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MEN OF THE YEAR - GQ,200512


GQ KOREA December 2005

 

 
 
이명세, 뭐든 예뻐야 해

한국 대중 영화에는 졸부 같은 구석이 있다. 돈 벌기에 급급한 나머지 영화 미학에는 둔감한 영화가 종종 눈에 띈다. 하지만 영화를 오직 영화로만 고민해온 감독이 있다. 6년 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남긴 채 훌쩍 미국으로 떠났던 이명세는 <형사>로 다시 한 번 자신이 구제불능의 영화근본주의자라는 걸 입증했다. <형사>는 불완전한 작품이지만 이명세가 부재했던 지난 6년 동안 한국 대중 영화가 잊고 있었던 영화의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울이다. <GQ>는 이명세를 올해의 감독으로 선택했다.


영화란 무엇인가? 어쩌면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난 <대장금>을 무척 좋아한다. 신문 연재 소설 같다. 매 회 새로운 박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대장금>은 드라마다. 영화는 드라마가 아니다. 신문 연재 소설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영화는 시에 가깝다.

<형사>로 영화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뜻인가?
TV 드라마였다면 인물 설명을 위해 몇 회 분량을 소비했을 거다. 사실 인물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2시간을 써도 모자라다. 하지만 <형사>는 인물을 설명하고 그들이 빚어내는 사건을 담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두 남녀가 사랑하는 느낌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관객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관객도, 훈련을 받아야 한다. 클래식을 듣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차갑다 혹은 뜨겁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느끼는 감각이 훈련되지 못하면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관객을 너무 앞서간 것 아닌가?

달라지고 있다. 우리도 그 느낌을 구분해낼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디자인이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나? 예술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거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은 평생 동안 영적인 성장을 한다. 영화도 그걸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혼은 어떻게 충족 되는건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는 흔히 베르사체나 샤넬, 디올의 옷을 입고 행복해하지 않나.

지금 한국영화에 그런 고민이 필요하단 얘기인가?
한국은 지금 영화 뿐만 아니라 대중 문화 전반에 철학이 없다. 미적으로 세련됐다는 건 미학적인 고민 속에서만 나온다. 우리가 커피숍에서 얘기를 나누지만 여기 분위기가 좋다 나쁘다고 얘기하게 되는 건 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영화도 그런 근본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영화 감독은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영화 감독은 결국 철학자인가?

영화 감독은 깡패다. 예술이 전복의 역사이고 예술가는 깡패이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은 자신이 하는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철학자다. 경제인도 철학을 한다. 지금은 상도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경제인들도 상술의 미학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 영화의 미학이 땅에 떨어졌나?
아름다움과 그렇지 못한 것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 영화가 아름답고자 한다면 극장의 의자 배치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건 평론가들과 매체의 몫이기도 하다. 음식 문화가 나아지고 있다면 음식 문화의 무엇이 나아지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매체의 평이다. 그런데 매체들은 자기 권력만 휘두른다. 영화를 재단하기에 바쁘다.

아름답다는 건 뭔가?
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우 형사가 욕을 했다는 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고약한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그게 표현의 자유일까? 그렇다면 예술의 표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선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고,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야만 진보라고 불린다. 하지만 표현의 아름다움을 고민하고 표현의 미래를 고민하는 게 진짜 진보다. 난 진보의 진보다.

영화 감독은 왜 했나? 벌써 20년째 당신은 영화 감독이다.
그 질문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왜 했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참을 고민했다. 산다는 게 무엇일까? 그러다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감독이 되겠다는 것으로 연결되나?

난 나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하곤 한다. 모든 것은 나 자신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나를 생각했을 때, 소박한 소시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난 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영화도, 인생도 그렇게 산다. 그래서 생각했다. 사람한테는 주민등록증이 있다. 하지만 정신의 주민등록증은 없다. 내겐 영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게 영혼의 주민등록증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영화를 한 거다.

