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2021

 

다 되게 특이한 사람들인데 왜 친근하지 ㅋㅋㅋ

할 수 있는데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 혐의선상에서 멀리 있고
나름 사고로 꾸며 다음을 기약하는 두뇌와 
죽일만한 사람들을 처리한다는 나름의 철학.
갑자기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이 생각나면서 
케이를 만나면 잘 통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아마도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발랄한 살인자의 즐거움에 
기겁을 할 것 같다. 

시선을 압도하던 인물들. 

발군의 김혜준.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지 싶은 천진난만한 살인마.
저 몸으로 연쇄살인을 한다고?
싶었지만 그걸 에너지로 상쇄한다. 
제대로 돌면 못할 게 없을 것 같은 젊은 또라이의 호랑이 기운이랄까. 
어딘가 고현정 같은 느낌인데 
김혜준은 거기에 또 묘한 에너지가 더 있다.
이미 보여주고 있지만 앞으로 더 기대주.

어머니 상으로 잘 알려졌지만 
이럴 때 더 빛이 나는 김혜숙.
진짜 한 장면 한 장면 소름이다. 
특히 목욕탕에서 구경이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랑
보리밥집 장면 진짜 더더 소름.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때려 박히는데 
표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던 곽선영은 
놀라운 초면. 

비슷한 분위기의 역할들을 하는 것 같지만
이번에 특히 오밀조밀했던 조현철은 귀여움 폭발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이영애.
사실 초반 구경이는 인물로 환복 중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어색했었는데
결말 쯤 되어서는 정말 구경이로 보였지만 역시 스타는 화장을 포기 못해-아쉽다.
그래도 옛날 드라마 시절 이영애로 돌아온 느낌이라 반가웠다. 

그런데.
드라마의 여운으로 보기 시작한 메이킹에서 오히려 아쉬움을 많이 봤다. 
안전장치도 변변치 않게 위험한 옥상 씬을 찍는 젊은 배우
-와이어를 달아야 한다며 엄청 챙기는 척한 걸 보면 
바닥 안전장치는 없었던 게 분명한데 
결국 뒷모습 장면은 와이어가 없었으니 보는 내가 다 아찔-에 이어
지저분은 했겠지만 별 위험해 보이지 않던 쓰레기장 장면에서 마마님 호위를 한다던가
업고 가느라 고생한 배우를 두고
업히느라 생긴 멍을 걱정하던 연출자를 보는데 
내가 다 빈정이 상했다. 
이렇게 알아서 기어주는 차별적인 분위기에서 
그런 열연들을 했다니 정말 대단한 배우들.

옷소매 붉은 끝동|The Red Sleeve|2022

 

세자 시절 진짜 있었음직도 한 장면 아닐까


궁녀가 왕을 거절하다니 진짜 가도 너무 갔다 싶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고?
급관심에 본 장면이 하필 역클리쉐로 유명해진 바로 서고 되밀기 장면이었다.
이세영의 얼굴 조물락 표정이 귀여워서 보기 시작했다가 전체 보기 시작...
했었던 것 같은데 하이라이트만 본 회가 좀 있고
또 보고 싶기도 해서 전 편 정주행 시작. 

하이라이트 영상에서 빠져있던 부분들에서는 
궁녀들과 홍덕로의 이야기들이 더 꼼꼼하게 담겨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 극 속의 인물들을 찾아보게 됐었다.
물론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러면서 비교가 되니 작가의 선택이 대단하게 보인다. 
어릴 적 같이 자랐다는 얘기가 있고
사실 로맨스물이라면 이것 만큼 절절하기 쉽지 않은데 그걸 버린 것, 
결혼까지 한 왕이 수염이 없고, 
중전은 존재하나 한 번도 등장-거의 언급도-하지 않고 등
화려한 의상을 넘어서는 과감한 선택의 흔적들. 

