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탐독|정성일

무려 540쪽에 꼭 크지만은 않은 글씨들이 꽉차 있는 바람에
진도가 참 더디게 나갔다.
내가 안 본 영화들이나 보기 어려운 영화들의 평을 보는 건 쓸모없는 일 같아서 건너뛰려고 했지만
영화평은 영화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하는 정성일이
굳이 주석을 남겨두고 싶었던 영화들을 구경하자는 생각으로 마저 읽었다.
주석을 남기는 것은 창작이라기 보다는 안내다. 이미 만들어진 것에 덧붙여지는 것.
하지만 만만치 않은 밀도의 정성일판 주석이
감독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확신에 찬 지적을 하면 궁금했다.
감독 생각도 정말 그런 지, 정성일의 오바인 건지.
그래서 예전엔 정성일과 그 영화의 감독을 대질심문 시켜보고 싶었다.
모든 감독들은 오해받지 않을 자유가 있고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는 해석은 다 오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성일은 영화속에서 카메라의 존재와 쇼트, 쇼트의 연결을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분해하고 그 결합방식을 관찰하는 과학자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정성일 이후로 정성일 같은 평론가들이 없는 것은
아무도 이렇게 지독하게 덤벼들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정성일의 관점이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예 감히 도전하려고도 안하는 것 같다.
창작물은 논박을 벌이는 것 보다는 그냥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맞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다.
그 첨예한 이론의 장에서야 말로
다른 관점들이 더 치열하게 부딪혀야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다들 아닌 척 피하거나 돌아가면서 그냥 밥그릇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론가라면 한 영화에 대해서 별 다섯개 한도 내에서 색칠공부를 하는 특권에 상응하는
소양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성일은 그 소양쌓기에 무척 치열한 사람이다.
굉장히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주석이 짜증이 나다가도
든든한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읽는데 시간은 정말 많이 걸렸다--;;
그리고 가끔 비문이 있다.
"이를테면 소 선생이 파티에서 한쪽 다리를 저는 한국인 남자가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비틀거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격렬한 춤을 출 때 그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충격을 안겨준다."
춤추는 사람은 누규?
몇 개 더 있었지만 표시를 안해놔서 찾을 수 있는 건 이것 뿐.

책머리에
프롤로그 : 동사動詞, 영화를 본다는 것과 쓴다는 것

정은임 애도哀悼,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얘기하기 좋은 벗으로 꼽히는 정은임. 팬은 아니었지만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이름...

홍상수 〈생활의 발견〉 순열順列, 기억을 둘러싼 내기
정성일이 아주 신나서 쇼트 연결을 읊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 특이했다. 

김기덕〈해안선〉 유령幽靈, 영겁회귀의 술래잡기 
볼 일이 없는 영화지만 정성일은 김기덕 전문가(^^)니까 그냥 읽어봤다. 어딘가 안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왠지는 나도 모름. 

이창동〈오아시스〉 판타지幻想, 기만적인 환영술 
나는 오아시스와 밀양의 이창동을 너무 너무 싫어하다가 시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는데, 오아시스에 대한 정성일의 주석이 정말 반가웠다. 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 영화를 싫어했던 이유를 대신 설명해 주는 느낌-속이 시원했다. 

임권택〈취화선〉 배움求學, '영화'라는 '현장' 
싫은 영화 까대기와 좋은 영화 찬양은 개나 소나 다할 수 있는 거지만, 정성일의 임권택 찬양은, 이런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이런 존재가 될 수 있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물론 정성일은 조목조목 다 이유를 들어 찬양의 근거를 검증하고 있다. 배우들의 인터뷰도 있는데 정성일이 옮겨 적은 그 인터뷰는 외국잡지의 번역인터뷰 같은 느낌이다. 다들 있어보이게 말한 것으로 적혀 있다^^ 
꽤 긴 이 취화선 촬영일기를 읽고 나서 취화선이 보고 싶다,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의 영화는 태백산맥이 마지막인데 정성일의 감동의 몇 %나 받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윤종찬〈소름〉 구멍陷穽, 죄의식의 테크닉 
무서운 영화는 정말 못보는데 무리하고 봤던 영화 소름. 굉장한 영화였다. 어렴풋이 느꼈던 굉장한 윤종찬을 차분히 설명해 준다. 다시 보고 싶지만, 그때 후유증을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

홍상수〈극장전〉 구조構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봤고, 읽었고, 큰 감흥은 없다...

박찬욱〈친절한 금자씨〉 구원救援, 천사가 지나갈 때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대질심문^^ 박찬욱은 쇼트의 연결이 영화라고 믿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도 실한 대답을 해주어서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영화가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인터뷰 끝에 박찬욱이 꼼꼼하게 봐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후진 감독들은 꼼꼼하게 볼까봐 무서운 사람들이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준호〈괴물〉 괴물적인 것怪物的, 삑사리의 정치학
개봉했을 때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감상을 올렸고 그걸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 사람이 하나씩 뽑아내 주는 얘기들이 꽤 다양했다. 보고 나면 뭔가 얘기를 나누고 싶어지고 그렇게 에너지를 쏟는 게 아깝지 않을 만큼 품질기준에 맞는다는 것이 봉준호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곽경택〈태풍〉│윤종찬〈청연〉 악순환惡循環, 자살의 제스처
태풍 안 봤고, 안 보고 싶고, 청연은 잘 봤고, 잘 읽었음.

김기덕의 존재론 희생양犧牲羊, 억압의 메커니즘
정성일은 김기덕을 참 아끼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월드컵 미장센-스펙터클壯觀, 중계의 시네마
K리그가 월드컵과, 심지어 날아라 슛돌이만큼도 재미가 없는 이유를 엄청 길게 설명하는데 일리가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축구를 모른다고 ㅋㅋㅋ 한 때 규칙도 모르면서 농구를 영화처럼 구경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허진호〈외출〉 얼룩花點, 차마 말할 수 없는 음란함 
별로 인상깊지도 않고 설렁설렁 본 영화라 왜 영어제목이 4월의 눈인지도 몰랐는데, 내 희미한 기억보다는 더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영화였던 모양. 

임상수〈그 때 그 사람들〉 무능력無能力, 역사 안에서의 정치적 수동성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이유로 정성일은 이 영화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역사적인 인물을 항상 그 맥락에서 다루는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강박인 것 같은데.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의 자리를 생각해보면 솔깃해지긴 한다. 그래도 난 재미있음.

이준익〈님은 먼 곳에〉 모순矛盾, 희생과 증오의 발라드
안 봤고 안 볼 영화인데, 왕의 남자도 라디오 스타도 아닌 이 영화를 고른 이유를 모르겠다.

장률〈이리〉 장소場所, 두 개의 방문
안봤고 보기 힘든 영화같은데 호기심이 생긴다. 보고싶다.

정재훈〈호수길〉 긴급함緊急, 이 시체를 보라
안봤고 보기 힘든 영화2. 호기심은 생기지만 엄청 지루할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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