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만선(자유연극시리즈)|2013

 



자본의 욕망이
가난의 욕망은 잡아먹는
슬픈 동물의 왕국.
60년대가 배경이라서인지
딸이 팔려갈 밑천으로 등장하는데
오랜만에 보는 이 어이없는 설정이
또 꽤 슬프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배우' 스타일의 두 마초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지만,
찰진 연기를 보여준 황영희,
이상하게도 눈물나게 만들던 이진희,
지주의 재현 김재건,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단 한번의 앵콜커튼콜도 없던 일요일 무대,
배우들이 좀 섭섭했을 듯.


1박 짜리 제주


















이름은 촌스러워도 볼만한 에코랜드,
-이름처럼 산 안다치고 만든 것 이길..
안팎이 다 어여쁜 김영갑 갤러리,
낡았지만 경치 좋은 해비치.

살인 당나귀(은교)|박범신


집을 둘러싼 소나무숲은 한겨울에도 여전히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보다 몇 배나 오래 산 노송들이다. 저것들이 좋아서 이 집으로 들어왔지만 이젠 시들 줄도 모르는 저것들의 그늘이 지긋지긋하다. 저것들의 뿌리는 지금 오래된 이 집 전체를 동여매고 있을 것이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계속됐다. 고요하면서도 밝은 나팔 소리 같았다. 햇빛 한 점이 소녀의 뒤꼭지에서 쨍 했다. 발빠른 어린 짐승 같았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 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젊은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섹스에 대한 아무런 환상이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연스럽게 그것을 ‘다스리면 된다’고 여겼다. 섹스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섹스의 욕망에 끌려 스스로 누추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은 어디든 있었다. 나는 그런 자들을 경멸했다. 어째서 한 뼘도 안 되는 살덩어리에게 몸 전체를 내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섹스의 욕망을 나는 평생 동안 아침이 오고 나면 저녁이 온다는 식으로, 자연의 사이클에 맞춰 다스렸다. 필요하면 남몰래 여자를 샀고, 사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때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다. ㅡ셰익스피어, 『햄릿』중에서. 

 그 애가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르게 거실 앞을 돌아 목제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 발걸음을 내딛고 나자 망설임이 없었다. 목제층계는 쫑, 쫑, 쫑, 울지 않고 통통통, 울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그 애, 제 그림자를 톡톡 차면서 숲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골목을 걸어 나가는 그 애가 떠올랐다.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길게 엎드렸다. 갑자기 가슴 한 켠을 어떤 단검이 깊게 에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을 따라 물처럼 차오르는 건, 슬픔이었다. ‘눈 감으면 송장’ 혹은 ‘썩어가는 관 같은’ 나는, 그래서 엎드린 채 조금 울었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통했다.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문덕수(文德守)의 「침묵」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수록 분노가 내 속에서 놀라운 폭발력으로 빅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보들레르는 노래했다.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C. 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감각이 무딘 그로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제가 알고 싶은 것을 내 표정에서 읽어낼 수 없었을 터이다. 그 애가 한 지붕 아래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달콤했다. 왜 그 애를 열렬히 품에 안고 자고 싶지 않았을까마는, 그런 욕망이 있었을지라도, 그런 욕망을 수습해 곱게 간직하는 일이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그 애에 대한 어떤 욕망도 나의 본원적인 달콤함에 장애는 되지 않았다. 저 위에 그 애가 있다, 라고 나는 잠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아침이면 통통통, 작은 북소리를 내면서 내려와 그 애는 내 귓가에 대고 청명하게 우짖을 것이다. “할아부지, 밥 먹어요!” 평생토록 그런 아침을 맞은 적은 없었다. 또 평생토록 꿈꾸어온 아침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전에 냉장고를 몇 번이나 열어보며 그 애의 아침 식탁을 무엇으로 어떻게 차릴까 궁리하다가 잠들었던 것이었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정갈하고 정다운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메뉴가 떠올랐다. 양식으로 할까, 한식으로 할까. 나는 한밤에 주방과 식탁을 닦고 치우며 생각했다. 식탁을 거울처럼 닦았다. 남비들도 닦고 식기들도 다시 씻었다.식탁의자를 그애가 앉기 좋게 맞춤하게 놓아보기도 했다. 비오는 한밤에, 이층을 가끔 올려다 보면서, 히죽거리기도 하고 상기되기도 한 상태로 주방을 치우는 나를 누가 보았다면 살짝 미쳤다고 했을 터였다. 메뉴를 무엇으로 하든, 그 애보다 좀 일찍 일어나 시내로 나가 찬거리를 사와야겠다고, 잠으로 끌려가면서까지 계속 생각했을 정도였다. 비로소, 관능과 욕망이 언제나 비례해서 나아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달리, 그애를 내게서 '저만치' 떼어놓고 들여다 보는 일이 조금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숨을 멈춘 듯한 긴장을 가지고 그 애를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이 불편하기는커녕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달콤했다. 달콤하게, 나의 사랑이 끝간데 없이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관능을 오히려 그때 나는 느꼈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과 연민의 완전한 합일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의 일방적인 승리일까.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서 
부정(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불행이 있다. 
―P. 엘뤼아르의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사실 책을 산 것이 아니라 박범신의 블로그에 연재된 내용을 읽었다. 
원제는 어딘가 미스테리의 느낌이 난다. 
안 봤지만 영화는 '은교'라는 제목이 당연히 잘 어울릴 것인데, 
살인당나귀와 은교 중 소설에 더 맞는 제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은교와의 조우는 인상깊다.  
이적요가 시를 쓰듯 순간을 잡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우에 대해선 가차 없다.  
이미 가족같은 관계에서 돌이켜보는 시간이기도 하려니와,  
부푼 감성의 연정과 어지간해서는 꺼내놓지 않는 정의 정서의 차이랄까. 

