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가르시아 마르케스


여비서들은 입술 모양이 찍힌 팬티 석 장을 선물하면서, 생일 카드에다 자신들이 자진해서 내 팬티를 벗겨주겠다고 써놓았다. 그러자, 늙는다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를 용도폐기된 존재로 여기는 젊은 여자 친구들이 도발적인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 덕택에 나는 구십 평생 처음으로 나의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 각각의 물건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며, 각각의 일은 일의 성격에 맞는 시간에 처리해야 하고, 각각의 단어는 그 나름의 적절한 문체가 있다는 나의 강박관념은 질서정연한 정신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내가 근본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위장술이었던 것이다. 또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미덕이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야박한 심성을 숨기기 위해 인자한 척 하고, 그릇된 판단을 숨기기 위해 신중한 척 하고, 쌓인 분노가 폭발할까 봐 화해를 청하며, 타인의 시간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시간을 엄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 생애를 일 년이 아니라 십 년 단위로 재기 시작했다. 오십 대의 삶이 결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십 대는 이제 더 이상 실수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열심히 산 시기였다. 칠십 대는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끔찍했다. 그러나 아흔 번째 생일에 델가디나의 행복한 침대 속에서 살아 있는 몸으로 눈을 뜨자,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금이 재미있건 말건 오래사는 건 참 매력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오래전 일이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느 장수할머니-100살도 훨씬 넘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리포터의 질문은 기억이 안나는데 아무튼 그 할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이 나이까지 사는 게 예술이지요."  
와, 정말 저런 대답이 저렇게 나오는 사람이라면 200살을 넘게 살아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겠다 싶었다. 나야 그럴 자신이 없으니까 여전히 장수를 꿈꾸지 않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생이다. 80대에 대한 언급을 슬쩍 피한 건 나름대로의 프라이버시 보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르시아 마르케스 라는 노인의 발랄함을 염두에 두더라도 먼저 가 본 경험자의 충고인 것 같아 아직 공감이 안되는 얘기들에도 솔깃하게 되었다. 90살-대단한 주인공의 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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