아 보인다.

남다른 점이라면
어려움을 알고 자라면서도 화려한 성공을 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적 없는 것 뿐인데.
그의 주된 희생이 결혼생활과 육아였기에
아마도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사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덧 씌워져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스스로의 선택을
한 번도 꺾은 적이 없으며
진심 어린 눈물로 배웅할 스승이 있었고
그를 오해하지 않고 믿어주는 친구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마지막 순간 그를 그 자신으로 죽게해 준 그의 학문이 있었다.

알고 보면 빛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걸 어떻게든 드러나보이게 하는 대신
오히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의 존재감 없던 빈자리로 그의 소개를 시작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외로운 사나이'의 인생을
굉장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이지만 의미있는 것으로 그렸다.
사실 스토너는
대학 문턱을 밟은 몇 안되는 농부의 아들이었을 것이고
순수한 열정만으로 유복한 아내를 얻었으며
대공황기에도 안정적인 직업을 유지했고
행운 같은, 혹은 운명 같은
그 연애에 빠질 때도 실패하지 않았다.
로맥스와 같은 화려한 평판은 없었지만
평생 몸담은 일에서 보람을 찾으려 노력했고 만족한 적도 있었다.

문학이
통념에서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뒤로
보기와는 다른,
혹은 생각과 다른,
그래서 알고 보면 다른
이야기들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조금은 걸리적 거리는 감탄으로의 길.

뛰어난 재능의 홀리스 로맥스의 신체적 장애는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이긴 것 같았지만
자신과의 싸움은 진행 중이었고(아마도 끝나지 않았을 것 같다),
로맥스의 유사품(^^)이었던 찰스 워커가 등장하면서
로맥스는 심지어 객관을 잃은 패거리 후원자가 되어 스토너를 부당하게 압박한다.
편견과 다른 우열구도가 신선은 했지만
세상 편견에 맞서기도 바쁜 평범한 장애인들을 생각할 때
굳이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을 스토너의 압제자로 골라야 했을까...싶었다.
못돼먹은 권력보다 장애를 보는 나의 짧은 눈썰미의 한계도 인정한다 마는...
암튼 그랬다.
 
사랑에 빠진 스토너의 묘사에서부터 이미
장기간의 상담치료가 필요해보였던 이디스는
결혼생활 내내 스토너를 갈등하고 외롭게 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정신력 강화나 성장에 도움을 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드디어 연애를 하게 된 스토너를 응원하게 만드는데 소비된다.
이디스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전-혀 없다.

주로 참고 인내하는 인생이었던 것 같지만
결국 사랑했다던 딸도 연인도 손을 놓아버리고는
마침내 자신을 움켜쥐고 세상을 떠난 스토너의 삶.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이 자식 키우고
열심히 연애도 해야만
자기 자신으로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익숙한 결론은 아닐 것이고
그렇게 산 인생에 작가가 준 선물이라기에도 좀 뻔하고...
김두식이 황정은의 추천으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골랐는데
읽고 난 지금 김두식이 좋아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황정은은 왜?
'계속'했기 때문에...?
듣고 싶다.
중년남자버전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랄까.
미쿡독자들은 열광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인기는 또 왜?....
나처럼 낚인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ㅎ
그리고 2쇄인데 교정되지 않은 틀린 철자가 있었다.
장사가 급하게 잘됐나 보다.

PS. 궁금해서 읽어본 두 개의 스토너 독후감.
하나는 나의 심증을 굳혀 주었고
하나는 스토너의 '문학'이 내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고 알려준다.
황정은의 추천의 실마리가 보이는 대목인데,
정말 듣고 싶다...