읽기 전 롤리타 컴플렉스 때문에 이 소설에도 편견이 있었다. 
이적요의 사랑은 다행이 영화 '데미지'와는 달랐고, '연인'과도 조금 달랐다.  
게다가 머릿속의 생각과 상관없이 나는 
이적요가 은교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등산길에서,  두 번 이별할 때 
두 번 모두 은교의 말에 울컥했다. 

이적요. 
인간적인 모욕은 참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욕망에 대한 모욕은 힘겹게 참아낸 노인. 
그의 사랑이 손을 잡는 것,  
관능과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랑을 기린 것에서  
이런 사랑도 사랑이다-라는 평범한 명제 이상의 감성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지 전략으로 삼았다는 시인의 인생에도  
사고파는 섹스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눈높이는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고하고 순결한 외피를 내세우더라도  
 남자라면 응당 그렇다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서지우같은 단순무식한 순정파라도 남자라면 이 정도 성일탈은 기본인가. 
노인의 욕망에 대해서라면 이미 
코엘료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아흔을 넘긴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욕망을 추하다고 여기는 통념에 대한 한소리라면 몰라도 
특별한 시인 이적요에 대해서라면 좀 실망이기도 하다.  
한 뼘도 안되는 살덩어리라고 불렀으면서  
그 역시 그 살덩어리의 비행에 인생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몰아부친 것이나 
늙음에 대한 모욕에 사랑까지도 이용해 복수하겠다는 결심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빛나는 순간들을 전하는 문장과  
몇 번 사전을 찾아봐야 했던 단어들과의 만남, 
청년 박범신과의 만남은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든 힘이 있었다.  
박범신의 비겁해서라는 부언이 안타까울 만큼  
그 환상속의 사랑도 좋았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시와의 만남. 
앞으로 읽을 시에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은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는 알 수 없다. 
이적요과 서지우의 시선이 비껴가는 사이  
그녀는 항상 두 사람과의 삼각형의 꼭지점에 세워진 대상이었으니까. 
어쨌든 마지막은  가장 슬픈 서지우의 죽음에 애도를.

오늘 뉴스 속의 박범신
이렇게 밖에 연명할 수 없는 문학인생이었다면 청년임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2013 고양아람누리 마티네콘서트 2 - 피아노와 친구들



비오는 날이라 조금 일찍 나갔더니
나름 여유있게 도착.
전형적인 봄날 같은  모짜르트의 첫곡은
피아노가 없는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들었다.
피아노 없는 곡 부터 다른 악기 수가 점점 많아지는 방식으로
선곡했다고 했다.

실내악에서의 피아노는 반주처럼 그다지 인상깊은 소리가 아니었는데
이날의 피아노는 빈주라기 보다는 1/2, 1/3, 4/1, 1/5만큼 제 소리를 내거나
이따금은 소리가 커지기도 하는 주인공 같았다.
브람스, 슈베르트, 쇼스타코비치-
이름만으로는 내취향인데
선곡 면면은 박종훈 취향^^
클래식이면서도 한구석은 클래식 바깥쪽으로 팔을 뻗고 있는 음악들이랄까.

오늘은 꽤 많은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더블베이스가 오케스트라용과 독주용이 따로 있다는 것, 독주회로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늘 나의 베스트는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와 첼로연주자 허윤정.
'피아노 반주'를 예상해서 오늘 공연이 제일 기대가 적었는데
비 때문인지, 더 도톰한 공기방울에 싸여있는 것 같은 피아노 소리가
듣기 좋았다.




연극|안티고네|2013






현대라면 절대권력에 맞서는 것은 국민과 정의의 이름일텐데
대신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람노릇을 하고 사람답게 죽겠다고 절규하는 안티고네.
안티고네의 절규와 항변은 크레온의 당위를 덮고도 남는다.
다만, 나는 안티고네는 귀한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살기를 더 힘들어했을 것 같아서 
과연 어려운 선택이었는지-에는 물음표를 살짝 달아본다.
  
