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애인 정성일

정성일의 책 발간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랜만에 그의 글을 읽었다, 열 시간 여에 걸쳐.
공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라는 이외수의 광고에 심히 공감하던 나로선
내 엉덩이의 능력에 희망이 생기기도 하는 순간이다^^

두뇌와 심장은 거리 만큼이나 독립적이라고 믿던 시절에
그의 평론은 어느 순간 이별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화제작현장이 아닌 평론가를 목표로 삼게까지 만들었던 그의 파워는
처음에 강렬했던 만큼
곧 지치게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과연 영화를 보며 울거나 웃기는 할까?
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고별사였다.
내게 시청각적인 자극-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뭘 예술이라 불러야할 지 아직 결정을 못했기에-이란
심장의 영역이었기에.

긴 단절기를 지나고
그 동안, 그의 인용습관과 어려운 어휘들만 쉽게 베끼고 있는
감동도, 자극도, 성의도 없는 프로들의 글에 지치기도 한 와중에
그의 글에 다시금 흥미가 생겼다.
길고 복잡한 그의 글은 여전한데
전처럼 지치지 않는다.
내가 정성일만큼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였음을 알고 나니
그의 열렬한 애정행각이
많은 깨달음을 준다.

씨네21에 정윤철감독과의 대화가 실려있었는데 그 중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많이 등장했다.
엉덩이 능력확인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터뷰. 정성일도 정성일 이지만 정윤철도 대단하다.
임시 스토킹이라도 한 듯 별얘기가 다나온다. 게다가 읽기 좋은 글솜씨까지.
이렇듯 성의를 다하는데 어찌 보는 즐거움이 없을소냐...)

정윤철: '키노' 마지막 호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가들에 관한 글을 쓰며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하지만 영화가 어렵고 위대하다고 하여 그걸 해석하는 글조차 어려울 필요가 있는지.

정성일: 거기에 관해선 항상 인용하는 아도르노를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점점 사고를 마비시키고 논리 자체를 무시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내 글을 읽는 것은 사유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아도르노처럼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그 태도는 배우고 싶다.

이 대목은 내가 정성일 읽기를 포기하던 무렵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지금은 납득이 되는 열애자의 충고.

정윤철: 질문을 마저 하자면 결국 비평도 대중성과 심도있는 분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가. 그런 시대도 이미 끝난 건가?

정성일: 나는 영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문제를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상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말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껴안는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나아가던 시대는 영화의 고전주의시대였다(3,40년대). 예를 들면 우리는 고전주의 회화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통과하며 그림에서 형상이 부서졌고, 그림은 보는 이에게 교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고 고전주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퇴행이다.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 100년이라는 역사를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는가. 영화도 관객에게 교양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네마테크적인 경험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게으르게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를 원시적인 상태로 돌려보내는 거다. 영화는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했고, 이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을 왜 퇴행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감독들이 왜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퇴행을 바라보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는 쪽이다.


아마 이 대목이 내가 지금 정성일의 글을 다시 읽고 싶어진 이유인 것 같다.

너도나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게 된 이 시점에
하필 평론가 혹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함량미달이 두드러지는 모순된 상황에서
지금이 90년대의 반발이고 곧 이 상황에 대한 반발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그의 예언(기대?)이
내게도 희망적으로 들린다.
사실 그래.
망해 고꾸라질 것 같은데 어떻게 잘들 꾸려나가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참 멋지기도 하다.

그리하여....정성일의 평론집을 향한다.
벌써 2쇄라는 걸 보니 역시 난, 은근 유행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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