표절

일단 신경숙의 표절은 최소한 복수의 전문가들과 본인도 '같다'는 것에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게 저렇게나 문단 통째로,
그러고도 저렇게 기억이 안날 수도 있다는 게 놀랍고,
기억에 없는 일은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할 수 없음을 경험으로 이해는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출판한 책에 일어난 일이라면
기억이 안난다는 자신만의 진실을 항변하기보다는
기억이 안나서 일어난 일이라는 용서를 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기억을 되살려보려 남몰래 제 머리를 쥐어뜯더라도.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번에 신경숙의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표절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의 소설들에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붙일 수가 있나요. 
그리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죽을 것 같아 끊을 수 없다는 그 글쓰기를 위해
살기 위해 당신의 서고를 뒤져 확인해가며
당신 것을 벼려내라고.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야 당신의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작가라는 이름을 갖는 이유는
창작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걸 더 멋지게 차려낼 줄 안다는 것과
남들 안하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건
엄연히 다른 직종인데
빌려 쓰고 돌려 쓰며 제이름표를 붙이는 건
최종결과물의 완성도만 중시하는
반문학적인 행동아닐까.
작가라면 매끈하고 훌륭한 작품의 다산보다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해
자신만은 포기하지 말고 믿어줘야하는 것 아닐까.
남들도 이 정도는 하니까,
뭐 그렇게 독창적인 것도 아닌데...라는 자기암시는
창작의 치명적인 병충해가 아닐까.

나는 신경숙의 팬이 아니라
그의 사과를 받을 처지도 아니고
예전에 읽은 몇 권 이후로
어떤 책이어도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많은 '세계적인 작가' 중 한 명일 뿐이라
별로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지는 않다.
신경숙을 키운 것은
신경숙 만도 아닌 게 분명하고
아무 근거 없는 나의 감으로
신경숙이 명성과 돈만을 위안삼는 사람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표절의혹에 대해
불분명한 기억력과
소설이란 제가 써도 온전히 제 것이 아니라는 정도밖에 말 못하는 지금의 신경숙은
이미 가면 안되는 길에 들어서 버린 것 같다.
이래서야 진정어린 사과를 해서 벗어나고 싶더라도
무엇을 사과해야할 지 모를 지경일 것이다.
이런 건 참 오랫동안 익숙해지도록 봤다.
부인하고 부정하며 
그걸 스스로도 믿어서야 살아남는 뻔뻔한 성공담들의 시대.
정신병자나 뼛속까지 사깃군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그렇게 우겨댈수는 없을 것이고
시작이 그랬더라도 거듭거듭 말하며 진짜로 믿게 되는 일이 왜 없을까.
부끄러워 하기 힘든 사회.
예민함과 조심스러움 때문에 특별하다는 저쪽 동네까지 
이렇게 아파진 건 기막힌 일이지만
신경숙이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하고 최악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도 
이상하다.
그냥 모두가 다쳐가는 중에 
오랜 병을 들킨 환자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했지만.

놀라운 감성을 강점으로 우뚝 선 신경숙은
독자들의 불신과 분노가 작가와 출판사룰 넘어 한국 문학으로까지 번지는데
아무런 감성적 동요도 안 일어나나부다.
당신의 감성은 GMO 같네요.

소수의견|2013



깜짝 놀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심초사가 들었든지
이렇게 짜임새 있게 다가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니.
법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이런 재판이 이렇게 진행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면
법을 쓰는 사람의 능력차와 철학차가 대단함을 느낀다.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영화보다 덜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에 대한 만족감.
약자의 배신과 책임도 봐주지 않는 꼼꼼한 물음표가 맘에 들었다.
군데군데 의미심장한 대사와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원칙이 예측불허라는 반전도.

가장 소름끼쳤던 건
용산재판을 담당했던 강수산나검사를 재현한듯한 국민참여재판의 검사.
배경이나 설정의 유사함은 모르겠고, 실제 인물보다 훨씬더 유능하게 그려졌지만  
목소리나 말투까지 그 재수없음은 100% 재현해낸 듯한 그 인물. 
두개의 문을 보며 고급자 수준의 쌍욕을 하게 되었던 대상.
호주 영사관으로 대접받으며 간 것까지 알았었는데
오랜만에 찾아보니 어느새 돌아와 부부장 검사에 이르고
이석기 내란 음모 재판까지 대업을 달성하셨다고 한다.
미래의 청문회에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이런 비범한 분들은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질 않는 나라이다 보니...
우울하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독재자의 딸인 것도 모자라
최초의 여성 공안검사의 탄생까지 경축드려야 하나...

