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최인훈


믿음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려고, 힘껏 산다, 때의 한점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수없이 고꾸라져서 수없이 정강이를 벗기더라도 말쑥한 정강이를 가지고 늙느니보다는 낫다...
 
그는 그녀들의 참하게 빗은 머리며, 아른 아른 윤나는 손톱을 보면서, 씨가 다른 짐승을 맞는 느낌이다.
 
그는 밀실에만은 한 떨기 백합을 마련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마지막 숨을 구멍이기 때문이지요....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깐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을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시절을 조금 타는 구나, 이 책은.
하지만 샘플로서 이명준은 어디서고 몇번이고 변형될 것이니 역시 대단한 소설.
문학과지성사에서 89년에 찍은 책의 맨앞에는 76년판 서문이 붙어있다. 한자어를 고치려 노력했다는 이 개정판을 읽고보니 세종대왕 뵙기 챙피한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문학적 표현에 집착해서 화려하게 고친 것도 아니고 그저 풀어썼을 뿐인데 여러 번 되짚어 읽고 있다니.
이런 증세의 원인이 `교양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을 표준말로 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표준말의 개념을 잡던 시절의 `교양있는 서울사람들`은 꼭 일본유학파가 아니더라도 문자깨나 쓰던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 중에 한자어가 이렇게나 많은 게 그때문이 아닐까. 방방곡곡의 순우리말들을 모아서 제대로 쓰기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암튼 최선생께도 죄송하고 세종대왕께도 죄송한 노릇.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