그렇다면 당신은 관객이 아니라 자신이 비치는 거울을 앞에 놓고 영화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아니다. 나르시시즘은 피해야 한다. 관객과 소통하고 관객에게 이해 받기를 원한다. 어사 박문수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는데 한 아낙네가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줬다고 했던가? 누군가는 목 말라 죽겠는데 버들잎을 띄워주냐며 역정을 내겠지만 현명한 누군가는 버들잎의 속내를 알아챌거다. 현명한 관객을 위해 난 영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형사>에 대한 평단의 반응에 무척 실망했을 것 같다. 찬반을 떠나 십 수년 전 <개그맨>이나 <첫사랑>을 찍었을 때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야기가 빈약하다느니, 이미지 과잉이라느니 하는 비판 말이다.
비슷한 것만 자꾸 하면 재미 없다. 성장이 없으니까. 인터뷰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난해 우리가 만나서 한 얘기와 올해 우리가 만나서 나눌 얘기가 비슷하다면 재미 없지. 가끔 알고나 썼을까 싶은 평론이 있긴 하다. 내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글이 장황하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 그런 건 재미 없다.

그럼 무엇이 재미있는 건가?
난 우리 사회가 시대의 강박 관념을 끊어버렸으면 싶다. 한국을 포함해서 아시아 영화들엔 그런 무거움이 있다. 젊은 친구들의 영화에서도 그런 게 엿보일 때면 답답하다. 그런 강박을 버리면 재미 있어진다. 그건 이야기에 대한 강박과도 같은 것이다.

이야기가 없다는 비평을 절대 수용할 수 없는 모양이다.
<첫사랑> 때도 그런 얘긴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고흐 시대 사람들은 고흐를 버렸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마녀 사냥으로 숱한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당신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은 결국 영화인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당신 나이의 남자들은 가정과 아이 걱정으로 인생을 보낸다.

글쎄…. 결국 내겐 영화밖엔 없는 거겠지.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다. 내 발로 나왔는데 너무 멀리 나왔다. 잘해보고도 싶은데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가끔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나 싶은 고민을 한다. 내 영화 <첫사랑>에 그런 느낌이 조금 배어 있다. 내겐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에 대한 강박 관념 같은 게 있다. 그렇게 짓눌려서인지 악몽을 꾼다. 울어야 하는데 울음이 안 나온다. 그러다 소리지르며 깨서 운다. 죽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생각을 가끔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나?

난 늘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늘 그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간이란 게 뭔지, 왜 유한한 존재인지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예수와 부처도 결국 다 죽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곧 인생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 근원적인 고민이 6년 동안의 미국 생활에서 더욱 깊어진 게 아닌가도 싶다.

늘 짊어지고 사는 질문들이다. 미국에서도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민을 하면서 생각을 숙성시켰다.

서사 구조에 대한 고민은 소설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던 것이다. 찰스 디킨스 같은 소설가가 있었던가 하면 제임스 조이스처럼 이야기를 단절시키고 분쇄하는 소설가가 등장했었다. 시간과 논리에 대한 싸움은 예술의 숙명이다. 영화에서 당신도 그런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그런 고민은 있었다. 인상파나 야수파가 출연하게 된 건 평면적인 화폭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것 아닌가. <형사>는 외국에서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못 본 영화라는 건 인정했다. 본 적이 없는 영화를 어떻게 정의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거다.

앞으로도 영화가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CG도 영화가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떤 사람은 CG란 기술의 진보일 뿐이라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CG는 영화 언어의 진보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상상력이 있다면 진화할 거다. 그 시대엔 그 시대에 맞는 매체가 탄생하게 돼 있다. 20세기엔 영화가 탄생했다. 2005년엔 그에 맞는 영화 언어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내 영화가 그 진보의 연장에 있기를 바란다. 난 인생이 무엇인지, 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난 구도자다. 난 지금 만행을 하는 중이다.


에디터 | 신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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