연애물이니 주인공들이 연애만 이쁘게 해도 볼만한데 
왕으로 궁녀로 직업인의 자세까지 보여주니 
인물은 더 입체적이 된다. 

홍덕로 내치던 장면에서 
홍덕로는 한 번도 아니었냐고 물었지만 
정조는 아무리 기다려도!-라고 답한다. 
홍덕로는 상처받고 
정조는 분노하지만
이것은 두 남성의 실연현장.

덕로와 덕임의 대조.
총애를 믿고 날뛴다고 하기엔 
덕임에겐 총애 없이도 일단 덤벼들던 역사가 있고
덕로는 저지르기 전 믿는 구석을 과시하기도 했으니.
정조의 입장에서는 둘 다 같은 죄이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지만
단 하나의 친구와 
단 하나의 연인을 연달아 날려버린 멘탈 갑 정조.
조선 천지에 아마도 단 하나 뿐이었을
할아버지가 내린 뒤주에 아버지를 잃고
그 할아버지 밑에서 
엄마가 엄마보다 어린 할머니 눈치 보는 것을 보고 자랐는데
온전하게 사랑할 줄 알다니
정조가 천재인 것은 맞는 것 같다. 

항상 주인공의 연애상담이나 
피피엘 대사 전용으로 남용되는 주인공 친구들이
-물론 사극이라 피피엘은 불가능했겠지만-
마지막에 다들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각각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모습으로 보인 것도 좋았고,
그 중 가장 뜨거운 불꽃 인생이 조근조근 얌전하던 영이여서 더 좋았다. 
팔자고침의 대명사였던 후궁간택이 
덕임으로선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중전이 궁을 화려한 감옥이라 쓸쓸하게 얘기할 때
아, 그래서 궁중암투들이 그렇게나 많았나 싶기도 하고 ㅋㅋ

실제로는 맺어지기까지 14년이 걸렸다는 정조와 덕임의 이야기. 
역린에서는 극적인 정치적 암살로 풀던 정조의 죽음이었는데  
드라마 속 결말은 
정말 열심히 일한 왕, 정조의 넋을 달래주는 느낌이다. 
김과장 때부터 좋은 배우인 건 알았지만  
그 사이 더 잘하는 배우가 된 이준호의 정조 정말 멋있었다. 
게다가 메이킹의 재미-이세영은 정말 메이킹 케미요정.
왕이된 남자 때는 사실 본방보다 메이킹 속 이세영이 더 좋았지만
이번엔 본방과 메이킹을 관통하는 진짜 주인공이 된 듯.
주인공들 표정 다시 보고 싶어서 되돌려 본 드라마는 오랜만이었다. 
(근데 목욕탕 씬은 다시 봐도 덕임이가 뛰어드는 장면^^)
감정을 담거나 분위기를 담는 카메라는 정말 멋진데 
액션에서는 약간 개싸움^^

그냥 궁금한 거.
무술 고수 궁녀는 연습을 언제 할까.
한문독서원어민일 왕에게 바치는 책을 왜 한글로 필사했을까.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정조에 꽂혔다. 
드라마와 역사스페셜을 합쳐보니 
세상에 
정조는 왕으로나 남자로나 완벽 그 자체였는데
거기에 위키피디아를 합쳐보니 
금수저 사춘기 출신의 흑역사가 묻었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싶다가, 
그래도 자라서 멋진 왕이 되었지-싶었지만,
기방 동무들이 여동생들의 남편들이었다니
실연 당하고 나서는 남의 집 장독까지 깨러 돌아다닌거니 ㅋㅋ

-잠시만 더 저 백성에게 군주의 시간을 내어 주시옵소서.
-내가 기억을 못해서 하늘이 내린 백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는 군주된 도리가 아니지.

-모든 책임은 제왕의 것. 
이제까지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이 자리에 엎드려 전하를 원망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처럼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이제 저의 하늘이 무너져 사라지고 제가 새로운 하늘이 되었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두렵습니다. 
결코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이 저의 책임입니다. 

