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한석규




한석규의 얼굴들 by 박상훈(조이뉴스24)

 
한석규를 처음 본 것은-나중에 알고보니-꽤 옛날이었다.
우리들의 천국 후반부에서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여배우와 CC로 출연했는데, 

지금 마흔으로 안보이는 저 얼굴이 그때는 20대로 보이지 않아서, 
장동건, 김찬우 등 당대의 꽃미남들을 스타덤에 올린 그 청춘드라마에서 
꽤나 겉돌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들과 딸'에서 문성근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비중이 커진 

후남이의 남편역으로, 엄마들이 탐내는 일등사윗감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초록물고기-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나리오만 보고도 최고의 시나리오라고 칭찬했는데, 

솔직히 나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한석규가 이제 상을 하나 받고 싶구나.

닥터봉과 은행나무침대가 성공을 거둔 뒤였던 그때 한석규는 이미 
'시나리오 읽는 배우'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닥터봉은 배우들이 잘하면 되겠다 싶어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석규는 그 영화로 상을 좀 받았다.

한석규는 자연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배우다.
일상적인 대사들도 그를 통하면 평범하지 않아진다.
주홍글씨 기사를 찾다가 남완석이라는 평론가의 얘기 중에 이런 걸 읽었다.
"한석규에 대한 내 느낌은 ‘선이 가늘다’는 건데, 

배우로서 한석규는 뭔가 동물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더라고".
그를 스타덤에 올린 것은 부드러운 남자였지만 

그가 스크린에서 펼친 연기들은 그 부드러운 이미지를 부숴버린 역할들이었다.
저 선이 가늘다는 말은 맘에 안드는 표현이지만-디테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 

동물적인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말은 와닿았다.
한석규는 매번 자신을 한계에 몰아넣고 그 경험을 즐기는 배우니까.
내가 본 지금까지의 어떤 역할보다도 배우 한석규를 확실히 보여준 것은 

주홍글씨의 기훈이었다. 
오만하고 거칠것 없는 남성다움이 물씬 풍기던 도입부에서 
짐승처럼 끌려나오던 엔딩까지의 과정은 그로 인하여 볼만했다(이은주도 한몫했지만).

나처럼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그의 연기는 매번 베스트 였다.
박신양처럼 화려하지 않고, 최민식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의 인물들이 정말 맘에 든다. 그가 반복해서 동물적인, 

때로는 악하기도 한 여러가지 인간의 본성들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의 그는 별로 한이 없는 모양인지 감정의 증폭이 좀 약해보였다.
초록물고기에서 다친 손가락을 쥐고 뒹굴 때 보다는 

철창에 부딪혀 뻗은 채로 웃는 넘버3나, 
무표정에 가까운 쉬리, 텔미썸딩, 아니면 접속의 엔딩이 더 꽉 찬 느낌을 준다.
주홍글씨의 엔딩에서 보여 준 그의 흐느낌도 잘 잡히지 않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엔딩 전, 피투성이로 강에 뛰어들던 그는 전하고 달라보였다.
한은 아니더라도 뭔가 던져내버리고 싶은 게 생긴 걸까.
언젠가 한 번은 볼 수 있을 것 같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진짜 짐승 같은 모습도.


내가 본 그의 출연작  

우리들의 천국(1991)
도서관에서 여자친구와 히히덕대던 모습이 조금 생각난다. 

한석규를 좋아하게 된 뒤에 그 역할이 한석규였단 것을 알았다. 
위에 쓴대로 적역은 아니었는데, 애정을 가지고 봤으면 좀 더 좋게 봤을지도^^   

아들과 딸(1992)
뼈대있는 법조집안의 아들. 

채시라의 유혹 따위는 차갑게 물리쳐 버리며 
김희애의 평생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해주는 제대로 만든 왕자. 

파일럿(1993)
최수종과 함께 공군사관학교에 다니는 친구역. 

나중에 사고때문에 제주도에서 교관으로 남는 역할이었는데, 
명랑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사진을 다시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서울의 달(1994)
처음에는 최민식하고 역할이 바뀐 줄 알았는데, 

첫 회를 보고나서는 두 남자를 그대로 보게 되었다. 
최민식과의 콤비도 일품이었지만 
최민식에게 목매는 시골처녀 김원희도 귀엽게 인상깊었던 드라마. 
김운경작가의 드라마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다.   

호텔(1995)
야심만만한 동생 이진우의 약혼녀인 이승연을 짝사랑하다가 사랑을 얻지만,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호텔 사장역할이었다. 
다 가진 것 같은 남자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남자. 
제대로 다 보지 못했는데도 인상깊게 남는 이상한 드라마다. 
제목도 잊어버린 주제가까지 기억난다. 
전에 케이블에서 다시해주는 걸 한편 봤는데 안재욱이 웨이터로, 
옛날 투투의 멤버였던 O혜영이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로 나왔다.  

