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시대통령은 이라크의 자유를 위해 전쟁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를 빼앗는 법을 만드는 거죠?
(아홉살 소년 알레얀드로)
-애국자법(테러대책법)의 통과에 대한 질문
국무차관 폴 월포비츠는 <베니티페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전쟁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국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행정적 판단이었다고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몸에 성조기를 휘감고 있는 미국인들을 보면 그 같은 엄청난 거짓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같은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소외감을 느꼈을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무의식적 죄책감'을 씻어주고 도덕적 자신감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젊은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해서는 배우지만 극소수의 부유층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그들 반대편에서는 생사의 경계까지 밀려나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또 학교에 보내기 위해 생활고와 싸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계급사회의 실상은 전혀 배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육체계가 안고 있는 커다란 결함입니다.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이민자들과 높은 세금 그리고 복지정책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빈약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원조를 받는 빈민층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하지만 경제적 불안감에 시달리는 대다수 중산층은 실직과 기업의 탐욕 사이의 연관성을 알아챌 능력(혹은 의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탐욕이 기업과 투자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아웃소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을 잉여인력으로 만들어 버리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중산층의 구성원들은 정부가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들에게 조세감면과 보조금지원을 통해 일자리 수출을 장려할 수록 그들의 삶은 더 비참해진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체제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만한 위치에 있는 교육자들마저도 계급 없는 사회라는 잘못된 개념을 계속해서 퍼뜨리는 거짓교육에 동참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노동자계급 출신 학생들의 학교 부적응을 학문적으로 조작하여 결함이론(deficit theory-학교생활실패의 원인을 개별 학습자의 정신이나 환경 때문으로 보는 이론)으로 정당화하고 그 같은 신화를 재생산하는 일이 노동자계급 학생들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데도 말입니다.
대학은 미국의 통제체제와 부합하도록 아주 잘 조율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쥔 자들이 대학은 민주적이라는 주장을 펼 만큼 반대의견을 허용하지만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반대의견은 금지하는 매우 섬세한 통제기구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특정한 관점에서 사실을 선별하며, 사실이 제시되는 순간 그것을 더는 순수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사실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직업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지적유희를 순ㄴ간 누리는 대신 졸업 후 학생들이 나라에서 허용한 제한된 다원주의(공화당원이 되어도 좋고 민주당원이 되어도 좋지만 제발, 그 외에는 곤란합니다)에 기꺼이 동참하고 순종하는 시민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조지오웰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도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
루터 스탠딩 베어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 “백인들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명의 다채로운 과일들은 비록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병과 죽음을 퍼뜨린다. 그리고 만약 손과 발을 잘라 불구로 만들고, 강탈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문명의 일부라면, 도대체 발전이란 무엇인가?...”
불복종운동의 핵심은 법이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법은 신이 제정한 것도 아니고, 어느 거룩한 기관에서 만든 것도 아니니까요.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여성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남성, 그것도 권력을 가진 남성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법을 민주주의 이념의 개관적인 표현으로서 집행하지 않고, 법을 통과시킨 자들의 이익을 따라 운영했지요...철도회사, 석유회사, 해운회사에 유리한 법들은 의회를 통과했지만 빈민과 도움의 손길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정된 법안을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법이 정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발상은 한 개인으로서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박탈하여, 자기들끼리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해온 소수의 법률제정자 집단한테 모든 권한을 이양하기 때문입니다.
...독단이 붕괴된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은 솟는다. 사람들은 자라난 환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린 사고를 가졌으며, 과거를 바탕으로 그들의 행동을 자신 있게 예단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태도에 영향 받기 쉬운 약점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약점이 바람직한 것과 또 그렇지 않은 온갖 가능성을 낳기도 하지만, 그러한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그 같은 약점은 어떤 인간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생각의 변화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뜻한다.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성조기로 자신을 감싸는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경력이 너무나도 빈약해서 그것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정복과 약탈을 위해 수행되어 왔다. 라인강을 따라 솟아있는 첨탑으로 무장한 성채에서 중세 봉건영주들은 주인으로 군림하며, 그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그들의 권력과 그들의 명성과 그들의 부를 확대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현대의 봉건영주들인 월스트리트의 귀족들이 전장으로 나가지 않은 것처럼, 정작 그들 자신은 전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늘날 자본주의자들의 선조인 중세봉건귀족들이 그 모든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 밑에 비참한 농ㄴ들이 그 전쟁을 모두 치러냈다. 가난하고 무지한 농노들은 그들의 영주를 숭배하도록, 그리고 영주들이 전쟁을 선포하면, 자신들을 우습게 여긴 영주 및 귀족들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서로 숨통을 끊다가 죽어가는 것을 애국하는 의무로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전쟁을 일으키고, 피지배계급은 늘 전장에서 피를 흘린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얻을 뿐 잃는 것이 없지만, 피지배계급은 늘 얻는 것도 없이-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잃기만 한다. 반전운동가 유진 뎁스
교사들은 2년 또는 4년마다 투표를 하는 것이 국민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는 생각은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됐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운동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사들은 셰이즈의 반란, 식민지시대의 반란, 노예제도 폐지운동, 민중운동, 노동운동의 정신을 이해해야 하며, 이러한 이야기가 대통령과 의회, 그리고 대법원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반인종주의 시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자기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인종주의의 최대피해자인 흑인들이 착취를 당한 사실뿐만 아니라 흑백이 힘을 합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회를 가로막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단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타인에게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껴서 평등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시각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판이 날카롭고 묵직할수록 긍정의 힘을 믿는 열정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아홉살 소년의 정직하고 화통한 질문이 가능한 것은
띨띨한 전쟁광의 말 조차도 열린 마음으로 듣고 진심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상대를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일텐데
아무나 깨우칠수는 없는 어려운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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