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과 6펜스|서머싯 모옴


나로 말하면 지금까지 젊은 세대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어왔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마도 키츠보다 열렬하고, 셸리보다 천상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이 있어 벌써 세인이 기억하고 싶어할 만한 시들을 발표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알수 없다. 나는 그들의 세련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거니와-젊은 나이에 너무 완숙하여 전도유망하다는 말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그들이 보여주는 문체의 절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말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하여도(그들의 어휘를 보면 그들이 로제의 <유의어사전>을 요람에서부터 가지고 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들이 내게 해주는 말은 하나도 없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느끼는 것도 너무 분명하다. 나는 그들이 허물없이 내 등을 두들기는 태도나 내 가슴을 향해 격정적으로 뛰어드는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다. 내게는 그들의 열정이 어딘지 빈혈증세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꿈도 약간 따분하다. 하기야 나도 이제 한물 간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2행압운의 교훈시를 쓰겠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그 제안을 거절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진심으로 느꼈던 분노를 제대로 표현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맥앤드루 대령에게도 내가 그 따위 인격을 가진 사람과 식사를 같이할 수 없어 그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적어도 나를 좋게 생각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리라는 걱정 때문에 지금까지 늘 자신감을 잃고 도덕적 태도를 취하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내 감정이 스트릭랜드에게는 통하지 않을 게 뻔해서 말로 표현하기가 더욱 거북했다.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 뿐이 아닐까.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주워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속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언젠가는 그 사람 그림 몇 장 값이 이 가게에 있는 그림 값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나갈 겁니다. 모네를 봐요. 누가 백프랑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 그림 값이 어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모네만한 재능을 가졌으면서 그림을 팔지 못한 화가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지금도 값이 나가지 않는단 말이에요. 누가 알겠습니까? 재능만 가지고 성공을 합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 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 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 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 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 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세익스피어도 이아고를 고안해 냈을 때, 달빛과 상상의 실을 엮어 짜 데스데모나를 상상해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 내면서 자기 안에 뿌리박고 있는 본능-문명 세계의 법도와 관습이 잠재의식이라는 저 신비로운 구석으로 몰아넣은-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이래서 소설은 비현실적이 된다. 남자에게 사랑이란 일상적인 여러 일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데도 소설에서 그것을 강조하다보니 실제와는 다른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남자란 없다. 있다해도 그런 남자들은 별 재미가 없다. 사랑을 지상의 관심사로 삼는 여자들도 그런 남자를 경멸한다. 하기야 그런 남자들 덕분에 여자들은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좀 덜 떨어진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이다....남자들은 대체로 여러 방면의 활동을 하며, 한 가지 활동을 할 때는 다른 일들은 일시적으로 미루어둔다. 그때 그때 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있어, 한가지 일이 다른 일을 침범하면 못마땅해 한다. 남녀가 똑같이 사랑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다른 점은, 여자가 하루 온종일 사랑할 수 있는 데 비해서 남자는 이따금씩밖에 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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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을 모델로 했다는 스트릭랜드라는 화가의 삶을 엿보게 된 어느 소설가의 기록.
놓을 수가 없어서 단숨에 읽었다.
책을 단숨에 읽어버리면 느낌이 더 많이 남는다.
예술가의 생애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일 때가 많지만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적당히 섞여갈만큼 무디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혼자서 인생을 완성해간다는 것은 무거운 만큼 매력적인 일이지만 스스로 깨우칠만큼 맑지 못하면 엄두내기 어려운 일이다.
읽으면서 밑줄 쫙-이 시원하게 그어졌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공감과 위로였다면 달과 6펜스는 깔끔한 정리라고나 할까.  
 
PS. 책보다가 작품해설이 이렇게 맘에 드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혹시 읽을 사람에게는 민음사판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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