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화려한휴가|2007


눈물은 거의 영화와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발랄하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웃길수록
아, 저렇던 사람들이 다 죽었던 거구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영화의 전개와는 별도로
나의 비겁과 무기력의 기억이 자꾸 동아줄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올라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게 맨 처음의 기억일텐데-
국민학생일 때 학교가는 길에 삐라를 주운 적이 있었다.
노란 삐라에는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고 씌어 있었고
그 아래 핏방울이 떨어지는 큰 칼을 든 전두환이 웃고 있었다.
흑백이라 대단한 그림도 아니었는데 섬뜩했다.
학교에서 삐라를 보면 반드시 내용은 보지 말고 신고하라고 해서
내용은 정말 한 자도 읽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보니 제목은 이미 읽어버린 거다.
그 '종이' 자체가 무서워지기까지 해서 손에 들고 갈 수가 없었던 나는
누가 가방을 뒤져서 나를 잡아갈까봐,
내가 제목을 읽은 걸 알고 잡아갈까봐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그 공포의 기억도 선명하다.
나는 신고 잘하는 복종적인 아이였고,
가방을 함부로 뒤지는 것은 불법인데도,
공포는, 정당한가 아닌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넘어서는 강력한 무엇이라는 걸
생각보다는 몸으로 먼저 실습을 해버렸다.
나중에 정말 가방뒤짐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분노나 항의에 앞서 빨리 보내줬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뒤론 그 비겁과 무기력이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공평한 일이다.
용기있는 사람은 분노할 자격을 얻고 비겁한 사람은 상처받는 것.

난 세상 좋아졌다는 얘기가 참 슬프다.
그건 원래 있었어야 했고 가졌어야 했던 것들인데 없이 살았으니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가끔 내 머릿속에도 세상 좋아졌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프간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보면서도
참 많은 사람들이 사지로 걸어들어간 그들의 목적과 의도를 비난한다.
어차피 '여론'이란 것이 실질적인 구출작전도 아니고,
걱정이건 비난이건 어느 쪽이나
하루 24시간 중 그 납치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단 몇 초도 안될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나 비실용적이고 자기 인생에 별 비중없는 한 마디일 뿐인데도
꼭 피해자를 걸고 넘어진다.
그 속에는 알아서 했었어야지라는 맞아본 놈의 생존법이 깔려있다.
내게도 있으니까 감지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전두환은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이나,
비공식적인 쑥덕거림 속에서는 장세동 같은 충복을 거느린 유능한 카리스마의 군인이며,
부정축재한 재산일망정 단 한 푼도 안 뺏길만큼 잘 숨겨놓은 똑똑한 인물이다.
이런 것들이 너무 싫으면서도 별다른 노력없이 난 또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는다,
정말 싫은 생각은 이해 못하고 싶은데.

이 영화는 태백산맥 같다.
잘됐나 못됐나 보다는 가려져 있던 시간을 정면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라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더 꼼꼼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뒷자리에 앉아 비명과 수다를 끊임 없이 이어가던-아마도-80년대생들 덕에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진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광주의 총격전이 한국전쟁의 총격전이나
더 거슬러 옛날옛적 전쟁하고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전에 만들어진 것.
광주영화니까 광주사람들이 좋다하면 좋은 영화이고,
아는 줄 알았는데 실은 모르던 광주를 '기억'하게 됐으니 내게도 좋은 영화가 되었다.
내년엔 리모콘 지나는 길에 혹 518기념식중계를 보더라도
리모콘이 좀 천천히 지나갈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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