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난다는 것은 이제 일상의 반대말이다. 가끔은 꿈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일단 발걸음을 옮길 때는 되도록 제자리에서 멀리, 사람의 기척으로부터도 멀리 나서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 네 사람의 여행일기가 묶인 네 권의 책이 있다. <서역의 달은 서쪽으로 흘러간다/김영현>, <모독/박완서>, <사막의 태양/최수철>, <들끓는 사랑/김혜순>.
어느 제목 하나도 기행문 같지는 않은 이 책들은, 문단에서 주목받는 네 명의 작가가 디뎠던 먼 나라에 대한 얘기들이다.
세상의 일부임을 사랑하게 되다
‘모든 일에 시시하고 심드렁해져 있’던 40대 초반의 김영현은 마지막 남아있던 꿈, ‘막막한 사막'을 찾아 실크로드 여행 길에 오른다.
처음 중국은 그에게 익숙했던 자본주의의 유년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유적지를 돌아보며, 또 사람들을 만나며 그가 적는 짧은 독백들은 하루하루 마음을 열어 여행지를 느끼게 된 부지런한 여행자로서의 그를 보여준다. 무조건적인 기대도 없고, 사소한 비교도 없이 호흡을 고르게 된 그는,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나름의 사는 법을 자신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긴다. ‘그것이야말로 식민지시대 때 남의 민족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미개시했던 침략자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큼직큼직한 그 이국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감상은 ‘별들'이다. 텐산 산맥의 천지에서 올려다 본 그 ‘우주의 바다'에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일부임을 깨달으며, 생에 대한 사랑을 준비하는 소설가가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모독'
이미 네팔을 두 번 다녀온 적이 있는 박완서는 <모독>에서 특유의 문체로 처음가본 티벳과 네팔의 정취를 담담히 또 세세히 쓴다.
생김새가 ‘우리보다 더 우리나라사람 같이 생긴' 티벳 사람들의 나라 티벳은, 종교 색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자연과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시작과 끝을 평화롭게 느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인지 모른다.
전 세계의 불교성지로 추앙 받는 티벳 땅과 그에게는 정감 어린 곳으로 느껴질 만큼 친숙한 아름다운 고산국 네팔의 분위기를 그는 성긴 시선으로, 그러나 꼭꼭 씹어 ‘박완서식 수다’로 적어 놓았다.
그가 말하는 ‘모독’이란 보이는 대로 느껴 쓴 자신의 이야기를 의미함이 아닐까.
태양을 안고 돌아온 이야기
최수철의 이집트여행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혹과 경이에 사로잡힌 기록이다. 오랜 문명의 발원지이면서 신화 같은 역사를 가진 이집트의 신비는 누구에게도 커다란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 하다.
카이로에서 시작된 그의 기행은 정돈되지 않은 유물에서 느낀 혼돈으로 시작했다. 영혼불멸과 사후세계가 물질적인 집착과 어떤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이해는 겸허한 여행자가 아니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신선한 해석이다.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사막으로 잡아끄는 도시들-멤피스, 룩소스, 테베와 네크로폴리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머물러 돌아온 한달 여정의 끝에서 그는 이집트인들의 현재와 그 속에 위풍 당당히 선 역사의 힘에 깊이 끌려 그들의 태양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노라고 쓰고 있다.
도냐 끼호타와 판자의 재미난 모험여행
한 시인이 중학생 딸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값싼 항공권 덕에 28시간이나 걸린 ‘공중철마'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던 그녀는 중세 기사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마침내 ‘돌아'버린 ‘돈끼호테'를 떠올렸다가 그처럼 ‘도냐 끼호타’라고 자신의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린 딸을 ‘판쵸'아닌 ‘판자'로 삼아 여행을 시작한다.
도냐 끼호다의 스페인은 가만히 있는 적이 한번도 없다. 가우디의 아파트, 고야와 피카소의 그림, 플라맹고, 알타미라 동굴, 거기다 열정적인 거리의 연인들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스페인의 얼굴들이 불쑥불쑥 솟아 그녀와 판자를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귀신 들'게 만들어 버린다.
그 ‘스페인의 태양과 끓어오르던’ 풍경들 때문에 결국 도냐 끼호다는 ‘머리를 산발'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인 김혜순의 여행기, <들끓는 사랑>-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이 엉뚱한 가이드는 종횡무진 재미 가득한 모험여행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 네 권의 책은 작가들의 글만큼이나 생생한 사진들이 읽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끌면서, 대륙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실크로드로 시작해 티벳과 네팔을 지나 이집트 사막의 바람과 함께 스페인의 열정을 느끼는 색다른 여정으로 안내한다. 각기 다른 정서와 눈으로 적어간 여행기들은 훌쩍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짧은 경구를 들려준다, 여행의 감동이란 그 감동을 준비한 사람의 몫이라고.
