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La vie d'Adel|2013

계속 본론을 벗어날까? 아마 그러리라. 안 그럴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난 여자고 이건 내 이야기다. 그 말을 새겼다면 내가 지금 그 특권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리라. 

내게 관심을 보인 남자애들 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저절로 눈이 그에게로 끌렸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행복인 줄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애들하곤 놀았어도 그 애하곤 못 그랬다. 그저 쳐다보는 데 빠져서 마음에 들 생각도 안했다. 
첫사랑은 이처럼 순진하게 시작되나 보다. 너무 달콤하기에 잘 보일 욕망마저 잊는다. 그 애도 남다른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수줍고 사려깊은 눈길이었다. 우리 사이엔 뭔가 더 엄숙한 게 있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대놓고 내 매력을 예찬했고 그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엔,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자신에 대해선 또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성당을 떠나면서 나는 천천히 나왔고 걸음을 늦췄던 것 같다. 떠나는 게 아쉬웠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몰랐다고 했지만, 알았는지도 모른다. 떠나면서 그를 보느라 뒤돌아 봤으니까. 그래서 뒤돌아보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
마리안의 일생>

왠지 모르게 아델을 끌리게 만들었던 책 '마리안의 일생' 속 강렬한 매혹 또는 사로잡힘이 
아델을 찾아온다.
아무에게나 이런 매혹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매혹이 강렬하다고 해서 아무들의 사랑보다 오래, 영원히 살아남지는 못했다. 

신비로움에 싸인 매력넘치고 아름다운 아델은
엠마의 비슷한 신비로움에 끌렸고 찾아 헤매다 만났고 빠졌고
신비의 층위가 벗겨진 생활 속에서 다름을 부딪히며 방황하다 거친 비난 속에 이별당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어도 식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아델은 엠마를 다시 얻을 수는 없었다. 
다시 찾아가 자신을 방황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한 모습을 다시 발견하고 나서야 
아델은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하듯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간다. 
걸음을 늦추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지금의 모자람을 과거로 돌아가 채우고 싶어질 때 
'가봤자 별 거 없다'고 소신있게 얘기해 주는 아델의 인생.
근데, '아델의 인생'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된 건 무슨 뜻일까?

이 강렬한 연애이야기는 의외로 독서를 부르는데
잘 보이는 것도 잊을만큼 빠졌다는 '마리안의 일생'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르트르의 책도 끌린다. 
'얼굴의 신비한 약점'이라거나 
존재가 본질을 앞서니 그 본질을 행동으로 채워야 해서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도.
게다가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과 한 눈에 빠지는 것, 그 운명적 인연을 짚어주며
그 감정이 더해지는 것인지 빠지는 것인지를 질문해주는 고등학교 문학수업이라니.
열심히 들어보고 싶은 수업이다.

받아적다 보니 더 읽고 싶어지는 마리안의 일생-하지만 번역본이 없다.
아델은 '정의'를 뜻한다고 한다. 

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

첫번째 돼지는 손쉬운 선택을 했고
두번째 돼지는 실패에서 배우지 못했고 
세번째 돼지는 잘배우고 위기에 잘 대처하며 뭐 암튼 성공하는 유형.
이런 기발한 관점의 이야기들에 내가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는
과정과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결과론적 입장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세마리 돼지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해도
그들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마지막, 
막내 돼지의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마리보

귀족 오르공의 딸 실비아는 결혼상대자인 도랑트를 믿을 수 없어 하녀인 리제트와 역할을 바꿔 어떤 사람인 지 알아본 후 결혼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결혼상대자인 도랑트 역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인인 아를르캥과 차림새를 바꾼 채 실비아를 찾아온다. 

도랑트의 아버지가 이미 오르공에게 아들의 계획을 귀띔해주었지만 오르공은 실비아의 오빠이자 아들인 마리오에게만 일러줄 뿐, 실비아의 선택을 기다려준다. 

