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우의 1S1B]박경리 선생의 '한'과 꼴찌팀 팬의 '삶' | |||
입력 : 2008-05-13 11:02:12 | |||
얼마전 세상을 등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는 특집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됐다. 선생은 한(恨)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한(恨)을 한때는 퇴영적인 국민정서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일본은 한을 '우라미'라고 하는데 우라미는 원망이에요. 원망이 뭐냐, 복수로 가는 거예요. 일본의 원망이나 복수가 일본 예술 전반에 피비린내로써 나타나는 겁니다.복수고, 그게 어디로 가냐면 일본의 군국주의로 가요. 우리의 한(恨)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내가 너무 없는 것이 한이 되어서... 말하자면, 내가 뼈가 빠지게 일해서 땅을 샀다. 내가 무식한 것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것이 너무나 한이 되어서 내 자식은 공부시켰다. '미래지향'이거든요. 소망이거든요. 이게 절대로 퇴영적인, 부정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박경리 선생은 자신의 삶과 문학을 통해 이런 정서를 널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뒤늦은 깨달음과 무지가 부끄러워졌다. 그러다 최근 야구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관중들이 가득찬 야구장은 전에 없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관계자들이 놀랄 정도로 최근의 야구장은 많은 관중들로 넘쳐난다. 이런 저런 분석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그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 효과다. 이젠 부산의 명물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은 사직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KIA 팬들로 이어졌고 이젠 전국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두 팀은 최근 몇년간 가장 허약한 팀이었다. 사이좋게(?)꼴찌를 나눠가졌던 팀들이다. 꼴찌팀 팬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응어리를 안고 산다. '그저 공놀이일 뿐'이라며 자조를 해봐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처참한 패배는 저절로 고개를 떨구게 한다. 아무일 없다는 듯 반복되며 돌아가는 일상은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한다. 더 괴로운 것은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얼마 전 현재 꼴찌인 LG의 한 팬은 홈페이지에 "차라리 프로야구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겼다. 글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웃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느 노래 제목처럼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움직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스스로 신문지를 찢고 쓰레기 봉투를 머리에 두르고 꽃가루를 뿌리며 야구장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선수가 포기하지 않으면 팬들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목놓아 외쳤다. '깨어나라 투혼의 타이거즈'라고 크게 써 기 죽은 선수들에게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맞서라고 부탁했다. 한(恨)이 갖고 있는 미래지향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어두운 곳 어딘가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운동장의 스탠드에 서서 "내일은 이길 수 있다"고 외치는 마음.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간절한 소망이 하나 하나 모아져 5월의 프로야구를 한껏 달아오르게 한 것이 아닐까. 프로야구는 승부의 세계다. 누군가의 웃음은 누군가의 눈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자칫 증오와 분노가 환희의 반대편에 서서 살벌함만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야구팬들은 이런 어둠을 당당하게 뚫고 나왔다. 정말 멋들어진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이 우리네 정서인 것이 요즘처럼 자랑스러운 적이 없다. *덧붙이기 : 한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구단이나 KBO가 지금의 열기를 잘못 해석해 만족하고 안주하면 어쩌나 하는 점이다. 분명 최근의 열풍은 팬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전보다 관전하기 좋아져서가 결코 아니다. 현실은 고달퍼도 미래의 희망을 위해, 좀 더 나아질거란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구단과 KBO도 미래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또 한번 증오보다 무서운 외면을 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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