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


뒤늦게 본 덕에 1, 2편을 연달아 볼 수 있었다.
송두율이라는 인물에 대한 대한민국적 정의에 대한 물음표였던 1편에 비해
2편의 파장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컸다.
그 합리적인 논지에도 불구하고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이런 논의의 장이 될만한 곳인가 라는 회의가 먼저 들었기 때문에
내내 우울했다.
팔다리를 다 자르고서도 온전히 정체성을 지킬 수 없었던
송두율은 지금도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경계인이란 거리두기가 가능한 위치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과연 그 고통을 안겨준 대상을 끌어안을만큼의 넉넉한 사유를
지금도 할 수 있을까.

힘있는 자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그 불합리함을 유지하기 위해 정해놓은 것이라는
우울한 법의 정의를 다시 보는 것보다
태생부터 합의일 수 없었던 규칙조차도
막연한 공포로 맹목하는 순진한 사람들의 모습이 섬뜩했다는 것이 더 충격이다.

도둑을 막기위한 법을 만든다 치자.
이상적이면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은 도둑질하지 않고도 먹고 살도록
사회의 기반을 닦는 것이지만
세상 어디서나 가장 먼저 나오는 법은 처벌에 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효과도 그렇지만 제일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방을 위해 격리를 시도한다.
도둑의 이웃, 도둑이 잘 다니는 곳을 자주 다니는 사람, 도둑의 활동지역에 나타난 사람,
도둑과 비밀얘기를 나누는 사람.
행동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간단한 원칙은
이러한 감정적인 의심속에 묻힌다.
왜 그런데서 얼쩡거렸냐는 비난은 필수양념.

전쟁에 치를 떠는 애국자들이
호전적이지 않은 대북자세마다 제동을 거는 것,
이산가족 상봉에 저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
이산가족 말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통일이 아직 국시라는 것.
이 혼란스러운 마당에 이런 영화를 찍는 사람이 있다는 것.
다이나믹 코리아...다...
이미 자멸해버린 실패한 체제이자,
이제는 교과서속에서 학문으로도 대접 못받는 공산주의가
뭐가 그렇게도 위협적이라는 걸까.
공산당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그만큼 자신없음을 고백하는 촌스러운 반쪽 민주주의임을
다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37년만의 방문을 앞두고 설레기만 하던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그의 얼굴이 가장 강렬하다.
아버지의 임종도 못지킨 한에도 불구하고 넘치던 자긍심에서
단 몇 달 사이, 균형까지 틀어졌던 그의 얼굴.
몇 년 사이에 관점의 차이로 바뀔 수 있는 사회적 룰이 망친 개인의 삶이라서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관점이 이어져 그의 낙인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낙인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있는 정의는 살아있었을 것 같다.
그것을 누군가의 인생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으로 배우게 된다는 것이
아직은 잔인한 우리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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