홍덕로를 내칠 때의 정조의 심경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때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래서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마음을 받은 이가 좌익위

도와준 것을 빌미로 평생 미안하게 만들었던 홍덕로와 
모르게 구해준 덕임의 의연함의 대비는 군주로서의 정조를 더 커 보이게 했다. 

더 브레이브|True Grit|2010

 

가출한 아이가 어른들과 떠나는 모험 여행
-많이 본 동화와 다르지 않은데 
옛날 옛적 서부에서
주정뱅이 보안관과 어른 찜쪄먹는 협상의 기술을 가진 너무나도 당찬 14살이 
배경과 주인공이 되면서 
너무 나도 신선한 이야기가 되었다, 
동화의 느낌도 사라지지 않은. 
그리고 내겐 처음으로 진짜 재미있게 본 코헨 형제 영화^^
여전히 묘한 표정 부자의 쌈지에서 갖은 표정을 꺼내 보여주는 제프 브리지스,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웃음의 99%까지 담당하는데 
아, 진짜 여전히 섹시하세요!

안타깝게도 스틸에서는 다 멋진 표정 뿐이라 그나마 비슷한 설정으로 주움 


이것은 틀림없이 제프 브리지스가 찍었을 거!

14살에 팔 하나를 잃은 아이가 어떻게 살았을 지 궁금하지만
오랜 인연을 잊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어릴 적의 기개를 잃지 않은 매티와 
그 속에서 뭘 했을 지는 모르지만 왠지 어울렸을 것 같은 루스터의 마지막까지 
꼭 닫힌 기쁜 결말.

약간 허술하면서도 웃기던 옛날 서부영화 같은 느낌도 재미있었는데
초반 루스터의 재판 증언 장면은 아주 그냥 폭소대잔치였고
루스터가 온몸으로 총 솜씨를 보여 주던 혼신의 고주망태 발사 장면이나
독거노인 같은^^, 듣거나 말거나 멈추지 않던 몸에 익은 듯한 적극적인 TMI 라든가
꽤 밀도 있던 매티의 여러가지 흥정 등등
대사 재미도 쏠쏠 했다.  
루스터가 매티를 구해 달리다 오두막에서 총을 쏠 때 
문득 들었던 생각.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총이 핸드폰이고 총이 인터넷이었다 ㅋㅋ

곤충 극장 :카렐 차페크 희곡선집|카렐 차페크 지음|김선형 옮김|열린책들

곤충극장


기술자 2 셋, 넷! 속보로!

목소리 다들 비켜!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여행자 적어도 빨리 죽긴 했군.

기술자 1 일해! 일! 일하는 자가 더 많이 가질 것이다

기술자 2 더 많이 가지는 자는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기술자 1 더 많이 필요하니까!

기술자 2 보호해야 할 것이 더 많으니까!

기술자 1 정복해야 할 것이 더 많으니까!

기술자 2 평화를 위해 정복하라!

기술자 1 평화는 곧 노동이다!

기술자 2 노동은 곧 권력이다!

기술자 1 권력은 곧 전쟁이다!

기술자 2 옳소! 옳소!

목소리    다들 비켜!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 해!



사람들이 인생에 두는 몇 가지 가치를 상징하는 각각의 곤충들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희곡인데 무대를 보지 못하고 책으로 읽노라니 노동과 전쟁을 결합한 개미들의 기괴함과 여행자가 만나는 죽음의 순간이 남았다.  죽음이란 모든 것이 멈추는 끝이지만 생명이란 내 것이 끝나도 다른 어딘가에서 이어지는 에너지.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등장인물

에밀리아 마르티

야로슬로프 프루스, 야네크, 프루스의 아들

알베르트 그레고르(베르티)

막스 하우크-센도르프

콜레나티 박사, 변호사, 비테크, 콜레나티의 비서

크리스티나 비테크(크리스티), 비데크의 딸

하녀, 의사, 무대 담당, 청소부, 여성


그렇게 모든 걸 다 익히고 나면 나머지 1백 년은 지혜로-지배하고 가르치고 선례를 남기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 3백년 동안 지속되면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귀해질 지 생각을 해보란 말입니다. 전쟁도 없을 겁니다. 급할 일도 없고, 두려울 일도 없고, 이기적일 이유도 없겠죠. 만인이 지식과 품위를 갖게 될 겁니다. 