전사같은 짧은 머리, 지금 입고 나가도 될 것 같은 옷차림의 안티고네는
전차 같은 이미지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호정이 살려 낸 안티고네는 그랬음에도 여성성을 잃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기대를 잔뜩하고서도 만족스러웠던 안티고네.
그리스비극 속 코러스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여지껏 현대적인 각색의 흔적인 줄 알았는데.
그 고대극의 특징이 
마치 실시간 댓글처럼 현실감 있게 서로의 반응을 주고 받으며 등장할 수 있게 된게  
세월의 변화라니..재미있다. 

오이디푸스 때와 같은 경사진 무대는
무대가 한 눈에 다 들어와서 
관객 입장에서는 연출가가 특허를 내도 될 것 같이 멋지기만 했는데
거기서 걷고 뛰고 춤춰야 하는 배우들에게는 무척 힘든 무대라 한다.
제대로 설 수가 없어서 약간 구부정하게 서 있어야 한다고.

한태숙 연출가는 
배우가 한 가지를 해내고 나면
다 바꾸거나 뭔가 더한 것을 시도한다는 김호정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내일의 왕님'에서 되돌이고개를 연기하던 토야의 불평이 생각났다.
'넌 어째 사람 잡는 생각만 하냐'...였던 것 같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설전이 생각보다 적은 분량이었는데,
그래도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나는데,
...언젠가 읽어보리라.

극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아마 그녀는 이 얼굴로 쓰러졌을 거야.
하지만 나는 당신이 
모두의 기억 속에 저주받은 왕이란 두꺼운 덮개로 봉인된 
그 오이디푸스가 희망이던 시절을 불러일으키려 애쓸 때
눈물이 났었어요. 
이런 진폭을 찾아 연극무대에 서는구나 싶던 그.

오이디푸스 보다 쫌 긴 대사로 쫌 더 긴 기쁨을 주신 박정자 마마님은 
사진 한 장 없으시네요....섭섭하게.



이것은 포토샵 효과가 아니다...
얼굴만 완벽하게 사라진 아이폰 솜씨-헐....

토월극장은 참 오랜만인데,
이름이 바뀌었다.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는데
마이크 달고 다니는 게 기본인 뮤지컬이라면 모를까,
연극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거의 오페라 극장수준의 객석규모부터
언짢았다.
아마도 이곳은 연극배우들의 발성수준 시험장이 될듯.
모든 객석이 R석인 새라새극장에 한 번 와주세요~

일드|그런데도 살아간다|それでも、生きてゆく|2011

 약간 백야행 같은 분위기, 어딘가 어색해 보이던 얼굴들 이었는데....
드라마를 모두 다 본 후 둘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보이던 기적(^^)의 체험.


보기 시작할 때만 해도 포스터의 저 멍~한 남자가 에이타인 줄 몰랐다.
소년살인범의 가족과 소년 살인범이 살해한 소녀의 가족들의 이야기라는
묵직함이 대략 상상되는 이야기다.
살인범의 여동생과 피해자의 오빠가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예상과 달리 둘은 거의 시작부터 정체를 안다.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가 놀랐다가 울부짖는 흔한 기술은 부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기술 아니더라도 자신만만하니깐!

이렇게나 주눅 든 줄리엣, 
이렇게나 맥 빠진 로미오를 본 적이....
나 뿐만 아니라 아무도 없을 거다.

아마 그 사고가 아니었으면 
꽤나 발랄하고 엉뚱한 사차원 처자가 되었을 모습까지 담아 
청춘이 슬프게도, 늘 기죽고 눈치보며 살아온 후타바를 연기하는 미츠시마 히카리는
감동이다. 
게다가 늘 존재감이 좀 약한, 주인공의 미남친구 같던 에이타도 
무거운 심장에 끌려다니는 지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아키의 어머니, 오오다케 시노부.
이름 외우는 데엔 좀 더 걸리겠지만
이미 감탄은 해버리다...


어설픈 데이트 느낌의 두 사람-이곳이 주 데이트 공간이다.
3번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가면서 아무-일도 없다^^
재미있었던 건 두 사람의 놀라운 패션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청춘스타들은 아무리 설정이 막장후줄근 수준이라해도
후줄근한 척 하는 괜찮은 패션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이 둘은 정말 리얼 징한 옷만 입고 나타난다.
뭐 그런 옷을 입고 나와도 둘 다 호감형 인간이긴해도.
저 목이 늘어난 티셔츠도 그렇지만,
진짜 몇 벌 안되는 옷을 11부 동안 돌려입고 나오는 두 주인공이라니
덩달아 몰입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

 젤로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온 이 날도 에이타의 양말패션은 눈부시게 빛난다

후카바의 선택은 정말 반전 같았는데,
혹시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수 십년 간 우울한 선택습관으로 남아
쉽게 포기해버린 건 아닌지 양 어깨를 세게 붙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의 마음속으로 이끌어주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오는 길까지 친절하게 이끌어주시는
사카모토 유지 사마를 알현하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샘플 하나 추가.

