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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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끈적한 싸나이들의 세계

마초. 스페인어로는 더도 덜도 아니고 그냥 ‘남자’라는 뜻이다.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남미의 남성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라고 한다. 요즘 통용되는 뜻으로서의 마초가 된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 즐겨 소재로 사용했던 ‘가우초’(목동)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수긍이 간다. 수많은 옵하들이 동경하는 거칠고, 야성적인 세계. 목숨과 자부심을 걸고 자웅을 겨루고, 승자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는 세계. 칼 한 자루와 불알 두 쪽, 깡다구만 있으면 해쳐나가지 못할 것은 없는 세계. 으아~뭇 오빠들의 아랫도리를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세계가 아닌가?

뭐 요즘에는 저렇게 살았다간 대부분의 경우 실정법의 영향으로 바깥세상 볕을 별로 못보고 살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인 의미의 마초들은 대중문화 속에 주로 존재한다. WWE같은 프로레슬링은 그러한 것을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놓은 가장 좋은 예다. 수많은 근육질의 남자들이 챔피언 벨트를 위해 경합하고, 각본에 의해 형성된 은원관계는 결국 몸과 몸이 부딪혀 해결된다.(말이 뭔가 묘하다) 의리와 배신, 터프가이와 겁쟁이, 정정당당함과 비열함 같은 것들이 대립을 이루며, 우미관의 김두한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육체들의 향연이 바로 프로레슬링의 세계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영화, 드라마, 만화, 음악, 소설 등등에서도 이러한 고전적 마초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이 아저씨는 닉네임이 아예 마초맨


남자는 모름지기 ‘힘’이여!

이러한 고전적 마초들의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다. 힘에 대한 찬양과 무한한 긍정이야말로 이러한 마초문화의 핵이다. 과거의 힘이 주로 신체적인 능력에 국한된 것이었다면(특히 완력), 현대의 힘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총체적인 제반조건들까지를 포괄하는 범주로 변했다. 긴 칼 높이 쳐들고 전장을 누비는 것이 옛 마초들의 모습이라면, 빌딩 숲을 누비며 성공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남자는 현대적 마초의 표상이다.

마초문화에서 가장 커다란 덕목은 ‘공격성’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힘을 얻기 위해선 싸움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적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고, 결국 모든 것을 해쳐나가 고지에 우뚝 서는 자가 승리자다. 저돌성, 추진력, 배짱 등을 바탕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지배적인 자가 되는 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마초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관대하다’는 속설이 있다. 같이 힘을 얻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초적 관대함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힘의 위계에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관대함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과 동등해지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참을성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럴 때의 대응방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 과시와 폭력이라는 그들다운 방식이다.

이러한 마초적인 삶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도 남자들의 삶의 지침이었다. 남자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언제나 대통령과 장군이었고, 할머니는 부엌에 들어온 손자를 ‘꼬추 떨어진다’며 내쫓았다.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 땅 곳곳에 ‘하하하’하는 호쾌한 웃음소리와 그에 보조를 맞추는 수줍은 ‘호호호’가 울려 퍼지던 시대였다.
 

 

마초 장군. 이름이 진짜로 마초 ㅇㅇ;


미녀는 미남을 좋아해~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남성성과 힘을 대놓고 찬양하는 이들은, 광활한 몽골을 호령하던 징기스칸을 좋아라하고, 통일은 주석궁에 탱크가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처럼 일종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긴 하지만, 대체적인 경향으로는 울룩불룩한 근육질에 가슴털이 북실북실한 근육맨이 아니라, 하늘하늘하고 새하얀 석류남이 각광을 받는 시대다.

또한 젠더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존의 남성/여성이 가져야할 성역할에 대한 생각을 흔들어 놓았다. 여자들은 집에서, 애 낳고, 밥 짓고, 빨래나 하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간 병신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오빠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바깥일을 하고, 엄마는 살림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기존의 남성성의 신화역시 해체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의리’로 뭉친 싸나이들의 속내가 까발려지고, 힘의 찬양은 파시즘의 징후로서 읽힌다.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위계질서들이 합리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내가 ‘열정’과 ‘야망’을 품고 있다는데, 어디선가 ‘그래서?’라는 물음만 되돌아온다. 드라마에서 나오듯 “자네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네!”라며 빵 사먹으라고 500원을 던져주는 할아버지는 없다. 넘어갈 거라 믿고 열 번 씩이나 찍어대다간, 사랑하는 그녀의 신고로 경찰아저씨를 만난다. 으아~싸나이가 으악~싸나이로 변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Complex complex 컴플렉스 복합체