(두 손을 꼭 맞잡고)자연의 돌연변이가 아닌 만물의 영장, 완벽하고 전지한 하느님의 아들, 민중에게 생명을 줍시다! 충만하고 인간적인 삶을!

클러나티 그건 다 좋네만, 비테크 -

그레고르 송장을 서류철에 정리하느라 3백년. 양말을 꿰매느라 3백 년. 거참 고맙겠수다!

비테크 그렇지만 -

그레고르 만물의 영장, 전능 좋아하고 앉아 있네! 대부분의 인간사는 오로지 무지 덕분에 견딜 수 있다는 걸 당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치졸함은 쉬지 않고 스스로 재생산을 해내거든. 파리나 쥐 떼들처럼 말이오. 오직 위대함만 죽는 법는 법이오. 힘과 재능만이 죽는 법이라고.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어쩌면 그런 걸 보존하고, 영원한 귀족 계급을 옹립할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갖게 된 건지도 모르지.


비테크 귀족 계급? 저 말 들었습니까, 신사 여러분? 수명의 특권이라니!


프루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오로지 최고의 부류만 살아서 번식할 자격이 있단 말이지. 유능한 인간들, 지도자들, 여기서 여자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소, 그렇지만 대체 불가능한 남자들은 1만 명, 2만 명 정도는 있단 말이오. 우리는 그들을 보존하고, 초인간적인 힘을 부여해 주고, 그들의 두뇌를 초인간적인 수준으로 발달시킬 수 있소. 1만 명,아니 2만 명의 초인간적 지도자들과 창조자들이 생겨나는 거지.

비테크 한 무리의 우두머리들 말인가요?

프루스 바로 그거요. 무한한 수명을 누릴 정당한 권리를 지닌 이들을 선발하는 거지.

콜레나티 실례지만 그런 개인들을 누가 선발한다는 말씀이죠? 정부? 국민 투표? 스웨덴 한림원?

프루스 멍청한 투표 따위는 집어치워요! 최강자들이 직접 손에서 손으로 생명을 전수할 겁니다. 물질의 주인들이 영혼의 주인들에게. 발명가들에게서 군인들에게로. 사업가들이 독재자들에게......


.......


비테크 왜요?

에밀리아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몰라. 그러면 … 그러면 깨닫게 되지. 그리고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려.

비테크 뭘 깨닫죠?

에밀리아 맙소사, 표현할 말들이 없다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아무것도. 그냥 이 공허함뿐. 기억하니, 베르티? 내가 노래할 때 얼음처럼 차갑다고 했지.

봐라, 삶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데도 예술적 기술은 그 의미를 보존하고 있어. 그저 일단 터득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지. 크리스티, 코를 고는 것만큼 이나 아무 쓸모가 없단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 

비테크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당신이 노래하면…… 그건 사람들을 변화시켜요. 더 위대해지고, 더 나은 사람들이 된단 말입니다.

에밀리아 사람들은 절대 나아지지 않아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아. 총격, 지진, 세상의 종말—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네들은 여기 있지. 그런데 나는 어딘가 멀리, 저 멀리, 3백 년은 떨어진 아득한 데 있어. 당신네들의 삶이 얼마나 수월한지 스스로 깨닫는다면 좋을 텐데!