마지막에 작전검사였던 홍재덕의 질문,
누구는 희생하고 누구는 봉사한다.
철거민 박재호는 희생을 했고
검사인 자신은 봉사를 했는데
변호사인 너는 무엇을 했냐고.
톨스토이 어르신의 정리를 빌어 조금은 정리를 할 수 있다.
국민이 희생한 것은 맞지만
너는 봉사가 아닌 폭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을 뿐이며
변호사는 미약하나마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던 거라고.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강한 암시와 주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게 외운들
행간에 논리를 세운들
궤변과 변명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밖에 없다.
국가에 의존하며 국가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힘으로
국가가 망가진다는 것도 변할 수 없는 속성일까.

세월호 이후엔 부쩍 하게 된 생각-
그래도 저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려 덤벼봤구나....
안아 보냈구나.....

배심원들까지도 내면연기를 하시던데
주인공 윤계상은 발동이 너무 늦게 걸려서
초반엔 생활대화를 보면서도 오글거리는 근래에 드문 경험을 했다.
이 영화에 대한 윤계상의 선택에는 박수를 보낼 수 있을 지 몰라도
연기에 대해서는 글쎄다.
사실 전체를 아우른 건 유해진이었는데
꽤 튈 것 같은데도 그렇지 않았다.
멋있었다.
오랜만의 김의성은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두툼한 주먹으로 기억될 것 같은 이경영의 존재감도 크다.
밤샘을 하거나 중환자실에 누워서도 마스카라를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여배우들과 달리
미모집착증이 별로 없어서 더 예쁜 김옥빈도 그럴듯했다.
이 처자 좀 맘에 든다.

크레딧에는 엥? 싶은 의외의 이름들이 좀 있다.
추노의 작가인 천성일이나 가을로의 감독 김대승 같은.
공들여 이렇게나 볼만하게 이 영화를 완성하고도
2년의 세월을 기다렸다니.
이제 보람 좀 있겠다.
참 잘했어요~

PS. 그런데 궁금하다. 
계약된 용역이라도 경찰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살인이 용역의 범죄라해도 국가의 책임 아닌가?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조윤정|달팽이|2008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슷한 명성이 이해가 안가도록 
바보 이반 같은 우화로만 기억되던 톨스토이였는데, 
문득 관심이 간 건 
권희철이 문학이야기에서 읽어준 '부활'과 권여선의 '봄밤'에 인용된 구절 때문이었다. 
획기적인 제목이 호기심을 끌었던 이 책.
다 읽고 난 지금은,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를 더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사상가 톨스토이는 대단하다. 
섣불리 '몽상' 혹은 '이상'이라고 외면하기에 그는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이 주된 내용은 
대한민국의 헌법도 따르고 있다는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온다-야 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임을 거듭 강조하며, 
사실은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을 지켜주기보다는 '삥을 뜯'으며 충성까지 받아 챙기는 국가에
주인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가를 얘기해주고 있다.

