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헝가리 사람들과 영국사람들이 국적을 내세우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특히 인생의 가혹한 순간에 적어도 어떤 특별한 것의 일부라는 감정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런던에서 한동안 같은 집에 살았던 친구, 케빈이 어느 날 밤 삶에 지쳐서 배터시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만류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케빈이 뛰어내리지 말라고 그 남자를 설득한 논거는 <당신은 영국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독일인에게 <당신은 독일사람이라는 것을...>이라고 말하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뛰어 내릴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특별한 것의 일부라는 느낌과 교만이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사람이 안 뛰어 내린 이유나 독일 사람이 뛰어내린 이유는 똑같은 소속감 같으니까!)
웬지 웃겼다.  

크게 부유해질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번째 가능성은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소원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악착같이 일을 하며 누리고 싶은 일들을 꿈꾼다. 그러다 마침내 실제로 소원을 이루게 되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확정짓는다. 두번째 가능성은 소원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 첫번째 가능성이란...! 개콘 쇠고기 영감님의 놀라운 철학이 그대로 담겨있는 한 말씀이 아니신가!
원래 욕망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끓고 있는 에너지라서 
미래의 과실이 아무리 탐스러운들
현재의 끓는 점을 놓치고 나면 김빠지듯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그런 아이들(원하는 것을 뭐든 사주는 부모의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옆 사람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갖고 싶어하는 마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스스로를 전혀 억제할 줄 모른다. 

꼭 그렇게 자라지 않은, 말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통과했다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장년층을 보자면
욕망의 제어가 꼭 그런 부모 탓만은 아닌 것도 같지만,
욕망을 억제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행복의 조건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손쉽게 행복해지라고 
계속 얘기하는 중이기도 하니까.

미국의 소비반대주의자들은 <하루라도 물건을 사지 말자>라는 운동을 생각해냈다. 그러면 겸사겸사 운동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천재적인 발상이다. 일주일에 하루, 예를 들어 금요일을 선택하여 현금이든 카드든 절대로 1센트도 지출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신용카드콘돔>을 대중화시키려는 운동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요지는 <너는 정말로 이것이 필요한가?>, 아니면, <너는 내면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이것을 사는 게 아닌가?>라는 물음이 쓰인 작은 봉투안에 신용카드를 넣어두자는 것이다. 그러면 물건을 살 때마다 신용카드콘돔에서 신용카드를 꺼내야 한다.  

소비자가 아니면 대접받지 못하는 자본주의시대에 공허함을 위로하려는 소비가 필수적인 소비보다 많을테니 실패는 당연하다. 공허함은 위로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대대적인 운동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런 브레이크 덕분에, 공허함에 지지 않을 '나'를 단련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크 리치는 (탈세, 사기, 불법거래 혐의 FBI수배자)추크나 몬테카를로, 버뮤다 같은 장소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인간유형, 호화스러운 감옥수감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탈세범들,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디서나 살 수 있는데도, 그 엄청나게 많은 돈 중에서 조금 세무서에 떼주길 꺼리는 까닭에 굳이 추크 같은 시골 구석이나 섬을 선택하는 인간들, 아주 가련한 종자들이다.

무릎을 칠만한 탁월한 관점이었지만...폰 백작님은 한국을 잘 모르시니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조건 깔보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어디에서도 독재자, 탈세범들이 망명하지 않고 제 집에서 다리 뻗고 사는 경우가 없건만, 한국에서는 아무 지장없이 잘 살 수 있다...!

나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만이 아니라, 최하층을 포함하여 모든 점잖은 사람들에게서 국가의 관습으로 보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들도 삶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여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생계보조의 임무는, 보조를 받는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에 어울리는 사람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독일 연방 생계 보조법 제1항>

사치는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고 가져야 하는 모든 것은 포기하는 것<카를 라슬로, 사치를 위한 호소> 

사치라는 말은 무절제, 과함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이런 정의들을 좀 어거지스럽게 들리기도 하지만, 가난해지는 입장에서 부자에 꿀리지 않는 부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실용적으로 수정된 정의라 치자.  

도덕률의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지 마라>는 명령이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을 단념하고 저것을 회피함으로써 그 명령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미덕은 무한하다는 불굴의 장점을 가진다. 사랑하거나 신뢰하거나 희망하는데는 원래 한이 없는 법이다. 또한 누군가가 도를 넘어서 현명하거나 용감하거나 정의롭다는 말은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결핍의 시대에 우리는 미덕만큼은 자책하지 않고 마음껏 활용해야할 것이다. 

가난에 이어지는 훈훈한 마무리. 하지만 미덕이란 또 무엇인가요.
거기에는 불쌍한 부자들을 향한 연민도 포함되는 것인가요....



책 머리에서 이미 이 책이 별로 실용적인 기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는 하지만, 솔직히 꽤 재미있게 들리는 제목 속에 엮은 부분부분 허술한 인문서 같은 느낌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약간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가진 독일 사람에 의해 번외편으로 다시나타난 것 같은.
좀 맘에 안들었던 건 사소한 가지들까지는 크게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토크빌을 자기 맘대로 보수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라고 결정해버리고, 
사치를 저렇게 정의하면서 구멍난 셔츠를 즐겼다는 체 게바라가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는 게 대단한 삶의 모순인 것 처럼 슬쩍 흘리는 건 또 뭐고......
좀 오락가락 하신다. 

좀 신선했던 점이라면 
한국에서 예전에 배우던 편협한 독일인의 이미지는 
절약이 몸에 배어 허례허식따위는 없다-였는데,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는 있어도 독일 얘기가 많이 나오긴 하니까)
독일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구나-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독일인의 시각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쉬운 건 필자의 말투 자체가 코드가 맞으면 참 재미있기도 할 것 같은데
내게는 그 재미가 많이 전해지지 않았던 점이다.
그래도 이런 제목 아래 씌어진 책을 읽으며
각자가 자기만의 가난을 정의하면서
반대로 자기만의 풍요를 즐기게 되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가난은
꼭 하고 싶은 것을 순전히 돈 때문에 못하게 되는 것.
잘 생각해 보면 돈이 제약이 되는 경우야 많긴 하지만
내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을 너무너무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거나
다른 상황은 다 괜찮은데 딱 그 일을 할 돈이 모자라서 못하는 경우 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걸 하고 나면 나중엔 어쩌나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큰 경우가 많으니까.

전엔 같은 책을 완전 다르게 읽은 사람을 보고 신기했는데
이번에는 정 반대였다.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은 내가 접고 싶은 부분마다 다 접은 자국이 나 있었으니까.
한편으론 그만큼 천편일률적으로 읽게 되는 심심한 책이라는 뜻도 되겠다. 
제목은 다시 봐도 손이 가는 제목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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