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모두가 편히 쉬려고만 할 때 그들이 쉬기 위해서 집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서를 돌봐주는 일은 순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엄마 뿐이다...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어머니가 감정노동을 수행하면서 가족을 떠받쳐왔다. 이런 점에서 감정노동은 가장 착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감정노동에만 의존하는 가족에는 어머니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머니의 한탄과 같은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중산층의 세련된 엄마들이야 그것이 자신이 수행하는 전문가적인 '매니지먼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엄마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이다. 다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엄마의 한탄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대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어머니가 있으면 있는대로 어머니와 자식들간의 신경전이 끊이지 않고, 어머니가 없으면 가족 자체가 깨지고 만다. 따라서 감정노동이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가족간의 문제는 사라질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민주화가 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어찌되었건 한국은 민주화가 되었지만 내가 자라오는 동안 자유는 없었다. 우리에게 자유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부자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만 앉아있을 수 있으니 좋은 성적을 맞은 수 있다. 그들도 절약이라는 것을 배우지만 '살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산층의 아이들은 자신이 노력하면 어쩌면 삼성맨이 될 수 있다는 알지만 삼성의 CEO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가난한 아이들은 대를 물려 내려온 가난함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 세대의 자유란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자유란 '계층적, 경제적 차등에 따른 제한된 선택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나뉘는 계층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란 자신이 속한 계층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_자은
변영주의 어떤 글에서 이십대에 대한 가장 따뜻한 시선이라는 짧은 감상을 봤다.
하지만 엄기호의 설명대로라면 이 책은 따뜻한 시선이라기 보다는
정확한 기록이 맞을 것이다.
이 성실한 청년들이 스스로를 잉여로 자책하며 청춘을 탕진한다는 사실이
많이 측은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책속의 청년들이 아닌 다른 20대도 이렇게나 성실할까
의심을 지우지 못하며
환영하지 않는데도 슬슬 자라는
나의 꼰대근성을 확인한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꼰대.
참 정확한 정의다.
늙고도 철 없음은 때로는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청춘들의 청춘활용에는 모두가 부정적이라는 게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이따금 긴장이 풀린 근육들 사이로
요즘 애들은...류의 말이 비져나올때 우울해진다.
요즘 애들은...류의 말이 비져나올때 우울해진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고
그 과정도 범법으로 얼룩진 소수의 절대권력 늙은이들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음을 질시해
청년들을 허망한 스펙경쟁에 몰아 놓고 즐길 틈을 주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언젠가 느꼈던 음모이론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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