일드|Mother|2010

상처 있는 어른애기와 애기어른의 사랑이야기, 마더.

까칠한 나오씨와 특이한 레나-츠구미가 운명처럼 만나
먼저 알아본 레나-츠구미의 구애에
결국은 퐁당 빠져버린 나오씨.
상처속에 웃음을 잃어버린 나오가 서서히 웃음을 찾아가던 것,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레나가 
어디서나 사랑받는 츠구미가 된 것,
모두 사랑의 기적입니다~

츠구미와 나오의 편지는 
엄마와 딸이라기보다는 연인의 것 같았다.

'당신은 나에게 그 무엇이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의 삶은 빛났습니다....'

이 두 사람 사랑하게 해주세요-를 내가 대신 외쳐주고 싶었다.
서로에 이끌려 사랑하게 된 특별한 엄마와 딸의 사랑이야기, 마더.
선택하지 않고 만나는 평범한 부모자식사이를 꿈꾸던 진한 관계의 주인공.
갑자기 평범한 연애를 꿈꾸었던 착한남자의 마루 생각이 나네...
마더는 엄마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엄마 구해줘...와 구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마도 그 순간 부터 그녀는 스스로를 분리시키기 시작했던 같다.
인생에서 소중한 날은 하루면 충분하다는
속 깊은 우렁엄마.
너무나 의지가 되겠지만, 한 편 너무 마음이 아프게도 만드는 나쁜 엄마다.
가장 멋졌던 엄마.
씩씩하고,
열정적이고, 
무엇보다도
태양의 기운이 가득했던 솔직한 엄마.
 넌 버림 받는 게 아냐. 네가 버리는 거야. 
한 번 더 유괴해 줘...
목소리, 발걸음, 글씨, 슬퍼하지 않으려는 작별인사 속 사랑고백은 더 슬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읽은 내용이 기억났다.
자식이 부모에게 왜 부모를 사랑해야하는 지 물을 때
내가 너를 낳았으니까-밖에는 대답할 수 없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는.
한 번은 엄마를 버리고, 한 번은 엄마를 잃어야 했던 츠구미.
그 상처, 나오의 사랑으로 충분했을까.
처음 헤어져 밝은 모습으로 시설에 있던 츠구미는 나오의 사랑으로 성장한 것 같았지만
마지막 이별 앞에서 씩씩하게 웃으려는 츠구미는 
늘 괜찮아-를 답하던 레나일 것도 같아 마음이 쓰이기도 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어디서 시작되었건 
온 인생을 던져 자신을 열렬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렇게 애타게 찾아갈 사랑이 있었던 건  
굉장한 거니까,
엄마가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으로 
괜찮았길 바래.

설마, 크기만 하고 무겁지는 않겠지 싶으면서도
가방자체가 학대도구 처럼 보인다-책가방은 더했어.
왜 츠구미는 저렇게나 많은 짐을...싶은.
근데, 귀여워...!
(책가방은 더 귀여워!)
이게 첫 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법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유괴는 좀 인정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어차피 피해갈 놈들은 다 피해가는 걸,
이런 예외는 좀 안될까.

 
세 엄마와 세 딸 혹은 네딸... 


이상적인 모성애의 전시장인 마더는
드라마 속 하나씨도 말하고 있듯
어쩌면 남자작가 였기에 쓸 수 있었던
환상특급 일 지 모른다.
그럼에도 좀 더 그녀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

옛날에 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되면 뭐가 달라-하고.
그때 언니는 대답했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TV건 영화건 
엄마하고 아이가 헤어지는 장면은 참을 수 없이 슬퍼서 엄청 울게 된다고.
근데...엄마가 아니어도 그렇게 울 수 있다-나이가 들었더니^^

하지만, 어쨌거나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후유증은 요녀석.

저를 햄스터에 맡겨놓고 놀러간 엄마에게 즐거워서 다행이라는 통화를 하는 중이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왜냐면 아역인데 가끔 오버스럽기도 해서--;;)
이 아가는 세상에나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얼굴을 가졌던 지
드물지만 몇번 소리내서 웃던 장면에서는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지경이다.
저런 볼을 뽀뽀 한 번 안해주고 버틸 수 있었다니 
나오엄마는 정말 독특한 엄마임에 틀림없어.
어른의 예쁜 외모는 정성껏 가꾸면 십여년까지도 수명이 길어질 수 있지만
아이의 모습은 정말 그 순간 뿐이다.
웅~너도 이미 커버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