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Tangled|2010

라푼젤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빠져서
라푼젤은 근본없는(^^) 공주로 재탄생ㅋ


공주가 왕자도 아닌 도둑을 개과천선시켜 결혼하는 건 희망적인데
아무리 도둑년이라도 나름 선물사러 먼 길도 떠나주는 엄마였는데
잃어버린 시간에는 등까지 띄워주면서 
함께 보낸 시간에 너무도 무신경한 이야기.
니 잘못은 아니었으니 
친부모랑 애인이랑 잘살아.
그냥 나만 재미없었으면 되지, 뭐.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Come Rain, Come Shine|2011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알랭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을 때처럼
어떤 순간의 맨 앞자리로 끌어당겨지는 것만 같았던 두시간.
하지만 이 우아한 젊은이들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조용조용 감정을 추스르기에
은밀한 즐거움도 엿보기의 미안함도 느낄 필요 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쳤던 이웃들 정도의 거리랄까.
하지만 어쩐지
연애의 상처는 여자에게 더 깊게 남는다는-딱히 현실적이지도 않은
여성용 두려움 제조기 중 하나인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왜 같은 깊이로, 같은 너비로 기대하고 바라게 되지 않을까.

'괜찮아'라는 괜찮은 말 한마디가
참 정나미 떨어지는 말임을 금방 깨닫게 해 준 임수정,
현실세계에서는 당연한 피해자인데
영화속에선 평화로운 원인제공자로 변신해 준 현빈.
두 배우의 무한도전.
도전은 성공한 것 같다.
인기와 연기력이 균형잡힌 드문 젊은 배우들이다.

49일|2011


서인정의 눈물이 셋 중 하나이기를 바랬는데
역시 예쁜 이야기 전문가다운 마무리였다.
사실 난 많은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은 사람을 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뭐 꼭 불가능도 아닐 것도 같다.
보통 오지랖이 배신당하는 건
오지랖을 애정이라고 강요해서지
신지현처럼 진심인 경우는 달라야 하는 거니까.

조금 다친 것일뿐
다들 사람이어서 좋았다.
결국 막장드라마가 욕먹어야 하는 것은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라
개연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성실함의 부족때문일 것이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놀라운 이요원.
-나중엔 대사없이도 신지현인지 송이경인지 알아볼 수 있었으니...
인형같은 얼굴에 사랑받는 아이 신지현이 딱이었던 남규리.
-풀메이크업은 너무 했더라만...

실수하고 반성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실은 이런 것이 평범한 세상의 풍경일텐데
너무나 극적인 세상의 자극 때문에
삶의 미각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조미료 맛집음식들에 지친 혀에
집밥같은 드라마였다.
하긴...
집에서도 조미료 쓰긴 쓰겠지만^^

영주.안동


하늘은 좀 흐렸지만 날씨 좋고, 경치 좋고, 쾌적하고 편안했다.
간고등어에 딱히 불만은 없지만
역시 먹는 즐거움이 좀 부실했다는 것이 아쉬움.
원래 영주가 목적지였는데
새벽바람에 출발한 덕에 시간이 남아 안동까지 호기있게 간 덕에
빡쎈 패키지 국내여행 코스.
얼마전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서 부석사 앞 할머니가 파시는
두릅과 취나물도 사들고 왔다.
그런데 뭐 할 줄아는 게 없어 그냥 데쳐서 고추장 찍어먹고 있음^^


부석사 초입의 정원

옛날집의 백미 처마와 문짝들

부석사의 이름을 정했다는 '뜬돌'

 하회마을의 어느 예쁜 집
 하회마을의 어느 예쁜 담
하회마을의 풍성한 장독대

박물관에서 보니 더 특이해 보이던 하회탈
허도령이 턱을 완성못했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턱이 없어 광대가 웃으면 같이 웃고 
광대가 울면 같이 우는 실감 가면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별 기대없이 들어간 박물관인데 
이런 엄청난 성질머리의 주인공을 보다니...
반가왔다^^

