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미남배우의 계보는 신성일-이영하로 시작된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 달리, 이 두 배우의 전성기는 직접 보질 못했는데,
내가 TV드라마를 훔쳐보기 시작할 무렵에는 노주현-한진희의 투탑이
화면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세자매라는 드라마도
투탑 남자배우들과 트로이카를 이루던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 중 두 명이 나왔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는 사람은 막내딸 이었던 정소녀 뿐이다.
임성민은 그때 어느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터로 처음 등장했다.
연기력을 볼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배역이었던 데다가,
정소녀를 짝사랑하는-또는 정소녀가 짝사랑 하는-벙어리 청년.
당시만 해도 그 정도로 훤칠한 키에 완벽한 마스크를 가진 배우는 하나도 없었기에
임성민은 그 단역으로도 눈에 띄었다.
열심히 TV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지만 이 잘생긴 남자는 한동안 보이질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대를 갔었던 것이었는데 제대 이후 임성민의 화려한 비상이 시작되었다.
웬만한 로맨스, 멜로물의 주인공은 거의 다 임성민 이었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커플은 임성민-김미숙 커플이었는데,
은빛여울과 사랑의 굴레는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좀 난다.
임성민의 연기스타일의 독특한 점은 대사에 있었다.
특유의 ‘-하오’체를 사용하는 그의 말투는
사춘기 때 열심히 읽어대던 하이틴로맨스의 남자주인공들을 연상시켰는데,
그런 말투는 다른 남자배우들의 입에서는 별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통하면 신비감과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배역은 늘 유능한 남자였고 직업도 거의 사업가가 많았다.
보스보다는 실력 있는 참모, 그러니까 물려받은 재산 같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하는 그런 남자였다.
물론 늘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하기야, 개천에서 난 용이야말로 유능함의 최고봉이 될 수 있겠지만,
여자들이 바라는 임성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고생에 찌들어 팍팍한 심성을 갖거나 야심에 눈이 먼 출세지향형 인간이어서는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럽고 이해심 많은 이상형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기에
아마도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겠지.
한정된 역할만을 맡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연기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의 역할들은 그가 연기함으로 해서 100%이상 매력이 증폭되곤 했으니까.
그건 연기파 배우들의 소름끼치는 연기폭발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만족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아주 가끔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데,
말하자면 임성민은 그런 호감을 주는 매력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필모는 의외로 다양하다.
임성민은 TV문학관에서 주말연속극, 에로영화까지 종횡무진 누볐다.
그가 출연하는 ‘만다라’를 엄마와 같이 본 적이 있는데
엄마가 ‘어머, 저 남자는 머리통도 잘 생겼네’ 하는 덕에 그의 완벽한 외모를 확인한 적도 있다.
그 시절 우리나라 영화의 반 이상이 18금이었기에
-그때는 임권택도 이두용도 신승수도 전부다 에로라 해도 무방할 영화들을 찍었다-
그의 필모도 내가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이 많다.
얼마 전 케이블에서 ‘장사의 꿈’을 봤는데 정말 묘한 느낌이었다.
분명한 주제의 그늘에서 심하게 벗어대는 영화였는데,
아마 요즘 같으면 어느 톱스타도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산해보니 살아있다면 그는 아직도 40대다.
이제는 우리나라 배우들도 전성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미남으로 시작해서 나이 대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의 역사를 만들며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에 대한 자료는 정말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드라마들은 출연작마저도 온전히 알 수가 없으니.
올해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아마 지금쯤이면 임성민의 외동딸도 많이 자랐을 텐데.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도 많은데.
임성민 프로필생일: 1957년 4월 18일
데뷔: 1977 TBC 공채
가족관계: 4남 중 네째, 딸 하나
혈액형: O형
학교: 건국대학교 체육학과 졸업
취미: 낚시
수상경력: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1991) 사의 찬미
1995년 8월, 지병으로 작고
내가 본 그의 출연작
세자매(TBC)벙어리 웨이터역. 검은 바지, 흰 셔츠, 나비넥타이와 동그란 은색쟁반을 들고 우뚝 서 있다가 정소녀가 말을 시키면 열심히 듣는 척하던, 착한 남자였다. 수화를 했던 모습은 기억이 안난다.
푸른 해바라기(KBS)정확한 배역이 생각나지 않는다. 홍요섭과 허윤정이 함께 나왔던 게 맞다면 홍요섭과 친구사이. 아무튼 배종옥이 짝사랑하는 오빠였는데 이게 아마 배종옥의 데뷔작일 것이다. 동그란 귀여운 얼굴로 임성민이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서 고백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은빛여울(KBS)임성민은 까탈스런 방송작가 김미숙과 사랑에 빠지는 기자였다. 김미숙은 드물게 당차고 야무지고 좀 공격적이기도 한 성격이었는데 좀 유들유들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의 임성민과 콩당콩당 연애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꽤 인기가 좋았던 일일드라마. 김미숙이 늘 ‘유바보 기자’라고 불렀던 것도 기억난다.
사랑의 굴레(KBS)고두심의 ‘잘났어, 정말’이라는 유행어와 눈알을 도로록 굴리던 모습이 장안의 화제였던 주말드라마. 임성민은 있는 집안의 유능한 사업가로 가난한 고학생이자 조카의 과외선생인 김미숙을 사랑하게 된다. 나중에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가 될 뻔한 김미숙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기도 하는 헌신적인 모습도 덧붙여졌다. 완벽한 남자주인공의 샘플이었다.
대박.....유튜브에 있었다......
장사의 꿈(1985)앳띤 미모의 술집여자 금보라, 임성민이 호스트로 취직하게 되서 만나는 첫손님 김애경, 임성민의 포주 김영애, 잠시 따라다니며 일한 김인문 등등 호화캐스팅에 빛나는 영화였는데 옛날 영화인데도 노출이 꽤 쎄서 놀라웠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베스트셀러 원작의 영화, 최진실의 캐스팅이 어이었었던, 유오성의 연기가 처음 시선을 끌었던, 그리고 드물게 아직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그의 영화.
사랑과 결혼(MBC, 1995)임성민의 유작이 된 드라마. 지금도 그 이름들이 짱짱한 김희애, 김혜수, 이영애의 사랑을 동시에 받던 유능한 회사실장으로 나왔다. 원래는 김희애와 연결되는 스토리였다는데 임성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손창민이 대타기용 되었다.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김희애와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지만 선을 봐서 김호진과 결혼하는 김혜수, 이 남자 저 남자 고르다가 다루기 까다로운 남자 송병준을 만나서 결혼하는 이영애 등등 스토리도 재미있었던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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