콜레나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에밀리아 당신네들은 만물에 가까워요. 모든 게 뭔가 의미를 갖고 있죠. 얼마 안되는 짧은 당신네 인생에서는 만물이 값어치가 있으니, 당연히 한껏 누리며 사는 거예요. 아, 맙소사, 정말이지…… 

(두 손을 맞잡고 비틀어 댄다) 바보들. 당신네들은 너무나 행복하단 말이야! 그렇게 행복한 당신네 들을 보고 있으면 역겨워.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들 때문에 다들 죽게 될 거야! 당신네들은 원숭이처럼 만사가 흥미롭잖아. 모든 걸 믿잖아. 사랑, 자기 자신, 명예, 진보,인간성, 모든 걸! 맥시, 당신은 쾌락을 믿잖아. 크리스티나 너는 사랑과 신의를 믿지. 프루스, 당신은 권력을 믿어, 비테크는 자기가 하는 온갖 헛소리를 믿고. 모두 다, 모두가 뭔가를 믿고 있어. 얼마나 멋진 삶이야, 이 바보들아! 얼마나 근사한 삶이냐고!


비테크 (심란해하며) 감히 말씀드리지만 마담,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치, 이상 꿈….


에밀리아 그것 봐요. 하지만 그건 오로지 당신을 위한 거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쩌면 사랑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당신 마음속에만 있는 거야. 움켜쥐면 사라져 버리지. 당신네들은 우주 어디에도, 어디에도 없어. 아무도 3백 년 동안 사랑할 수는 없어. 아니, 희망할 수도, 글을 쓸 수도, 노래할 수도 없어. 3백 년 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 살 수는 없는 거야. 견딜 수가 없으니까.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선에도 무감하고, 악에도 무감하고, 천국에도, 이승에도 무감해져.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 아무것도, 죄도, 고통도……오로지 의미를 가진 것들만 존재하는 법이야. 그런데 당신네들한테는 만사에, 만물에 의미가 있잖아. 아, 하느님, 한때는 나도 당신들 같았는데! 소녀였고, 여자였고, 행복했는데, 나도. 나도 인간이었는데! 맙소사, 하느님!


하우크-센도르프 그랬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요?


에밀리아 봄비타가 해준 얘기를 당신네들은 모를 거야, 그는 우리- 우리 늙은이들이 너무 많이 안다고 했지.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훨씬 더 많이 알아, 이 바보들아. 훨씬, 휠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사랑도, 위대함도, 목표 의식도 알잖아. 모든 걸 갖고 있잖아. 이 이상 바랄 나위가 없잖아. 여전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감각하고, 얼어붙은 채로 계속,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해. 세상에, 더는 못 하겠어. 맙소사, 이 고독이라니!


프루스 그렇다면 어째서 묘약을 가지러 돌아온 거죠? 어째서 또다시 그 삶을 반복하려는 겁니까?


에밀리아 죽음이 무서우니까.


프루스 세상에, 그렇다면 심지어 불멸의 존재들도 그건 피할 수 없단 말인가?


에밀리아 그래요.


침묵.


유한해서 의미를 갖게 된다는 몇백년 인간 에밀리아의 웅변이 솔깃하지만

유한한 인간은 삼백년을 수백년을 산 에밀리아는 유한을 예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갖지 못한 것에 꿈을 두는 걸 절대 포기 못하는 알쏭달쏭한 존재란 게 확실해진다.

오히려 그 무한의 존재가 가진 것 중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이 또 그 목숨이라니.

긴 웅변이 설득력 보다는 수수께끼에 가까와 질 뿐.


하얀 역병

등장인물

법정 고문 시겔리우스 교수, 갈렌 박사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제1조수, 제2조수, 군 총사령관

크루그 남작, 크루그 남작의 아들

교수 네 명, 당 인민 위원, 장군

총사령관의 딸(아네트), 총사령관의 수행원들

보건부 장관, 정보부 장관, 부관, 간호사

기자 1, 기자 2

의사들, 간호사들, 나환자 세 명, 군중들


돌아가신 우리 장인이 베이징의 병원에서 본 몇 가지 사례들로 논문을 쓰셨거든요. 무척 흥미로운 글이지요. 최근에 제가 리뷰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이 질병이 이런 가공할 만한 유행병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꿈도 못 -


기자 가공할 만한 뭐라고요?