불안|알랭드보통|Status Anxiety|Alain de Botton

불안...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만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자제와 구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s.nob)을 적어 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멍청한 아첨군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권력이나 명성때문에 당신을 사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밑바닥에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는 증거다...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으로는 자아와 아무련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자존심= 이룬 것 /내세운 것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루소의 주장은...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ㅎㅎ 귀엽고도 현실적인 해결책...인가^^)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시느이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라브뤼예르 La Bruyere, 1645-1696)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La Rochefoucauld, 1613-1680)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La Bruyere, 1645-1696)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시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Machiavelli, 1469-1527)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ATM은 1968년에 개발되었으며, 다음해에 맨해튼의 케미컬뱅크 지사의 벽에 구멍을 뚫고 처음 설치되었다. 10년 뒤 세상의 ATM숫자는 5만대로 늘어났으며, 2000년에는 백만대로 늘어났다...ATM한 대는 무려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한다(게다가 병드는 일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 Parenga und Paralipomena, 185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거기에서 (직접적이든 아니든)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세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ㅡ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은 다시 잡아주려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아마르티아(Hamartia),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에서 가장 끔찍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즉 운명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을 감상한 뒤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결과다. 비극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 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교육에서든 경제에서든 진정한 자격이 있는 후보를 뽑아 패자들의 고통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는 체제를 바라는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근면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열의가 있고, 신속하고, 조직적이고, 분별력이 있고,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고 무지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전히 어리석고, 완전히 지혜롭고, 게으르고, 무모하고, 겸손하고, 사려깊고, 둔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상할 수 없게 충동적으로 사악한 모습을 보이고, 꼴사나운 악당이고, 드러난 도둑이자 완벽하게 자비롭고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다."
존 러스킨, 이 최후의 사람에게 Unto This Last, 1862 하하하....

돈과 선,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 몸이 보통 알고 있어 염분이 필요하면 훈제생선으로 향하고 혈당이 낮으면 복숭아로 향하듯이 정신도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할지 잘 알고 있어 우리를 어떤 일이나 기획으로 자연스럽게 몰고 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수록 제품과 용역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이다. 루소는 우선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전제한다. 우리 영혼은 만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대로 말하는 경우가 드물며, 어설프게 말을 한다 해도 근거가 박약하거나 모순될 가능성이 옾다. 건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소비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같지만 루소는 몸도 물이 필요할 때 술을 찾고, 침대에 누워있어야할 때 춤을 찾는 것처럼 정신도 모순된 요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다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하다.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파괴의 힘은 기껏해야 저지하는 정도이지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지만, 몇 년 정도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원시의 용액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이런 소멸의 전망에 위로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 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광대한 풍경 역시...

우리의 약점에는 늘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공포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아이로 그려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공감과 너그러움을 쉽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은 나쁘다기보다는 짓궂다고 하고, 오만하다고 하기보다는 건방지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을 미워하기 어렵듯이 어린아이를 미워하기는 어렵다.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훌륭할 때에도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다. 그냥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 괜찮은 운명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보헤미안 시인은 기독교의 순례자처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고 무시 자체가 무시당하는 자의 우월성의 증거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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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의 짧은 연설에는 책 한권이 다 들어있었던 거였다.
달변가 이기도 한 알랭 드 보통.
철학의 끝이 소박한 사람의 진리와 닿아있다는 강변이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져 든든하다.
살아가기의 깔깔함이
살아가는 것 자체보다는
'다른 채 견디기'라는 것
작대기 하나를 더 그어주는 책이지만
너무나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의 얘기에 귀기울여진다.
꿈틀거려지는 것도 같고 말야...
어차피 이런 주장은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만 찾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

삶에서 부대끼는 사회적인 환경 중에서
불안의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놓고
해결책을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아로 나누어 써가는 가운데
가장 큰 공감은 예술, 그 중에서도 비극의 역할부분이었다.
얼마 전 오이디푸스를 보며 느꼈던 세익스피어에 대한 궁금증 해소랄까.
그래서 그는 위대한 작가로군요.
그래서 예술이 아름다움의 세계인 거군요.