가장 인상깊었던 현대의 노예제도라는 글에서는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 중 하나
앙상한 다리로 땅위에 앉아있던 노인을 강 건너주려 무등을 태웠다가 
노인에게 억세게 목을 감겨 노인 입에만 닿는 과일나무로, 원하는 곳으로 끌려 다니는
불운의 여행자가 나오는데, 
톨스토이는 그 노인을 국가-정부로, 여행자를 국민이라고 설명한다.
톨스토이는 또, 독일 작가 에우겐 슈미트가 [무정부]라는 책(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음)에서
국민에게 어떤 종류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존재의 정당성을 찾는 정부가 
칼라브리아의 비적 같은 존재라고 썼다는 내용을 인용한다. 
칼라브리아의 비적은 안전하게 길을 건너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았다는데, 
부자를 약탈하고, 목숨 걸고 직접 일하며, 
비적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세금을 낸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비적이 
가난한 자들을 약탈하고, 위험부담 없이 속임수를 일삼으며, 
강제로 병사가 되기를 강요하고, 조직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특권을 주는 정부가 
더 유해하다고 톨스토이는 썼다. 
가장 악랄한 범죄자들의 살상의 합도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의 학살과 비교 불가능하다는 그의 설득에 솔깃해진다.
이렇게 비교하면 적극적으로 정부를 없애려는 아나키스트들은 
폭력을 써서 라기 보다는, 
인류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국가가 대체할 인력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한 그런 폭력은 실효성이 없으며, 
모든 폭력이 별로 믿음직한 수단이 아닌 데다가, 
이처럼 유해한 정부를 없애는 방법은 각자의 결기로 모든 정부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 
방법이 이 하나 뿐이므로 그것이 가능한 지를 따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불복종에 따르는 단점이 재판에 이은 최대한 사형의 형벌인데, 
복종의 나쁜점은 최악의 경우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고 스스로도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정리하며
어느 것이 더 피하고 싶은 일인 지를 묻는다.
 
권력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바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국가 권력기관의 폭력은 
서로에 대한 개인의 폭력보다 다소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것이 투쟁이 아니라 복종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 때문에 군대가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노예화되고 억압받는 국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없으면, 이웃국가에 의해 정복당할 것이다." 
이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논박할 필요조차 없다. 
이 주장 자체에 반론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얘기하는 대신, 
애국심에 물든 사람은 자신을 조국의 아들로, 정부의 노예로 여기고, 
이성과 양심에 어긋난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영구적인 혁명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도덕적인 혁명, "영혼"의 갱생이다. 

살인행위가 끔찍한 것은 그것이 잔인하거나 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비이성과 무분별함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버팀목은 
사소한 물질적 만족 때문에 자유와 명예를 파는 우리들의 이기심과 정신적 마비다. 

사회 구조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얻을 게 없다. 
그들에게 행위의 유일한 동기는 권력에 대한 사랑과 허영이다...
권력과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끊임없는 굴종과 아첨 때문에 삐뚤어진 성격이 되고 
악행을 되풀이하면서 자신들이 인류 번영의 공헌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처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물질적 이득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정치경제학이 다루는)이 유사 과학적 탐구에서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해 고려된 것은 
역사를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온 조건이 아니라 
어떤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조건, 즉 지극히 예외적인 경유로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영국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한 사회에 도둑과 강도가 나타나 노동자들한테 노동의 열매를 빼앗아간다면, 
이런 일은 경제법칙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이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경제 법칙은 과학이 지시하는 진화적 과정에 의해서만 천천히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의 인도에 따라 강도, 도둑, 장물애비는 도둑질이나 강도질로 얻은 물건으로 계속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세계의 사람들 대부분이 과거의 신학적 설명만큼이나 
이런 과학적 설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어떤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학자들, 
현명한 사람들이 기존하는 사물의 질서야말로 당연한 것임을 증명했으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질서 안에서 
어떤 변화의 노력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 사회의 선량한 사람들이 동물의 생활 조건은 그토록 신경쓰면서 
동료와 형제의 비참한 삶은 두 눈을 감고 
어떻게 그토록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날의 노예 주인에게 오물을 치우게 할 존이라는 노예가 없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수백 명의 존이 필요로 하는 5실링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노예주인은 수백 명의 존 가운데 누구든 한 명을 선택하여 
그에게 특별히 오물 속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는 은전을 베풀수 있는 것이다. 

