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은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그 <현실>은 아무도 입지 않는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그 인간을...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한다.


지나온 미로를 복기하는 인간처럼,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편지를 되풀이해 읽었다.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때마다 희망이 조금씩 싹트는 기분이었다. 길고 긴 문장의 길 끝에서 만나는 사랑합니다..다시 돌아와 만나게 되는 사랑합니다...그리고 어느 순간 그 한 그루의 묘목옆에 나란히 돋아 있는 또 한 그루의 <사랑합니다>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를 찾아낸 기분이었고


그녀를 찾아낸 <나>를,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조금씩 
조금씩 작아져갔고


또 조금씩 
작아지다가


이상하게도 더는 
작아지지 않았다.


언뜻 얘기를 들었을 때 참 박민규다운 사랑이야기일거라고 지레 짐작했었는데
의외로 박민규는 웅변을 하고 있었다, LOVE IS ALL WE NEED라고.
동감에 동감을 백만번 해도 답은 나오지 않지만요^^

초반부엔 누구라도 대체 얼마나 못생겼길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래서 그림까지 친절하게 넣었을 터이나
그래도, 단 하나 숙명의 장애물이 '못생김'이라면서
고작 이 정도를 제시한다면
오히려 '그녀'에게 한번 더 돌팔매를 던지면서
우르르낄낄 쥐군단들의 존재에 더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수를 여러 번 하던 그,
며칠에 걸쳐 편지 한통을 쓰는 그녀가
생생하게 등장하는
조신한 러브필드의 한복판이
심장을 한번 꾹 움켜쥐고 지나갔다..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전은 싫었다.
스무살의 그녀에게 빛을 준 스무살의 그에게 편지를 쓰는 그녀는
서른다섯살의 그녀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그 빛으로 반짝인다 해도...

거의 늘 대여중이어서
도서관에 줄 새해선물로 장만한 책인데
니 자리는 내 책꽂이.
도서관 선물은 다른 아이들로 대신해야할 듯^^


읽은 후에 듣자면 마음속에 눈물이 방울방울...
Pavane, Ravel, Cyprien Katsaris

이 선율이 춤곡이라는 게 신기해서 찾아본 파반느.
보는 재미는 별로 없고 
추는 사람도 그닥 흥에 겨울 것 같진 않은데
좀 배우기는 해얄 것 같은 특이한 댄스.
이런 게 형식미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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