시겔리우스 유행병 말입니다. 통제 불가로 확산되어 결국 세계 인구 전체를 감염시키고야 마는 질병이지요. 대단히 흥미로운 신종 질병이 거의 매해 중국에서 새로 등장하고 있단 말입니다. 다 가난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태껏 쳉 바이러스만큼 흥미로운 병은 없었어요. 이건 진정한 이 시대의 질병입니다! 등록된 건만 2천만이에요! 적어도 그 세 배쯤 되는사람들이 자기 몸 어딘가에 흰 콩알 크기도 못 되는 작은 얼룩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돌아다니고 있을 거고요. 그리고 유럽 최초의 사례는 바로 여기, 우리 병원에서 진단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친구. 바이러스가 보여 주는 특히 눈에 띄는 증세 하나에는 〈시겔리우스 증세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기자 (글을 쓰며) 법정 고문 - 교수 — 의사 — 시젤겔리우스 증세군 -


시겔리우스 제 견해는, 그리고 우리 학파의 견해는 아,우리 학파는 자랑스럽게도 위대한 릴리엔탈, 그러니까 돌아가신 우리 장인-받아 쓰셔도 됩니다-의 이름을 따서......


...제2조수가 황급히 달려 나간다.


기자 세계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나올는지.


갈렌 그래요, 어떻게 나올까요?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이겠죠. 저들이 말상대도 안 해 줄 거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국가는 백신을 얻을 수 없다고 여러분이 기사를 써준다면 -


기자 2 이상주의에요! 그렇게 백신을 살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갈렌 없다고요? 별것도 아닌 이유로 수백만 명이 끔찍한 죽음을 맞도록 내버려 둔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통치자들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도 겁에 질릴 거란 말입니다!


기자 그 말도 일리는 있군요. 그렇지만 어떤 정부도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죠?


갈렌 지독하게 슬픈 일이 되겠지요. 저로서는 도저히 백신을 풀 수가 없습니다.


기자 그걸로 뭘 하려고요?


갈렌 다시 빈민가로 가지고 갈 겁니다. 거기라면 환자들이 모자랄 일이 없으니까요! 하얀 역병이 치유 가능하다는 사실을 수백 번도 더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상식적인 갈렌의 협상은 결국 성공을 앞두고 좌절된다.

1937년 체코 작가가 상상한 중국발 전염병이라니.

때가 때이니 만큼 코로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하얀 역병.

소설 속 전염병은

무한 앞에 겸손하지 못한 야망의 인간이 재앙을 자초하는 걸 보여주기 위한 소재였지만

어딘가는 넘쳐 나는 백신이

많은 지역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그 소외된 지역들에서 계속 변종들이 생겨 놀라운 속도로 만들어진 백신들의 위세를 꺾으며

결국 모두에게 공평한 불행-그 심각성은 공평하지 않겠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을 드리운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이 닮아있다.

읽을수록 인생이 궁금해지는 카렐 차페크.


---엉망인 책갈피인데 이미 시간이 지나버려 정리가 안됐다...독후감을 미루면 이런 일이 생긴다.

운영전|구인환 엮음|신원문화사

운영전은 운영이라는 안평대군의 궁녀가 아름다움 청년과 죽어서도 연을 이어가는 사랑이야기이고

영영전은 어느 대감집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영영이라는 처자의 사랑이야기,

백학선전은 중국을 배경으로 어릴 적 인연을 이어가려는 한 낭자의 모험가득한 배필 구하기로

세 개의 연애소설이 묶여있다.

그 시절의 연애소설 맛보기랄까. 