커져버린 욕구와 충동에 사람들이 이끌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결국 그들은 자유를 팔아서라도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전에는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한다는 게 옳은 일인가?
어떤 사람이 자신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자신의 모든 노동 생산물을 주인에게 갖다바치는 게 옳은 일인가?
...어떤 땅이 그 땅을 경작하지도 않는 어떤 사람의 소유라고 할 때 
그 땅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무리 타락한 자라 할지라도 
부자나 정부 관리를 제외하면 
어떤 사람도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시골 사람들한테서 추수한 곡식이나 
아이들에게 줄 우유를 짜기 위해 기르는 암소, 
아니면 그가 만들어 사용하는 쟁기, 낫, 가래를 빼앗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정복자들과 정부의 차이는 
정복자들이 병사들과 함께 직접 주민들을 공격하고 반항할 경우 
몸소 고문과 살해위협을 실행에 옮기는 반면, 
정부는 반항에 직면할 경우...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폭력은 이전에는 정복자들의 용기와 잔인성, 기민함에 따른 개인적 행위였지만, 
이제 폭력은 기만 행위가 되었다. 

"자본은 소수의 손 안에 축적된다. 
이 과정은 자본이 한 사람에게 집중됨으로써 끝이 난다..."

권력을 무너뜨린 권력은 권력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이 이룬 것들이 참으로 인간의 안녕에 기여하는지 아닌지 알기 전에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조건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문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실수는 
수단에 불과한 문명을 목적이나 결과로 여기고 
문명이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명은 사회의 통치자가 좋은 사람일 경우에만 이로울 수 잇다. 
폭발성 가스는 암석을 날려버려 도로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폭탄으로 사용하면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가 된다....
우리의 구원은 
지금까지 우리가 따라온 길이나 우리가 공들여 이루어놓은 문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어왔으며 
우리가 지금 빠져나와야 할 늪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끌어모은 쓸모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내버릴 줄 알아야 
어떤 식으로든(네 발로라도) 토대가 굳은 제방 위로 기어오를 수 있을 것이다.

..국민 개병제야말로 전시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병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독일은 이런 계획을 고안한 최초의 국가다...

국민개병제국가에서 사람들은 희생하고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하지만, 
희생과 자유가 없는 삶이란 
이미 피하고 싶던 위험에 노출되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이 파격적인 언사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화물역의 짐꾼들 처럼 
그들도 생명의 이자가 아니라 원금을 빼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실정이다...
영국의 통계자료를 보면, 
상류층의 평균 수명은 55년이고, 
해로운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 계급의 평균수명은 29년이다. 

꽤 긴 내용의 우리 시대 노예제라는 글은 
37시간 일하며 하루에 1루블 이하를 벌면서 
교대근무는 생각도 못한 채 
짬짬히 쉴 공간이 비좁다는 것에 분노하는 철도화물노동자들과의 만남으로 시작했다.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믿으며 고향을 떠나고 농사를 떠난 사람들이 
노예보다 더한 생활을 견디고 있는 것은 
산업사회의 인간이 제도의 노예임과 동시에 욕망의 노예라는 점도 지나치지 않고 짚어준다.
생명의 원금을 빼쓰고 있다는 저 대목은 
권여선의 '봄밤'의 주인공 영경이 감탄한 인격에 대한 덧셈 뺄셈의 명확한 비유를 넘어서는, 
정말 읽는 순간 한 번에 와닿는 대단한 비유.
  
투표란 
자신이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제도일 뿐이고 
국가에 복종하는 사람은 
개인이 누리는 자유란 감옥에서 간수를 투표로 뽑는 정도의 자유일 뿐이라고 일갈하는 
톨스토이의 시대가 이미 100년도 더 전인데 
그의 주장 속에서 보는 세상은 지금으로 봐도 그대로 이해가 된다.
방법이 단 하나라 어려워도 그 뿐이라는 그의 해결책은 
여전히 멀고 실천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여러가지 고민 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 
돈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사람-무엇이 더 천박한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이 느끼는 보람을 
가치 있게 평가해줘야 하나?

폐해가 많은 애국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한국'이라는 이름을 '네덜란드'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게 과연 주입식 세뇌의 깊은 뿌리일 뿐인지, 
생존 본능인지 모르겠지만,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해치는 것에는 
계속 반대해보자고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