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당나귀(은교)|박범신


집을 둘러싼 소나무숲은 한겨울에도 여전히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보다 몇 배나 오래 산 노송들이다. 저것들이 좋아서 이 집으로 들어왔지만 이젠 시들 줄도 모르는 저것들의 그늘이 지긋지긋하다. 저것들의 뿌리는 지금 오래된 이 집 전체를 동여매고 있을 것이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계속됐다. 고요하면서도 밝은 나팔 소리 같았다. 햇빛 한 점이 소녀의 뒤꼭지에서 쨍 했다. 발빠른 어린 짐승 같았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 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젊은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섹스에 대한 아무런 환상이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연스럽게 그것을 ‘다스리면 된다’고 여겼다. 섹스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섹스의 욕망에 끌려 스스로 누추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은 어디든 있었다. 나는 그런 자들을 경멸했다. 어째서 한 뼘도 안 되는 살덩어리에게 몸 전체를 내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섹스의 욕망을 나는 평생 동안 아침이 오고 나면 저녁이 온다는 식으로, 자연의 사이클에 맞춰 다스렸다. 필요하면 남몰래 여자를 샀고, 사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때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다. ㅡ셰익스피어, 『햄릿』중에서. 

 그 애가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르게 거실 앞을 돌아 목제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 발걸음을 내딛고 나자 망설임이 없었다. 목제층계는 쫑, 쫑, 쫑, 울지 않고 통통통, 울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그 애, 제 그림자를 톡톡 차면서 숲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골목을 걸어 나가는 그 애가 떠올랐다.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길게 엎드렸다. 갑자기 가슴 한 켠을 어떤 단검이 깊게 에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을 따라 물처럼 차오르는 건, 슬픔이었다. ‘눈 감으면 송장’ 혹은 ‘썩어가는 관 같은’ 나는, 그래서 엎드린 채 조금 울었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통했다.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문덕수(文德守)의 「침묵」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수록 분노가 내 속에서 놀라운 폭발력으로 빅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보들레르는 노래했다.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C. 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감각이 무딘 그로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제가 알고 싶은 것을 내 표정에서 읽어낼 수 없었을 터이다. 그 애가 한 지붕 아래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달콤했다. 왜 그 애를 열렬히 품에 안고 자고 싶지 않았을까마는, 그런 욕망이 있었을지라도, 그런 욕망을 수습해 곱게 간직하는 일이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그 애에 대한 어떤 욕망도 나의 본원적인 달콤함에 장애는 되지 않았다. 저 위에 그 애가 있다, 라고 나는 잠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아침이면 통통통, 작은 북소리를 내면서 내려와 그 애는 내 귓가에 대고 청명하게 우짖을 것이다. “할아부지, 밥 먹어요!” 평생토록 그런 아침을 맞은 적은 없었다. 또 평생토록 꿈꾸어온 아침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전에 냉장고를 몇 번이나 열어보며 그 애의 아침 식탁을 무엇으로 어떻게 차릴까 궁리하다가 잠들었던 것이었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정갈하고 정다운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메뉴가 떠올랐다. 양식으로 할까, 한식으로 할까. 나는 한밤에 주방과 식탁을 닦고 치우며 생각했다. 식탁을 거울처럼 닦았다. 남비들도 닦고 식기들도 다시 씻었다.식탁의자를 그애가 앉기 좋게 맞춤하게 놓아보기도 했다. 비오는 한밤에, 이층을 가끔 올려다 보면서, 히죽거리기도 하고 상기되기도 한 상태로 주방을 치우는 나를 누가 보았다면 살짝 미쳤다고 했을 터였다. 메뉴를 무엇으로 하든, 그 애보다 좀 일찍 일어나 시내로 나가 찬거리를 사와야겠다고, 잠으로 끌려가면서까지 계속 생각했을 정도였다. 비로소, 관능과 욕망이 언제나 비례해서 나아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달리, 그애를 내게서 '저만치' 떼어놓고 들여다 보는 일이 조금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숨을 멈춘 듯한 긴장을 가지고 그 애를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이 불편하기는커녕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달콤했다. 달콤하게, 나의 사랑이 끝간데 없이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관능을 오히려 그때 나는 느꼈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과 연민의 완전한 합일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의 일방적인 승리일까.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서 
부정(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불행이 있다. 
―P. 엘뤼아르의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사실 책을 산 것이 아니라 박범신의 블로그에 연재된 내용을 읽었다. 
원제는 어딘가 미스테리의 느낌이 난다. 
안 봤지만 영화는 '은교'라는 제목이 당연히 잘 어울릴 것인데, 
살인당나귀와 은교 중 소설에 더 맞는 제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은교와의 조우는 인상깊다.  
이적요가 시를 쓰듯 순간을 잡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우에 대해선 가차 없다.  
이미 가족같은 관계에서 돌이켜보는 시간이기도 하려니와,  
부푼 감성의 연정과 어지간해서는 꺼내놓지 않는 정의 정서의 차이랄까. 

읽기 전 롤리타 컴플렉스 때문에 이 소설에도 편견이 있었다. 
이적요의 사랑은 다행이 영화 '데미지'와는 달랐고, '연인'과도 조금 달랐다.  
게다가 머릿속의 생각과 상관없이 나는 
이적요가 은교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등산길에서,  두 번 이별할 때 
두 번 모두 은교의 말에 울컥했다. 

이적요. 
인간적인 모욕은 참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욕망에 대한 모욕은 힘겹게 참아낸 노인. 
그의 사랑이 손을 잡는 것,  
관능과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랑을 기린 것에서  
이런 사랑도 사랑이다-라는 평범한 명제 이상의 감성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지 전략으로 삼았다는 시인의 인생에도  
사고파는 섹스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눈높이는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고하고 순결한 외피를 내세우더라도  
 남자라면 응당 그렇다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서지우같은 단순무식한 순정파라도 남자라면 이 정도 성일탈은 기본인가. 
노인의 욕망에 대해서라면 이미 
코엘료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아흔을 넘긴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욕망을 추하다고 여기는 통념에 대한 한소리라면 몰라도 
특별한 시인 이적요에 대해서라면 좀 실망이기도 하다.  
한 뼘도 안되는 살덩어리라고 불렀으면서  
그 역시 그 살덩어리의 비행에 인생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몰아부친 것이나 
늙음에 대한 모욕에 사랑까지도 이용해 복수하겠다는 결심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빛나는 순간들을 전하는 문장과  
몇 번 사전을 찾아봐야 했던 단어들과의 만남, 
청년 박범신과의 만남은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든 힘이 있었다.  
박범신의 비겁해서라는 부언이 안타까울 만큼  
그 환상속의 사랑도 좋았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시와의 만남. 
앞으로 읽을 시에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은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는 알 수 없다. 
이적요과 서지우의 시선이 비껴가는 사이  
그녀는 항상 두 사람과의 삼각형의 꼭지점에 세워진 대상이었으니까. 
어쨌든 마지막은  가장 슬픈 서지우의 죽음에 애도를.

오늘 뉴스 속의 박범신
이렇게 밖에 연명할 수 없는 문학인생이었다면 청년임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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