이소라, 임재범

오늘의 무한 리플레이, 이소라-No.1

목소리 하나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가수가 몇이나 될까.
이소라는 이소라 니까 칭찬도 이소라고 흉도 이소라였는데
그 이소라가 이제 이름 석자 말고 다른 날개를 추스르는 것 같다.
자기 자신 자체인 사람도 이렇게 성큼 걸어나올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충격이었다.
보아의 No.1은 첫사랑에 바치는 순진한 다짐 같았는데
이소라의 No.1을 듣고 있으면
본적 없는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분명히 보이는 건 안개속의 펄럭이는 치맛자락 같은 것 뿐이고,
아마도 그 영화는 좀 그로테스크할 수도 있겠지만,
서늘하고 무섭고 슬프고 또 아름다운 그런 영화일 것만 같다.
아무 생각없이 듣다가
눈물이 툭.
아마도 가사 없는 부분이 가장 힘차게 내려앉은 노래일거야.



임재범-빈잔

정말, 단지 아파서라면 좋겠다.
여러번의 음이탈에 너무나 힘들어보이는 보컬.
지난 주 1위라는 곡도 꽤 힘겹게 들었었는데......
그런데.
더 나빠 보이는 컨디션에서
그 불안불안함을 임재범이 의욕으로 채우고 있다.
의욕이라기 보다는 간절함이라고 해야할까.
규모가 다른 편곡, 신선함에서 치기가 모두 사라진 진지함.
들려주지 않던 동안의 그의 감성의 자취가 드러나는 소리.
왜 그동안 얍삽한 다른 가수들만큼도
자신의 소리를 아껴 지켜주지 않았는지 원망했는데
잠시 그 원망이 잦아들게 만드는 노래다.
아직도 임재범이 펑크를 안낼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어쩐지 이소라처럼 다른 임재범이 나타나기도 할 것 같다
기대가 된다.

http://media.daum.net/entertain/showcase/singer/mission#47?RIGHT_ENTER=R2

당연한 거겠지만
이 음악들 음악모드가 훨씬 좋다.
컴퓨터 스피커보다야 이어폰 소리라도 훨 나은.


무산일기|The Journals of Musan|2011

무산일기의 감독이자 주연 박정범
보는 내내 다큐멘터리 같은 연기를 펼쳐서
일부러 사투리 어눌한 탈북자를 기용한 줄 알았다.
(욕인지 칭찬인지는 나도 모르겠음)
무산은 승철이 태어나 배고프게 자라다 떠난
함경북도의 지명이랬다.


자본주의만을 표방하지만 실은 계급사회 남한의
새로운 아랫동네를 소개합니다...
세상에 부자들만 있다면 어떤 부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말이 와닿게도
팍팍한 세상안에서도 똑같이
더 만만한 누군가는 어떻게 더 괴롭힘을 받으며
또 어떻게 팍팍한 위안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어디서도 승철은 잘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켜보는 내게 그는 매우 상식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경지에 이르면
사실 그땐 북한출신이건 아니건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계급사회라는 건 맨 위가 아니라면
어느자리나 밟힐 수도 밟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맨 아랫동네에서 조차
승철에게는 언제나 계단 하나가 아래로 더 나있다.

그런 그에게 교회는 건성으로라도 차별하지 않고
짝사랑까지 달래주는 유일한 외출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한다 말하는
무미건조한 이웃보다는
차라리 투박하지만 승철을 구박하며 포기하지 않던 형사가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성가대에 소개되던 때의 환대는
승철에게도 좀 특별했을까.

클로즈업을 하면 털근육이라도 움직여 줄 것 같던
내가 뽑은 이 영화 최고 명연기의 주인공-백구
가격표가 붙여진 상자안에 있다는 건 참 서글프구나


나는 영화속에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 본 그들의 삶.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지루했다.

영화시작의 헌사가 궁금해 찾아본 무산일기 정보 중
공감할 수는 없지만 수긍은 가는 김영진의 무산일기에 대한 찬사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11&article_id=63689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던 감독과의 대화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3&article_id=65637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그게 살아가는 이유라는...
언젠가는 나도 깨닫고 싶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인터뷰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people4&a_id=2011042009460307839

세시봉친구들 콘서트|2011



윤형주가 '50-60대 소녀'들에게 헌사를 바칠 때,
활동년도를 알려줄 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노래들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때도 옛날 노래들인 건 알았지만 좋았던 건 사실.