닥터봉(1995)
공짜표가 생겨서 보러갔던 영화였는데 예상을 깨고 정말 재미있었다. 

나중에 TV에서 해줄 때 다시 봤는데 극장에서보다 훨씬 안 웃겨서 이상했었다. 
뻔뻔하고 능글맞은 바람둥이 치과의사 봉. 
김혜수와 치고받는 대사들도 재미있었고, 둘의 오바연기가 일품이었다. 
이때의 김혜수는 정말 싱그러웠는데.  

은행나무침대(1996)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고민을 했었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선전하는 영화들에 실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난 한국영화는 극장에서 안봐'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었다. 
그런 사람들의 우려를 말끔이 씻어준 영화,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1997)
내가 꼽는 초록물고기의 베스트 장면들은 불행하게도 모두 편집되었다. 

하나는 미애의 집에서 같이 있던 날, 
잠든 미애 몰래 수족관 앞에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인데, 
그때도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던 한석규는 
'미애씨, 사랑해요' 대사 한줄을 한참 연습하다가, 
정말 스물 몇살짜리가 되어서 수줍게 고백해 주었다, 보는 사람마저 설레게. 
이 장면은 심혜진의 노출수위 때문이었던가 암튼 연결문제로 편집되었다고 들었다.  
또 하나는 장애인인 큰 형과 단둘이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는 장면. 
편집된 이유는 모르겠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와 단둘이 걸어가는 골목씬 같은 느낌이었는데 
따뜻해 보이고 장면자체로도 예뻤다.
원래는 막동이의 형들이 배태곤의 나이트클럽으로 복수하러 가는 장면도 있었는데^^
여기서 정진영이라는 배우가 연출부이자 한석규의 세째형으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한석규의 친형이 둘째형으로 출연했고. 
홍보카피도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고 하나는 남는다.  

넘버3(1997)
송강호의 스타덤이 더 큰 화제였던 영화. 

이런 영화가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영화. 
독특한 대사들도 많았고 좋은 배우들의 영화였다. 
이미연의 성공적인 재기작이기도 했고.
제일 인상깊은 대사는 건달과 불한당. 그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그러고보니 배운 것도 많은 영화였네.

접속(1997)
야근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가까운 극장으로 보러갔었다. 

아주 잘 짜여진 독특한 로맨스. 
인상깊은 음악들. 
영화가 끝나고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오면서 
시나리오 쓴 사람을 궁금해하고 부러워하고 그랬었다. 
추상미도 참 매력적이었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아직도 일하고 있던 선배의 한마디-"'접선' 재미있었냐".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제일 많이 본 한석규의 영화다. 

한석규와 심은하 두사람의 매력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조금 남아있던 어색함이 완전히 떨쳐진 심은하의 베스트.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정원과 
볼수록 사랑스러운 다림 때문에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볼 영화.

쉬리(1999)
은행나무 침대의 업그레이드. 재미있는 영화의 힘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폭격을 맞은 불행한 남자역할. 아주 담백했지.
김윤진이 죽는 장면에서 놀라운 표정을 보여주었다.  

텔미썸딩(1999)
심은하와의 재회. 매달린 아이의 손을 쳐내던 심은하가 섬뜩하게 기억 남는 영화.

뒤늦게 깨달은 진실로 낭패를 보는 형사역할. 
한석규는 처음부터 별로 의욕적인 형사로 보이진 않았는데, 
서서히 사건에 몰입해가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건지 알고 모르고에 대한 논쟁이 
좀 시끄러웠던 영화로 기억한다.

이중간첩(2003)
처음 사열장면의 그 표정이 기억난다. 

내용도 나쁘지 않은 영화였는데. 이 영화부터 한석규의 '적'들이 설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 역시 한석규가 1년에 한 편 정도는 영화를 했으면 좋겠는 사람이지만 
이중간첩에 쏟아진 혹평이이야 말로 정말 과했다.
얼마전 연예프로그램에서 강제규감독이 한석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전체를 보면서 연기하는 배우이고 또 상대 배우를 돋보이게 만들 줄 아는 배우라고. 
내가 본 영화들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
그러니 고소영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 한석규하고도 이렇게 영화를 찍다니.

주홍글씨(2005)
연기로는 그의 베스트. 한석규의 기훈은 지금 잘 나가는 한국남자배우 누구도 

대신 연기할 수 없는 연기다.
지금까지는 그의 얼굴에만 집중했었다면 주홍글씨는 그의 몸까지 보게 만든 영화였다.
몸보다는 움직임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화면을 더 채워주는 연기를 본 것 같아서 
다음 영화가 빨리 보고 싶다.

한석규의 팬페이지 www.hansukkyu.org

한석규의 공식홈    www.hansukgy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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