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알랭드보통|Status Anxiety|Alain de Botton

불안...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만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자제와 구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s.nob)을 적어 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멍청한 아첨군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권력이나 명성때문에 당신을 사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밑바닥에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는 증거다...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으로는 자아와 아무련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자존심= 이룬 것 /내세운 것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루소의 주장은...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ㅎㅎ 귀엽고도 현실적인 해결책...인가^^)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시느이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라브뤼예르 La Bruyere, 1645-1696)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La Rochefoucauld, 1613-1680)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La Bruyere, 1645-1696)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시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Machiavelli, 1469-1527)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ATM은 1968년에 개발되었으며, 다음해에 맨해튼의 케미컬뱅크 지사의 벽에 구멍을 뚫고 처음 설치되었다. 10년 뒤 세상의 ATM숫자는 5만대로 늘어났으며, 2000년에는 백만대로 늘어났다...ATM한 대는 무려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한다(게다가 병드는 일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 Parenga und Paralipomena, 185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거기에서 (직접적이든 아니든)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세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ㅡ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은 다시 잡아주려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아마르티아(Hamartia),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에서 가장 끔찍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즉 운명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을 감상한 뒤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결과다. 비극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 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교육에서든 경제에서든 진정한 자격이 있는 후보를 뽑아 패자들의 고통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는 체제를 바라는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근면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열의가 있고, 신속하고, 조직적이고, 분별력이 있고,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고 무지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전히 어리석고, 완전히 지혜롭고, 게으르고, 무모하고, 겸손하고, 사려깊고, 둔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상할 수 없게 충동적으로 사악한 모습을 보이고, 꼴사나운 악당이고, 드러난 도둑이자 완벽하게 자비롭고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다."
존 러스킨, 이 최후의 사람에게 Unto This Last, 1862 하하하....

돈과 선,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 몸이 보통 알고 있어 염분이 필요하면 훈제생선으로 향하고 혈당이 낮으면 복숭아로 향하듯이 정신도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할지 잘 알고 있어 우리를 어떤 일이나 기획으로 자연스럽게 몰고 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수록 제품과 용역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이다. 루소는 우선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전제한다. 우리 영혼은 만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대로 말하는 경우가 드물며, 어설프게 말을 한다 해도 근거가 박약하거나 모순될 가능성이 옾다. 건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소비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같지만 루소는 몸도 물이 필요할 때 술을 찾고, 침대에 누워있어야할 때 춤을 찾는 것처럼 정신도 모순된 요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다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하다.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파괴의 힘은 기껏해야 저지하는 정도이지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지만, 몇 년 정도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원시의 용액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이런 소멸의 전망에 위로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 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광대한 풍경 역시...

우리의 약점에는 늘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공포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아이로 그려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공감과 너그러움을 쉽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은 나쁘다기보다는 짓궂다고 하고, 오만하다고 하기보다는 건방지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을 미워하기 어렵듯이 어린아이를 미워하기는 어렵다.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훌륭할 때에도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다. 그냥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 괜찮은 운명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보헤미안 시인은 기독교의 순례자처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고 무시 자체가 무시당하는 자의 우월성의 증거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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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의 짧은 연설에는 책 한권이 다 들어있었던 거였다.
달변가 이기도 한 알랭 드 보통.
철학의 끝이 소박한 사람의 진리와 닿아있다는 강변이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져 든든하다.
살아가기의 깔깔함이
살아가는 것 자체보다는
'다른 채 견디기'라는 것
작대기 하나를 더 그어주는 책이지만
너무나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의 얘기에 귀기울여진다.
꿈틀거려지는 것도 같고 말야...
어차피 이런 주장은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만 찾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

삶에서 부대끼는 사회적인 환경 중에서
불안의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놓고
해결책을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아로 나누어 써가는 가운데
가장 큰 공감은 예술, 그 중에서도 비극의 역할부분이었다.
얼마 전 오이디푸스를 보며 느꼈던 세익스피어에 대한 궁금증 해소랄까.
그래서 그는 위대한 작가로군요.
그래서 예술이 아름다움의 세계인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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