이렇게 ‘남성적인’ 삶이 위기에 봉착했다. 더불어서 생존의 조건 역시 더욱 살벌해졌으며, 듣도 보도 못한 창의력과 합리성이 조직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상회하는 가치가 되었다. 과거 비합리적인 ‘사회생활’의 엄청난 중압감과 폐해들은 ‘여성들의 희생’을 통한 비교우위로서 상대적으로 보상되었고, 지금도 그런 양상을 상당부분 띠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네들은 더 이상 비교우위를 통한 보상체계의 희생자로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마초의 뜻이 변했다. 더 이상 마초는 쾌활하고, 제멋대로인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다. 지금의 마초는 어려워진 삶의 조건에 대한 스트레스를, ‘모든 걸 여성의 탓’으로 돌림으로서 해소하려하는 음울한 ‘여성 혐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가사를 도맡아주고, 순순히 섹스상대가 되어주는 여성까지 혐오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혐오하는 것은 ‘말’하는 여성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여성’으로서 ‘말’하는 여성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대중화된 이후, 그것을 구성하는 주요한 성질중 하나인 ‘익명성’은 이러한 신종 마초들을 대거 양산하는 데에, 모종의 기여를 했다. 반여성적인 담화들이 웹상을 표류하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재생산 해낸다. 심지어는 페미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거나, 대가리를 깨부수고 싶다는 식의 리플이나 강간에 대한 암시 같은 범죄수준의 발언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여성과 관련되어 있는,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는 기사들의 덧글란은 대부분 각종 오물의 하치장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은 세대간의 만남이 비교적 쉬워지는 인터넷의 특성에 따라 일종의 ‘대물림’되는 양상까지 보인다. 덕분에 청소년들은 여성부가 뭐하는 곳인지 알기도전에, 여성부를 욕하는 것부터 배운다. 더불어 페미니즘이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페미니스트는 죽일 년들이 된다. 이 밑간 데 없는 증오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란 말인가?

참으로 웃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스스로 ‘마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런 반여성적인 담화를 하는 이들도 자신에게 ‘마초’라는 라벨이 붙는 것에는 엄청난 반감을 표한다. 이들의 머릿속에서 마저도 ‘마초’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인식 역시 자신의 태도에 대한 반추로서가 아닌, 자신을 ‘마초’라 부르는 이들에 대한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마초는 없다 자신은 그저 ‘양성평등’론자 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일종의 컴플렉스다. 어려워지는 생존의 조건에 대한 공포심,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역할에 대한 중압감, 커져가는 여성의 목소리에 대한 불만과 불안, 개인적인 좌절과 실패들이,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의 가면을 빌미로 무차별하게 쏟아 부어진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것은 이거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가부장성의 복권? 여성들의 말살 내지는 노예화? 이미 어떤 방향으로도 도덕성과 존재근거를 잃어버린 저것들이 목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여자도 군대 가라!?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이야기가 ‘여자도 군대 가라!’는 것이다. 군대는 대대로 마초양성소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남성들이 모종의 반여성적태도를 취득하는 것도 ‘군대의 경험’의 영향이 지대하다. 실은 군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한 위치를 과시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해왔다. 군필자에 대한 사회적 우대는 물론이고, 여성들에 대한 배제를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여군가는 거 절대 쉽지 않다.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하며, 모집 인원역시 많지 않다. 그나마도 여성들의 투쟁으로 얻어낸 자리다.

그러나 어느덧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옛날에는 여자가 어딜 감히 군대에 오냐고 성화더니, 이제는 가지 않는 다고 성화를 부린다. 어떻게 봐도 ‘환상의 섬으로 어서오세요!’같은 추천의 의미는 아니다. 되려 그것은 'welcome to the hell'에 가깝다. 여성복무의 실질적인 필요성을 입증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군대는 좆같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를 골자로 하는 이야기들만 나부낀다. 그렇다, 피해의식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필요성과, 실현가능성을 재끼고서라도 이러한 이야기는 커다란 난점들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이 평등한 상황에서 남자만 군대를 가는 상황이라면, 이는 충분히 논의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양성평등 사회인가? 혹은 혹자들의 주장처럼 ‘역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인가? 그동안 ‘남자’라는 이유로 받은 사회 문화적 혜택들은 다 어디가고, 여성들에게 이제야 주어지기 시작한 혜택들만 이야기 하는가? 어떤 건 여자라서 안 되는데, 이런 거는 평등해야 하는 게 양성평등인가?

여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군대에 가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려면, 남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적극적으로 여성차별에 대해 지적하고 개선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꽁무니를 슬쩍 빼고서는 페미니스트랑 별로 친하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난데없이 ‘진정한 페미니즘’을 부르짖는다. 대체 그게 뭔지 정말로 궁금하다. 아시는 분은 연락 바란다.
 

 


싸나이를 벗어 던져라

정말 자기 자신이 ‘남자’로서, ‘싸나이’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받게 되는 약간의 불이익쯤은 넣어둘 일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도 피해의식이 생겨나고, ‘남자기 때문에’라는 말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이러한 의심은 근본적인 문제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표피를 맴돌며 여성에 대한 증오로 표출된다. ‘내가 남자답게 살겠다는데, 너는 당연히 그에 맞는 여자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물음에 ‘싫거든!’을 외치는 언니들에 대한 증오 말이다.

그러나 좀더 뿌리 쪽으로 내려가 보자. 남자로 태어난 것과, 남자답게 사는 것은 반드시 수미일관해야 하는 일인가? 절대로 울지 않고, 너 대신 내가 맞고, 흑기사의 원 샷! 까지 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모든 남성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쓸데도 없이 무겁기만 한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무겁다고 성질부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짐들을 내려놓는 게 더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남성성의 균열은 가부장의 귀환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여자들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싸움이다. 자신을 ‘남자’로 살게 만드는, 군대에 끌고 가서 온갖 비합리적인 처사들로 바보를 만들고,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은 일꾼으로 만들고, 가족부양이라는 인질까지 잡아 노예상태로 만들어 놓는 시스템에 대한 싸움 말이다. 혹시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왕따)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싸움에서 여성들을 적으로 삼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남성학’이 필요하다. 가부장성이라는 교묘한 이중의 덧을 빠져나가, 싸나이가 아닌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간’들과 행복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연구하는 것. 노예제도는 결국 그 주인까지 노예로 만든다.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노예가 아니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남로당 명랑사회건설위원
Curse13(gigablade0@naver.com)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 )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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