그 중 인상 깊었던 영영전의 한 대목.

이렇게나 혼신의 힘을 다해 썰을 풀며 유혹하는 김생의 열정^^


...마음으로 하고자 한 바를 다 해 보았으나 오직 운우의 즐거움만은 이룰 수가 없었다. 김생은 영영의 정욕을 고무시키며 정성을 다하여 백단으로 유혹하며 말하였다.

“새도 급히 날고 토끼도 빨리 뛰나니, 세월은 꿈 흐름과 같아서 붉은 꽃이 떨어지고 푸른 잎이 시들어지면 나비도 생각을 멀리 할 것이니, 이것과 무엇이 다르리까? 얼굴에 붉음이 시들어가고 머리에 흰 머리가 나부끼면 그만이오. 아침에는 구름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비가 된다는 양대의 신녀도 본래에는 정해진 사람이 없었으며 푸른 바다 넓은 하늘 달 속의 항아도 후회하고 선약을 도적하였다오. 새들은 미물이면서도 나래를 나란히 하고 초목은 우둔하면서도 마주 보고 서는데, 하물며 욕정이 모이는 데 있어서 어찌 인간만이 그 이치가 다르겠소? 봄 바람에 호접의 꿈은 특히 공방을 괴롭게 하고 달밤에 두견새의 울음은 유달리 외로운 배게를 놀라게 하는데, 어찌 당나라 시인 두목지 만이 봄을 찾아 만년을 꽃답게 보냈겠소? 위나라 우언에 항아를 바라보다가 청춘의 해를 헛되이 보내고서 공연히 황천의 한만을 끼쳤으니, 저 서릉의 푸른 나무는 천 년을 지나는 동안 황막한 언덕이 되어 고요하고, 장신궁은 밤새 내리는 가을비에 쓸쓸하도다 하였으니 슬프도다. 내 마음에 섭섭히 여기는 바는 낭랑의 무정함이니 이 몸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죽어서 없어질 뿐이오."


그러나 끝내 영영은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말하였다.


"도령님께서 뜻을 저에게 두시었다면 다른 날 서로 찾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 


김생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음용을 한번 이별하면 궁문이 깊이 싸여서 편지를 붙이고자 한들 전달할 길이 없을 것이니, 어찌 다른 날 낭랑의 두 푸른 눈동자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겠소?" 


"그것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마는 이달 보름 밤에 진사와 유왕자제군이 완월회를 하자고 약속하였삽기로 그날에는 반드시 밤에 잠깐 들어왔다가 나갈 것이옵니다. 또한 궁의 담이 마침 풍우로 인하여 무너졌으나, 진사께서 천천히 고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고치지 아니하고 있나이다.

도령님께서 그날 어두워진 다음에 오셔서 무너진 담으로 깊이 들어오시면 가운데 짧은 담문이 있으므로 꼭 열어 놓고 기다리겠사오니, 그 문으로 담을 따라 내려오면 동쪽 섬돌 십보 가량 되는 곳에 별침 두어 간이 있사옵니다. 도령님께서 거기에 몸을 숨기고 계시면서, 제가 나와 맞이하도록 기다리면 우리들의 가기 에 무슨 어려움이 있사오리까?"


이에 김생은 자못 그렇게 여기고서 굳게 약속을 정하였다. 손을 나누어 작별하고 같이 길을 떠났다. 점점 남북으로 멀어지니, 김생은 말을 세우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며 말없이 넋을 잃을 따름이었다. 김생은 일로부터 깊은 생각이 더욱 심해졌다. 곧 시 한 수를 지어 스스로를 슬퍼하였다.