<서역의 달은 서쪽으로 흘러간다/김영현>, <모독(모독)/박완서>,
<사막의 태양/최수철>, <들끓는 사랑/김혜순>.
출 판 사 : 학 고 재
그림 속으로 들어간 유럽 미술관|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1,2/이주헌/학고재
미술관은 우리에겐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장소다. 대중적일 수 있는 곳이지만 대중들이 선택하지 않는다. 미술관이 없이 철철이 바뀌는 전시장이나, 고증자료의 무게로 박물관에 자리한 옛 그림들의 구경꾼이기가 십상인 우리들의 미술관 이미지는 중세유럽의 성당 같은, 아름답고 견고한 외장으로 기억되는 `건물’ 같다.
이주헌이라는 미술평론가는 그런 우리의 손을 잡고 거리를 좁혀 박물관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림을 보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이제 그림만을 생각하는 직업을 가진 그는 50일 동안 부지런히 유럽 박물관을 돌면서 감상을 즐긴다. .
그는 출발에 앞서 ‘유럽의 주요 미술관을 일목요연하게 개괄한 뒤 한 사람의 한국인 미술평론가로서 유럽미술의 특질을 주체적 시각으로 조망’했음을 큰소리로 밝히고, ‘우리의 감성과 언어로 해석해 보려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미술관에 들어서는 그는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는 좀 다른 냄새를 풍기려고 한다.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 뒤에 ‘관능의 그림자’를 달아 제목으로 붙여놓더니, 대영 박물관에서는 혼백들과 대화를 나누는 척 한다. 의도가 빤히 보이건 말 건을 떠나 같은 얘기라도 재미있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은 태를 확실히 낸다. 따라다니는 사람으로서는 공감을 안 하더라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얘기들이다.
이주헌은 감탄을 잘한다. 여행을 다니는 누구나 감탄이 쉽지만 그의 것은 느낌표가 요란하게 따라붙지도 않고, 또 논리적이다. 그래서 수도 없이 ‘최고의 작가’를 거론하고 `천재’를 들먹거려도,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지금껏 이름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작가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가 정리한 ‘사람은 경험을 최고로 신뢰하되 그 경험도 근본적으로는 그의 지력에 크게 영향 받는다’는 명제가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와 ‘백문이 불여일견’을 합친 것인데, 원래의 것보다 표현은 좀 복잡해졌지만 생각의 단계는 더 짧게 정리가 된다. .
그래서 그는 아는 것이 모자라는 우리들에게 피카소의 어록을 보여주며 특이함 이상이 아니었던 피카소가 천재였다는 데에 동의하게 만들고 '뒤러'라는 작가가 그린 어느 독일인의 초상에서 '이항복의 초상'이 주던 느낌을 잡아 시대의 격변이라는 비슷한 느낌을 잡아내게도 한다. 이렇게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여러 미술관의 그림들은 그의 조단조단한 얘기들과 함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이런 부분들이 그가 문두에서 밝힌 시선에 대한 결심이 반영된 부분일 것이다. 많은 숫자가 번역서인 서양 미술관계사를 통해 ‘여지껏 남의 눈으로 유럽미술을 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이주헌은 `이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식성대로 판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 만큼은 주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마음먹고 보편성이라는 아주 도량이 넓은 그릇에 기대어 그림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보다 그림을 통해 작가의 영혼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도 아마 공감에서 오는 이해가 보편성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주헌이 밝히는 이 책의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이 책이 ‘가족여행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 분명한 여행의 경우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가장 가까운 인간들 사이의 팀웍 다지기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면서 ‘함께 곤경을 겪고 함께 격려하고 같은 목표를 나누다 보면 가족 간의 이해와 유대는 더욱 돈독해 질 수밖에 없다’고, 최근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오는 테마여행겸 가족여행을 아주 실속 있게 다녀온 한 사람으로서 멋진 소감을 밝힌다.
가족들이 함께 갖는 여행이야기가 간간이 끼어 들어 좀 더 편안히 유명작품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은 마치 미술관이 그대로 화폭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처음에 그가 일러준 대로 그 화폭을 들여다보면 이 책을 덮을 무렵 그의 아들 ‘땡이’처럼 ‘무용화가’를 꿈꾸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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