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레이디 맥베스|Lady Macbeth|2013


변형된 고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태숙 연출가의 첫 작품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첫 공연이 벌써 15년 전이라고 하고,
이번 공연은 그때보다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다지만,
내게 레이디 맥베스는 잘 자란 아이의 유년시절을 보며
지금 성장한 재능이 그 시절엔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연극이었다.

원작의 맥베스는 예언에 기대 탐욕이 깨어나고
그 욕망을 실현하는 두 개의 자아가 일으키는 갈등의 드라마라는데,
레이디 맥베스는 그 시작고리가 분명치 않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말 것을 알면서
굳이 희망이라 부추겨 기회를 잡으려는 욕심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왕을 죽인 것은 맥베스 부인.
그러니 이 극은 멕베스 부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맥베스의 여자 버전으로 봐도 될 것 같다.
남자는 성공과정을 즐기지만
여자는 남자가 이룬 성공 자체를 즐긴다면서
결국 그녀는 그렇게 편승해가지 못하고 자기 손에 피를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 늙은 왕의 몸속에 그렇게 많은 피가 있을 줄이야...
물 한 컵이면 씻어질 줄 알았던 피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그녀는
손목을 자르겠다고도 절규한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었을 그 저주같은 예언은
네 사람의 강렬한 몸짓과 주술같은 반복으로
극이 끝난 지금까지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끈 떼어버릴 수 없었던 유혹의 제 몫을 다했다.

연회장면의 음악도 멋있었는데
두 개의 활로 빠른 템포를 연주하던 그 소리는
클럽에서 틀어도 몸이 움직이겠다 싶게 꽤 격렬했다.

진흙 덩어리, 밀가루 덩어리들로 잔혹함을 묘사해내는 이런 연출을 보면
직접적인 묘사에 천착하는 김기덕의 정신세계의 황폐함이 좀 딱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홀린듯 끌려다니다가, 뜨거운 피로 유혹하기도 하고, 떨칠 수 없는 것을 떨치려 몸무림치던
서주희의 맥베스 부인은 강렬했다.
꿈속에서는 조종당하는 경박한 맥베스로, 맥베스 부인의 현실에서는 충직한 의사로,
내내 무대위에서 극의 안팎을 잘 이끌어 가던 정동환에게도 박수.

하지만 한태숙의 극은 배우들 뿐 아니라
무대의 바닥에 까지도 박수를 보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대의 어떤 물건 하나도 제 몫을 하고
다음엔 어딘가 쑥쑥 자라나 자란 만큼의 재주를 선보일 것만 같은.

다만,
탐욕과 유혹의 정서로 보자면 맥베스를 뛰어 넘지 못한 이 이야기,
그렇다고 여자의 이야기가 들어있지도 않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애초에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뭘까...는 의문이 남았다.
레이디 맥베스는 극 자체의 힘과는 상관없이
그저 재능있는 배우들과 음악가, 안무가, 연출자의
한바탕 장기자랑 무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야심 넘치는 실험정신의 테두리속에서 그려진 것 같다는 생각.

하지만, 뭐 어때.
노력하는 재능은 즐거운 자극이 되어주는 걸...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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