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Way Back Home|2021

 



사이좋은 신혼부부
편 들어주는 이모와 이모부가 가까이 있고
내켜 찾아가지는 않지만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고
잘하는 일이 있고,

범인이 체포된다는 건
드디어 심판의 시간이 왔다는 것이고  
모든 피해자들의 한이 풀릴 계기겠지만
정원에게는 일상의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정원의 엄마가 괜찮지 않음을 짐작하며 기다려주었던 건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보다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였을텐데
그보다는 더 가까웠던 친구 같은 남편은 
자신도 상처받으면서 가까이 들어온다.
정원이 화도 내보고 변명-아마도 지나간 비난 앞에서 하지 못했던-도 해볼 수 있었기에
과거의 상처에 새 상처가 더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거의 상처를 덮는 것도 치료하는 것도 아닌
받아들이는 것의 시작.

비밀이 없어진 정원의 시작을 응원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La vie d'Adel|2013

계속 본론을 벗어날까? 아마 그러리라. 안 그럴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난 여자고 이건 내 이야기다. 그 말을 새겼다면 내가 지금 그 특권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리라. 

내게 관심을 보인 남자애들 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저절로 눈이 그에게로 끌렸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행복인 줄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애들하곤 놀았어도 그 애하곤 못 그랬다. 그저 쳐다보는 데 빠져서 마음에 들 생각도 안했다. 
첫사랑은 이처럼 순진하게 시작되나 보다. 너무 달콤하기에 잘 보일 욕망마저 잊는다. 그 애도 남다른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수줍고 사려깊은 눈길이었다. 우리 사이엔 뭔가 더 엄숙한 게 있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대놓고 내 매력을 예찬했고 그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엔,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자신에 대해선 또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성당을 떠나면서 나는 천천히 나왔고 걸음을 늦췄던 것 같다. 떠나는 게 아쉬웠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몰랐다고 했지만, 알았는지도 모른다. 떠나면서 그를 보느라 뒤돌아 봤으니까. 그래서 뒤돌아보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
마리안의 일생>

왠지 모르게 아델을 끌리게 만들었던 책 '마리안의 일생' 속 강렬한 매혹 또는 사로잡힘이 
아델을 찾아온다.
아무에게나 이런 매혹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매혹이 강렬하다고 해서 아무들의 사랑보다 오래, 영원히 살아남지는 못했다. 

신비로움에 싸인 매력넘치고 아름다운 아델은
엠마의 비슷한 신비로움에 끌렸고 찾아 헤매다 만났고 빠졌고
신비의 층위가 벗겨진 생활 속에서 다름을 부딪히며 방황하다 거친 비난 속에 이별당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어도 식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아델은 엠마를 다시 얻을 수는 없었다. 
다시 찾아가 자신을 방황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한 모습을 다시 발견하고 나서야 
아델은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하듯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간다. 
걸음을 늦추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지금의 모자람을 과거로 돌아가 채우고 싶어질 때 
'가봤자 별 거 없다'고 소신있게 얘기해 주는 아델의 인생.
근데, '아델의 인생'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된 건 무슨 뜻일까?

이 강렬한 연애이야기는 의외로 독서를 부르는데
잘 보이는 것도 잊을만큼 빠졌다는 '마리안의 일생'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르트르의 책도 끌린다. 
'얼굴의 신비한 약점'이라거나 
존재가 본질을 앞서니 그 본질을 행동으로 채워야 해서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도.
게다가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과 한 눈에 빠지는 것, 그 운명적 인연을 짚어주며
그 감정이 더해지는 것인지 빠지는 것인지를 질문해주는 고등학교 문학수업이라니.
열심히 들어보고 싶은 수업이다.

받아적다 보니 더 읽고 싶어지는 마리안의 일생-하지만 번역본이 없다.
아델은 '정의'를 뜻한다고 한다. 

