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사계절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거야."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삐삐 롱스타킹'에 푹 빠졌을 때는 삐삐가 '말랼광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은이에게는 삐삐가 '미치광이'같은 느낌이었을까.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___ 자" 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주자"

 몬테소리는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해 손수건 사용법 등을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고 귀 기울여 수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고는 깜짝 놀랄 만큼 열광적인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쩌면 자신이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푸는 법을 몰라 애를 먹어온 것이다......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길어야 3, 4년 전의 일을 두고 힘주어 "예엣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3년 전과 열 살의 3년 전은 똑같은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 명의 노동자이기도 한 '교사'에게 '스승'의 모습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특수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그 길에 들어선 것 차제를 '헌신에 대한 약속'으로 여기고, 그 분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 밖에도 악기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저마다 해 준 조언은 이랬다. "남들 하는 거 멋있어 보여서 하는 거면, 큰 기대는 안하시는 게 좋아요." "분명히 지루해 질테니까 마음 굳게 먹으셔야 돼요." "피아노 연주를 자주 들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연주한 거요." "열심히 하세요. 안됐는데 갑자기 될 때가 있어요." "연습은 날마다 해야 돼요. 날마다 하는 게 중요해요."

내용이나 어조를 떠나 대부분의 양육서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라'인데, 어째서 부모의 개성은 존중하지 않는 걸까? ..... 그런 상태에서 '이럴 땐 이렇게'식으로만 접근하면 결과적으로 아이들도 비슷해지는 것 아닐까?

그리고 반말-존댓말 관계에는 반말을 하는 쪽이 '존댓말을 듣는다'라는 이유로 더 권위를 얻는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쪽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존댓말을 하는 사람의 의견은 자주 무시된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것도 많은 어린이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행지 관광 안내소 직원에게 엄마 아빠가 지도며 상품할인 쿠폰 등을 받고, 이런 저런 안내를 받는 동안 데스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어서 기를 쓰는 어린이를 본 적이 있다......여행 와서 들뜨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은 나나 어린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기는 커녕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제대로 볼 수 조차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어린이는 몸집이 커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안 해 봤을까? 어른이 되고서 "크니까 좋구나. 속이 다 후련하다!"했을 법도 한데, 일단은 내가 천천히 자랐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중에 커서 아기 낳으면요, 아 맞다, 지금 컸지"

...어른들은 이날 하루 마주치는 어린이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좋겠다......어린이날, 가정 바깥에서도 축하를 해주자. 

나는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한다.

제목이 이렇게나 매력적이면 실망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 놓고 읽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제목처럼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금 만나는 어린이들, 자신의 어린이 시절을 통해 아우르며, 나로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안내를 해주기도 하고, 공감하기 쉬운 글로 쉽게 이해시켜준다.

마지막 부분 어린이날의 희망사항에 이르면, 저자가 일년에 한 번이라도 한번쯤은 어린이들에게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이렇게나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제일 재미있던 부분은 책읽기 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시작부터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어린이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수가 공들여 바라보는 시간에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들

시간이 흐르면|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읽음:그림이 많음

사람백과사전|메리 호프만----읽음:그림이 많음

어린이의 비밀|마리아 몬테소리 

멋진 열두 살|신시아 라일런트

어린이 문화운동사|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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