바뀐 역할에도 불구하고 실비아와 도랑트, 리제트와 아를르캥은 제 짝을 찾아 사랑에 빠진다는 이 코미디는 기시감이 가득한데 1730년에 씌어졌다니 모든 '남의 역할 해주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의 조상인듯 하다. 

귀족 행세를 하며 귀족인 줄 알았던 리제트와의 사랑에 신분상승의 야심을 슬쩍 비치던 아를르 캥이나, 하인 행색의 도랑트가 약혼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오빠까지 동원해 끝까지 도랑트의 사랑을 시험해보는 꼼꼼한 실비아-마리보의 장기라는 섬세함까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300년 전 연애극의 짜임새 구경.

읽고 싶었던 마리안의 일생은 구할수도 없는 모양이고...

 

어른 김장하

이태준의 청춘무성에서 원치원은 탄광으로 벼락부자가 된 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꿔준다. 
당연히 100% 상환률은 아니다. 
그래도 원치원은 그 방법을 바꾸지 않는다.   
원하면 본전 생각 없이 아무에게나 돈을 꿔주는 부자
-이거야말로 최고의 부자美^^
현실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있었다, 진주에.
벼락부자가 아니었는데도.

사람의 사람됨을 한 뼘 높여주는 어른, 김장하.
사람의 역사는 이런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어 상하지 않고 이어지는 모양이다.
보고 나면 기억나는 귀여운 종종 걸음 ㅋㅋ

2023/07/03

YB: infinity|고양


공연 전 
오랜만에 긴 여행에 심쿵하고 있었는데 
무려 첫 곡이 혈액형
깃발 엔딩까지 너무 좋았다. 
처음 듣는 흑화 뽀로로에 신비아파트 신나고 
19는 바로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
메탈 신보를 준비 중이라니
YB 살아있네! 
오랜만의 YB공연이었지만 
놀랍게도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던 나도 
살아있었고 ㅋㅋㅋ
요즘 무한반복 중인 이클립스의 노래를 들으며 갔다가
YB를 들으며 돌아왔다.
신나!!!

특이점: 오늘 노래 부르신 관객 분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에서 노래 부르는 꿈을 이루신 걸까요ㅋㅋㅋ
박수가 당연한 명창이었다.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유니버설발레단


생기 넘치던 줄리엣이 로미오의 어깨 위에서 힘 없이 흘러 내릴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춤으로 이렇게 슬픔을 전하는구나. 
가볍고 여유 있게 근육결 대로 접고 펴고 날던 동작도 멋있었지만
서희는 유난히 발등이 눈에 자꾸 들어왔다. 

내 취향에는 케네스 맥밀란 버전이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 로미오와 줄리엣의 느낌.
한 잠도 못 잔 상태라 포기할 판 이었으나
예전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죽음-인가..?-를 놓쳤던 쓴 경험으로 무리했는데
뒤로 갈수록 눈꺼풀에 힘이 생기는 기적 체험.
잘 봤고 보길 잘했다.
국립발레단원들 구경도 많이 하고.



얼굴을 날리는 것은 아이폰의 기술인가 나의 기술인가 ㅋㅋㅋ

파묘|Exhuma|2024

처음 귀신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홍보 문구를 그대로 구현하려는 것 같아 기대가 좀 식었고 
정령이 등장할 땐
괴물의 CG를 생각나게 하면서  
기이함을 풍기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 되어버렸지만
재밌었다. 

김고은의 굿은 정말 압도적이었고
김고은과 이도현이 보여주는 
신당 밖 젊은 무당들의 모습도 재밌다. 
의심이 놀라움으로 바뀌는 순간의 전율을 즐기는 직업이 
무당 하나는 아니겠지만
생각해보면 현실 속의 초능력자들인 이 사람들이
결혼식 사진 속 모르는 사람들로 마주칠 만큼
전보다 오히려 가까이 있으며
그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니.

문제를 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려던 전문가의 자세와 
힘들수록 같이 하려던 신뢰의 관계는 좋았지만
노력하던 사람, 친절한 사람의 희생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