참하고 조심스럽고 고운,
가사 하나 하나 시같은 노래들을
직접 듣고 있자니
잠시 소박한 휴양림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송창식의 목소리.
트윈폴리오 공연을 준비중이라는데
우정의 귀감 윤형주에겐 미안하지만
난 송창식 개인 콘서트 간절히 원해~!

옥의 티.
대체로 무난하고 재미있기도 한 진행의 이상벽이었지만
전 세계에 난리가 나고 있는 마당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감사하라며 월드컵 박수를 치라니.
갑자기 올드함의 무게가 무겁게 덮쳐왔다.
해외 공연예정이라는데
향수병 걸린 교민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월드컵 박수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손발이 오그라든다.
제발 그런 것 좀 하지 말지.

주최측과 상관없는 옥의 티
교회에서 노래깨나 부르셨을 법한 놀라운 가창력의 소유자가
바로 뒤에 앉았다.
내 귀에 바싹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엄청난 목소리.
죄송하지만, 웨딩케잌까지 따라부를 때는
한번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답니다.
팝송과 송창식의 노래는 모르셔서 천만다행.
안 그랬으면 난
실력파 가스펠가수 데뷔콘서트를 보고 올 뻔 했으니깐.

연극|웃음의 대학|2011

웃음의 대학 오늘의 캐스팅
검열관 송영창
작가   정경호


우디앨런의 '브로드웨이를 쏴라'생각한다면 참신함이 좀 빠지겠지만
(영화에서는 말 뿐 아니라 진짜 총살--;;을 시켜버리기도 하니)
뿌리에 닿아있는 직업관과 인간사이의 유대감을 생각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어려운 화두다.
내가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정의롭지 않은 원칙에 순순히 따를 수 있는가.
내가 견뎌낼 수 있다고 해서 저항하지 않아도 되는가.
내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서 옳지 않음에 감사해도 괜찮은가.

모든 저항이 실은 
다수를 위한다고 믿는 소수의 강력한 결단이라고 생각할 때
애초에 그 결단을 내릴만큼 부당함을 느끼지 못하는 소수는 어찌하나.

한계에 도전하는 개인의 노력은 존경 혹은 경외가 되기 마련이지만
정의롭지 못한 것을 놀라운 정신력으로 견디더라도 비겁이 된다.

흔들리지 않고 
결국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는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울 뿐.
신념없이도 속으로는 맘껏 비난하고 있는 개별인생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던 무대.
아니다.
사실 이 연극은 작가의 입장을 강변하고 감싸고 있었으니
옆구리 찔린 나는 지레 찔린 것일터.
어쨌거나
즐거웠던 두 시간.

나를 처음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던 송영창을
연극무대에서 근 20년 만에 봤다.
근엄과 쾌활의 경계를 오가는 모습도 일품이었지만
사실 나는 검열관에 빠져
초반 검열관의 모니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진짜로 공감했다--;;

꽤 옛날 같지만 
한때 검열이 신문을 도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현세의 만화를 두고 
외설을 논하는 검열관들의 상상력을 비웃던 시사만화들도 기억이 난다.
검열관이 어마어마하게 공명정대하며 
많은 대본독서 끝에
-사실 그렇게 대본을 읽어대야하는 직업이 얼마나 되겠어,
습작생들의 공부 1단계가 대본읽기라는 걸 생각하면
검열관들이 작가로 전업을 한다는 게
절대 말도 안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1인-
창의적인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해도,
그로 인해
잠재력이 엄청난 새로운 연극 팬 하나가 탄생한다 해도
창작에 반하는 검열관이라는 제도나 직업자체에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어떤식으로든 등급판정 같은 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개인의 역량과 철학이 더 중요할 것 같기도 하다.

어마어마한 화두를 던지면서 웃겨주시는 웃음의 대학.
나중에 다른 캐스팅으로도 한번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