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미겔 데 우나무노


에로티시즘과 형이상학은 동시에 발전한다. 종교는 전투적이며, 형이상학은 에로틱하고 관능적이다. 인간을 전투적이고 호전적이게 만드는 것이 종교성이거나 아니면 인간을 종교적이게 만드는 것이 전투성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형이상학적 본능이다. 결국 이 원죄가 인간을 관능적이게 만들었고, 이브처럼 선악을 알려는 열망인 형이상학적 본능을 일깨운 것 또한 이 관능성이다. 그 후에 전투성의 관능성에서 탄생한 종교의 형이상학, 즉 신비주의가 나타났다//아테네의 창녀 테오도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리를 탄생시키는 산파술을 개발한 소크라테스의 진리 탐구 방법에 열광하여 그에게 자신의 중매쟁이가 되어 남자 사냥을 도와달라고 했다(그리스어 교수인 우나무노선생님에 따르면 테오도타의 남자는 사냥의 동반자인 신테라테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창녀 태오도타와 산파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철학이 상당 부분에서 매춘업이며 매춘업 역시 철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두 직업 사이의 내적인 연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빅토르 고티의 서문
 
여행에 대한 편집증은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누군가가 발견한 장소에 대한 혐오에서 유래한다. 수많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새로운 장소로 계속해서 옮겨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도착한 장소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는 사람이다.
 
그 눈물은 육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야. 내 영혼으로부터 나왔지. 영혼은 단지 눈물 속에서만 드러나는 샘 같은 것이야. 진정으로 울어야 영혼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를 알 수 있어.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현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이 모든 것은 신 아니면 누군가의 꿈은 아닌가? 그래서 그가 깨자마자 사라져버릴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잠들게 하고 꿈을 꾸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기도하고 찬미의 노래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종교의 모든 예배의식은 신이 깨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꿈꾸도록 하기 위한 방식은 아닌가?
 
-그래, 거기에 바로 최대의 무례가 있단 말이야. 그것은 내게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왔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그것은 그의 본의가 아니야. 그는 원래 딴 데 정신을 잘 팔거든.
-최대의 무례는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무례 중의  무례는 사람 앞에서 딴 데 정신을 파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면, 처음에는 자기 부인의 몸을 만지려면 투정을 해야지만 육체적 욕망이 불타오른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서로 익숙해지면 부인의 맨 허벅지를 만지는 것이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고 무감각해지는 날이 온다는 거야. 물론 자기 부인의 허벅지를 떼어낸다고 하면 자신의 살을 잘라내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도 바로 그때지.
 
넓이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깊이로 잃게 된다/파파리고풀로스
 
생각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지. 단지 의심하는 것일 뿐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도 믿고 알고 상상할 수 있지. 신앙, 지식, 상상 어느 것도 의심을 전제로 하지 않아. 의심이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때까지는 말이야. 그러나 의심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어. 의심은 정적이고 고요하고 생기 없는 신앙과 지식을 역동적이고 깨어있는 생생한 것으로 만들어.
 
이미 다른 사람을 죽였는데 무엇 때문에 자살하겠습니까? 자살한 사람들은 대부분 좌절당한 살인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인 겁니다.       
 
“나는 인간이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기이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요.”라고 어느 고대 로마의 희극배우는 말하였다. 그러나 나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나는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게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는 추상명사의 ‘인간성’만큼이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적’이거나 ‘인간성’이거나 단순한 형용사거나 명사화된 형용사는 어디까지나 전부 애매한 것들이고, 구체성을 띤 명사는 오직 하나 뿐인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것 말이다. 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 말이다.
 
여기서 우나무노는 인간이 지속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하나는 동물들처럼 자식을 통해 자신의 어떤 모습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여호와가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제물은 거부한 이유는 선택의 기준이 제사하는 자의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자의 인격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인은 아벨을 질투하고 축인다. 이 이야기를 우나무노는 인류의 기원에서 인격과 재현의 싸움으로 본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보존과 재생산이라는 물리적, 물질적인 요구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무대에서 생존하고 영원성을 획득하려는 재현에 관계된 심리적, 정신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말하자면 인간의 역사는 물리적 사물이 아닌 기억과 재현 가능성의 역사로 구성되는 것이다.
 
너 자신은 너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실현되어진 연속이고
타인들은 지상에서의 너의 불멸일 것이다.
<어떤 무덤에 있는 비문> 보르헤스

 
'소셜'이라는 특이한 형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잠언록.
인물들의 사색을 똑같은 길로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세상을 얇게 저며 바라보았던
어느 꼼꼼한 철학자의 빽빽한 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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