브러쉬업라이프|Rebooting|2023



다시 태어나면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앙케이트 질문을 흔하게 주고 받던 시절이 있다.
그때마다 없다고 했던 건 
어차피 이 기억이 다 사라질 것이고 
기억이 없다면 나의 선택은 똑같을 거라서 
돌아갈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는데 
그 기억을 다 가지고 다시 돌아가는 상황이라니.
인생 몇 회차를 진짜 소재로 삼았고
덕을 쌓기 위해 진짜 열심히 사는 아사미의 마지막이 
꿈꾸던 모습 그대로여서 좋았다. 
되게 무신경한 사후세계 접수원도 좀 웃겼고,
친구들끼리 모여 얘기할 때나
직장 동료들이나 가족과 있을 때도
어떻게 저렇게 아기자기한 대화들로 
열 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지. 
보통 스릴러나 범죄물 단골인 환생인데 
이 아기자기함이 오히려 대범한 기획.

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

첫번째 돼지는 손쉬운 선택을 했고
두번째 돼지는 실패에서 배우지 못했고 
세번째 돼지는 잘배우고 위기에 잘 대처하며 뭐 암튼 성공하는 유형.
이런 기발한 관점의 이야기들에 내가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는
과정과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결과론적 입장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세마리 돼지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해도
그들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마지막, 
막내 돼지의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붉은 낙엽|달오름극장

 


원작에도 관심이 생기는 불완전한 믿음의 소용돌이
인물들을 따라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도 이해되기 때문에 
에릭이 딱히 의심이 많은 사람인 것도 아니고 
지미가 딱히 의심스러운 아이도 아니며
카렌이 원래 미친 사람도 아닌데 
그들이 휘말린 파국을 보고 있자니 
대체 다른 가족들이 이런 불행을 피해 잘 살고 있는 행운이 
오히려 신기해진다. 
작은 균열 하나가 이렇게나 많은 인생을 산산조각 내는 이야기라니
작가의 재능은 빛나고
그 재능이 만든 이야기는 그럴싸해서 더 좀 무섭다. 
 
김강우 보러 가서 김강우 실컷 보고 왔다^^





일당백집사|2021

 

일본드라마 같은 소재와 전개 같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한드의 힘-막판 스릴러. 
잔잔하게 끝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정말 동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느닷없이-죽는 사람 입장에서-죽는 마당에 
좀 진정이 되겠다.
여러 망자들의 단편 모음인데도
다음이 궁금해졌고 계속 이어서 봤었다.  

동주 친구 중 한 명이 선재업고 튀어의 현주였던 건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른 한 명은 협상의 기술의 곽민정 대리였네.

사랑과 우연의 장난|마리보

귀족 오르공의 딸 실비아는 결혼상대자인 도랑트를 믿을 수 없어 하녀인 리제트와 역할을 바꿔 어떤 사람인 지 알아본 후 결혼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결혼상대자인 도랑트 역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인인 아를르캥과 차림새를 바꾼 채 실비아를 찾아온다. 

도랑트의 아버지가 이미 오르공에게 아들의 계획을 귀띔해주었지만 오르공은 실비아의 오빠이자 아들인 마리오에게만 일러줄 뿐, 실비아의 선택을 기다려준다. 

바뀐 역할에도 불구하고 실비아와 도랑트, 리제트와 아를르캥은 제 짝을 찾아 사랑에 빠진다는 이 코미디는 기시감이 가득한데 1730년에 씌어졌다니 모든 '남의 역할 해주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의 조상인듯 하다. 

귀족 행세를 하며 귀족인 줄 알았던 리제트와의 사랑에 신분상승의 야심을 슬쩍 비치던 아를르 캥이나, 하인 행색의 도랑트가 약혼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오빠까지 동원해 끝까지 도랑트의 사랑을 시험해보는 꼼꼼한 실비아-마리보의 장기라는 섬세함까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300년 전 연애극의 짜임새 구경.

읽고 싶었던 마리안의 일생은 구할수도 없는 모양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