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 두 달|카렐 차페크|펜연필독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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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를 들썩이게 만드는 3월의 꽃들

정원가의 열 두 달.
제목에 충실하게 1월 흙을 준비하는 분주한 마음부터 12월까지
마음 만은 한 시도 한가할 틈이 없는 정원가의 우당탕한 분주함이 그려진다. 
정말 그려진다는 표현이상으로는 쓸 수 없을 정도로 
카렐 차페크는 온갖 퇴비종류를 소개할 때나 
겨울에 이미 봄을 당겨오는 이른 꽃들에 대해 쓸 때도 
마치 음악을 타듯 
흥분한 정원가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있는 지가 충분히 상상 되도록 쓰고 있다.

1월
하지만 이토록 까탈스러운 날씨를 단번에 뒤바꿀 수 있는 비법이 존재한다. 예컨대 '내일은 옷장에서 가장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어야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기온이 오른다. 친구들과 스키장에 갈 계획을 세워보라.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씨앗
모든 식물은 씨앗 아래 부분에서 움튼 다음, 씨앗을 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고개를 밀어 올린다. 머리에 엄마를 이고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라. 자연의 신비다. 

2월
낮에는 꽃망울을 덤불 밖으로 살살 꼬여내어선 밤이 되면 얼려 죽이고, 당신을 한껏 유혹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얼간이 취급을 하는 게 바로 2월이다. 

가드닝 기술
늦은 오후 정원에 물 세례식을 거행할 때다. 이때 만큼은 위풍당당하리만치 몸을 반듯하게 펴고 서서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진두지휘한다. 

3월
날씨로 인한 지난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매년 또 다시 봄을 맞이하고 꽃을 피워 내고야 마는 정원가들. 그 존재야말로 인간 고유의 낙관주의와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리라.

새싹
우선은 작은 구역을 선택해서 살펴보는 게 좋다. 

4월
5월에는 꽃이 피지만 4월에는 싹이 튼다. 

노동절
당신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노동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며 심신에 이롭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캄파눌라 꽃을 피우기 위해, 범의귀를 무성하게 키워내기 위해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우리가 노동했다는 사실 만을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으로 일구어낸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5월
씨를 뿌리는 경우 모두 쭉정이거나 아니면 모두 닥치는 대로 싹이 트거나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멋진 모종 화분이 160재나 생겼다. 역시 씨를 뿌리는 게 최고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60포기나 되는 엉겅퀴들을 어떻게 감당하지? 빈자리마다 꾸역꾸역 채워 심었지만 그래도 130포기가 남았다. 뭐라고요? 이렇게 애지중지 길렀는데 어떻게 내버리란 말씀입니까? "이보게, 시르시움 좀 얻어가지 않겠나? 정원에 심으면 아주 멋져!" "아, 좋지." 고맙게도 이웃이 30포기를 가져갔다. 이제 그 이웃이 골머리를 싸맬 차례다. 그는 정원을 돌아보면 고민에 빠진다. 아, 건넛집이랑 아랫집에 좀 떠넘기면 되겠다. 

단비
우아하고 사뿐하게 내려 단 한 방울도 헛되이 흘러넘치지 않는다. 

6월
정원가들은 광인처럼 머리를 흩날리며 정원으로 뛰쳐나간다. 물론 이는 낭만적인 시인처럼 자연에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분노를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채소밭 정원가들
물론 농부의 삶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매일 혼자서 무 120개씩을 먹어 치워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족 누구도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월
다시 말하지만, 비가 와야 된다. 

식물학챕터
가령 철도 관련 지역에서는 식물이 매우 번창하는 반면, 우체국이나 전신국은 식물의 불모지다. 또 관공서보단 개인 사무실이 식물학적으로 훨씬 비옥한 편이며. 관공서 중에서도 특히 세무서는 완벽한 사막이다. 

8월
한 해는 언제나 봄이고,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며, 꽃은 언제고 핀다……주머니에 손 넣고 있는 자들이나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법이다. 일 년 열두 달 심지어 11월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들은 가을을 모른다. 찬란한 여름만이 계속될 뿐이다……일 년이란 무척 긴 시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법이라네.

선인장 키우는 사람들
종파주의의 핵심은 그것이 열정이 아닌 열정적인 믿음에 의해 유지된다는 데 있다……선인장쟁이들에겐 진정한 선인장 흙을 만드는 놀라운 비법이 존재하는데, 차바퀴로 깔아 뭉개며 위협해도 절대 그 비법을 누설하지 않는다. 

