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게오르기스왕자가 크레타의-해방을 알리며-흙을 밟던 순간
"....마케도니아에서 나와 함께 온 반란군 상놈중에 요르가란 놈이 있습니다. 극형에 처해 마땅한 진짜 돼지 같은 놈이었답니다. 아, 글쎄, 이런 놈까지 울지 않겠어요. <왜 우느냐, 요르가, 이 개새끼야. 너 같은 돼지새끼가 뭣 하러 다 우니?>
내가 물었지요. 나도 눈물을 마구 흘리고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이 자는 내 목을 안고 애새끼처럼 꺼이꺼이 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넣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부르는 자유란 무엇일까?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구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오.
 
<이리 오너라, 이 거지같은 자슥아!>
이윽고 하느님은 심문을 시작하시지요. 발가벗은 혼령은 하느님 발 밑에 몸을 던지고는 애걸복걸합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
혼령은 자기 죄를 밑도 끝도 없이 조목조목 외어 나갑니다. 하느님은 심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품을 하십니다. 그러고는 꾸짖으십니다.
<제발 그만둬! 그런 소리라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그러고는 쓱싹쓱싹 물 묻은 스폰지로 문질러 죄를 몽땅 지워버리시고 혼령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천당으로 썩 꺼져라. 여봐라, 베드로. 이 잡것도 넣어줘라!>
아시겠지만 하느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시란 게 뭡니까? 용서해버리는 거지요!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드시려는 순간(그 순간에 저주가 있으라!) 악마가 뱀으로 화심하여, 수슛, 그만 갈비뼈를 가로채어 달아나지 않았겠니? 하느님이 쫓아가 뱀을 붙잡았지만 악마인 뱀은 하느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어. 하느님 손에 남은 것은 악마의 뿔 뿐이었단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살림 잘하는 여자는 숟가락으로 바느질도 하거니, 오냐, 내 악마의 뿔로 여자를 만들어 보리라! 그리고 만드셨지! 얘, 알렉시스야, 그래서 악마가 우리를 못살게 구는 거란다. 여자의 어디를 만지든, 너는 악마의 뿔을 만지는 셈이란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나는 놀랐다.
"부처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당을 믿고 거기에다 나귀 한 마리씩을 붙잡아 매고 삽디다. 내겐 나귀도 없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자유롭답니다.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나머지는 길을 잃고 헤메니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종교를 내려주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오합지중도 영원을 살 수 있게 된 거지요.
 
못 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리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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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넘치는 한 인간의 기록은 우습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했다가 어딘가 닫혀있던 마음 한 구석의 열쇠를 몰래 따주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수적인 그리스정교의 종교풍토 때문에 카잔차키스는 더 과감하고 이단적인 종교관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가끔 교단에서 내침받은 이단아들의 종교관에서 정론이 풀어주지 못한 답을 듣고 또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
조르바의 자유로움은 일순 부럽기도 하며, 입닥치고 먼저 `살아내는` 사람들이 갖는 삶에 대한 깊이-이런 표현조차도 조르바는 닥치라 할 것이지만-, 그리고 그런 깊이가 주는 삶에 대한 아주 경쾌한 해설은 즐겁게 들을 만 하다.
다만 그의 지나친 `수컷`중심의 인간관 때문에 그의 관대하면서도 희생과 봉사정신이 가득한  연애관에도 불구하고 두 손가락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왜 조국도, 하나님도, 부처도 다 벗어버린 자유인 조르바의 기록을 왜 `그리스인`이라는 타이틀로 가둬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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