하데스 타운|Hades Town|2022

드디어 봤다, 하데스타운

2022.01.09 일 19:00


애초에 하데스타운을 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 
박강현의 미성과 인물 소개의 오르페우스가 너무 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지만
워낙 다양한 캐스팅 조합에
여러 번 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고심 끝에 내 기준 믿보배들 공연일로 선택했다. 
공연일을 기다리며 소식을 가끔 찾아보던 중 
하데스타운 배우들 라이브를 봤는데 
그 배우들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약간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처음 결정대로 갔는데...
공연을 보면서 이미 예감했다, 
이 공연은 분명 회전문러들 사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리라는 걸.
(아님 말고^^)

우선 오르페우스.
미소년이라 세상 물정 모를 줄은 알았지만 약간 얼빵함이 곁들여진 
세상 속에 있지만 딴 세상을 사는 오르페우스는 귀여웠다. 
기차 타고 떠난 애인을 걸어서 찾아가게 만드는 고단한 가난인데 
자기 노래에 반한 천지만물이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행복으로 가난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오르페우스의 노래들.
박강현이 그걸 다 가성으로만 부르지 않아서 더 박강현스러웠던.

그 다음은 페르세포네
예전에 TV예능프로그램에서 봤을 때는 
재능만 많고 끼는 별로 없는 특이한 사람이다 생각했는데...아니 같은 분 맞으신지?
특히 예쁜 목소리로만 알고 있던 박혜나가 소울충만 박력을 뿜을 때 
이 분 진짜 노래로 연기하는 분 맞다 싶었다.
Epic3들으면서 눈물 글썽일 때 나도 울컥.
좋았던 노래도 오르페우스 다음으로 많고.
유일한 불만은 박혜나를 김선영처럼 보이게 분장해 놓았다는 것.
분장도 라이센스가 있는 건지...
신화 속 이미지는 어마어마한 신에게 납치 당한 희생양 같은 느낌이었는데 
언제 같이 한 잔 하고 싶어지는 쾌활한 천성의 페르세포네 언니
한 잔 같이 하고 싶어요^^

그리고 헤르메스.
흥 많고 정 많은 버전의 헤르메스.
망원경으로 가끔 대사 하지 않을 때의 표정을 봤는데 
거의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데도 
정말 극을 즐기는 것 같이 극의 분위기와 맞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래도 신나고, 일단 헤르메스 자체가 인간과 신의 중심에서 좀 참견해주는 입장이어서 
흥과 정이 만나는 헤르메스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헤르메스도 신이긴 한데. 

하데스
웃는 남자에서 딱 한 번 봤을 뿐인데도 강렬하게 남았던 양준모.
하데스에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노래가 많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지만
마력을 가졌을 것 같은 카리스마의 하데스로는 딱. 
그래서 이번엔 2부 중심으로 연기를 더 많이 본 걸로 만족.

에우리디케
어려운 노래들이었을텐데 들을 때 전혀 힘들게 들리지 않던 김수하의 노래들.
기초가 굉장히 탄탄한 배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을 압도하는,
본 사람들이라면 얘기 안 할 수 없는 운명의 여신들.
각각 다른 목소리로 어쩌면 그렇게 소리를 잘 맞춰 부르는지.
메이킹(?)에 보니 이 여신들은 1-2부 사이 쉬는 시간에도 연습을 하고 있던데
아마도 그 정도의 열정이 노래에 마디 마디 새겨지는 중인 듯.
좀 얄미운 가사도 있지만 
그래서 재미있기도 한 삼중창 여신들 최고.

결말은 신화와 같아서 비극이긴 한데
마치 될 때까지 기회를 주겠다는 듯 돌고 도는 인생으로 무대는 끝이 났다.
아무래도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가장 크긴 하지만
사실 가난을 싫어하던 현실주의자였던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만나 외롭지 않은 삶을 선택하고 나서도 
다시 장작과 음식을 위해 하데스와 계약을 해버린 게 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이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몰리지 않고 선택할 여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복지의 개념에 동의한다.

보고 온 다음 날 하데스타운의 수상 소식
-상 못 받았으면 오히려 놀랐을 거에요, 축하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