9월
무엇보다 9월은 ‘땅이 새로이 열리는 달’, 즉 식물을 또 한 번 심을 수 있는 달이다……자기 농원의 토질이 좋다고 말하는 주인은 한 명도 없다. 늘 거름을 제대로 못 주었다느니 물이 부족하다느니 냉해를 입었다느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농원의 꽃이 잘 자란 건 순전히 자신의 노력과 애정 덕분임을 그런 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이 뻣뻣하고 생명 없는 물질이 지닌 적대감과 냉담함이란 게, 생명의 흙이 되길 거부하는 자기 방어의 몸짓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내켜하지 않는 존재를 한 뼘 한 뼘 하고 들어가 그 안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생명(식물이든 인간이든)이 얼마나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고 나면 흙에서 무언가를 앗아가기 보다는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10월
땅을 살살 파보면 엄지손가락 만큼 두툼한 싹눈과 가녀린 새싹, 알알이 여물어가는 구근을 발견하게 된다. ‘봄이 여기 숨어 있네’라는 생각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정원은 언제나 미완의 존재다. 

가을의 아름다움
자연이 선사하는 작물들은 대체로 한 장소에 모이기보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좁은 길들을 따라 사방팔방 흩어진다. 하지만 사탕무는 하나의 줄기를 이루며 가까운 기차역이나 설탕공장을 향해 흘러간다. 
기하학, 그건 집단의 아름다움이다. 농부들이 쌓아 올린 사탕무 더미는 기념탑처럼 반듯하고 각진 모습이 마치 하나의 건축 작품 같다.    

11월
11월은 흙을 위한 달, 흙을 갈아엎고 일구는 달.
<뿌리 뽑기의 어려움>

겨울잠에 든다는 표현도 사실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 생명이란 영원한 것. 섣불리 끝을 가늠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보라.

마음에 드는 구근을 산 다음 이웃 정원가에게서 질 좋은 퇴비 한 자루를 얻어 온다. 다락과 옥상을 뒤져 화분이란 화분은 다 꺼낸다. 화분 하나에 구근 하나씩을 심는다. 어쩌지, 아직 구근이 남아있는데 화분이 모자란다. 화분을 더 사왔더니 이제는 구근이 모자란다. 멈추자니 화분과 흙이 너무 많이 남았다. 구근을 조금 더 사왔더니 흙이 살짝 모자란 듯 하다. 한 포대 더 사오지 뭐. 슬슬 예상했겠지만, 이번에는 흙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 화분과 구근을 더 사와야겠다. 
—-이 무한 반복은 항상 '모자라지 않게' ‘너무 많이’ 남도록 준비한다는 게 포인트^^

준비
너무 바쁜 나머지 위를 향해 자라는 걸 잠시 보류한 상태라고 보는 게 훨씬 정확하다. 다들 소매를 걷어붙인 채 있는 힘껏 발 밑을 파내려가며 아래를 향해 자라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라고 있다. 

12월
이제 정원이 눈밭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정원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 하나를 기억해낸다. 바로 정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정원가로 살아간다는 것
레바논 삼나무는 높이 100미터에 10-20미터 굵기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한다…하지만 이제 겨우 그 나무는 25센티미터 자랐을 뿐이다. 그렇다,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들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해마다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원의 열두 달이 아니라 정원가의 열두 달 이어서 였는지, 
정원 안 식물들의 경이로움 보다는 난리법석인 정원가의 속마음이 더 흥미롭다. 
긍정에너지의 기원을 
법석이는 열 두달을 매년 반복하는 정원가의 숙명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카렐 차페크의 암석정원 예찬은 틈만 나면 등장해서 
게으른 영세 채소화분가인 나조차 
나중에 한 번?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을 쌓아 만든다는 암석정원은 이름만큼 거창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상상 만으로도 작은 산의 미니어처가 그려지고 
아주 작은 땅에도 가능할 것 같다.

변함없이 무식하고 무심하게 
가끔 들여다나 보는 채소화분가에게도
아낌 없이 새싹의 귀여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땅과 씨앗의 신비는 
인심이 넉넉하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심은 씨가 그냥 거름으로 끝나서 상추 살 때마다 생각났던 기억도 있고
그 작은 한 톨이 쑥쑥 자라 루꼴라 꽃나무가 된 것도 봤고
마구마구 싹이 터서 쑥대밭 같은 상추를 뜯어먹어도 봤고
바질이 넘쳐 나서 파스타를 만들다 못해 쌈장 찍어서 먹어치운 적도 있다보니
나랑은 비교도 안되게 바쁜 열두 달을 보내는 정원가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물 줬더니 바로 비가 내리는 오늘 같은 날
정원가라면 무슨 충고를 해줄까 싶어 6월을 다시 보니...
자연의 분노에 대비하라-언제 어디나 들어맞는 정원가의 지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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