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황정은|2010

삶이 고단해지면 그림자가 일어선다. 이야기는 주인공 은교가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연인인 줄도 몰랐던 무재의 부름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어느덧 무재의 그림자도 일어나버린 후지만 소박한 사랑을 이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름 귀여운 연애에 그림자빛이 감도는 이야기.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지 않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얘기에요.


무재는 여기서 원죄를 이야기 하고 있다. 깨닫기 전에 한 일이라도 죄없다고 말할 수 없다, 공산품에 대한 생각에서는 자본에 기댄 모든 생산은 부정한 과정을 겪는 게 필연이다-라고. 이 온화하고 소박한 남자가 나름 발끈하는 것 같은 이 대목은 잊고 있던 현실의 먹구름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기도 하고, 마치 종교처럼 군림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짚어주는 통찰같기도 했다. 

그림자는 보이잖아요?
보이지. 빤히 보이는 것을 두고 못 본 척을 하고 있으니 내가 직접 그림자가 있는 곳을 가리켜 보이며 그림자야, 그림자, 라고 말해도 말이야.
이렇게 살짝, 이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허공을 꼬집듯 왼손 엄지와 검지를 붙여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아무래도 좋은 거구나, 나 따위 그림자를 따라가더라도 상관없다는 거구나, 싶기도 하지  않겠어? 에이 썅, 따라가고 말아 버릴까, 싶어서.
따라가셨어요?
따라갔지. 그런데 그것도 잘 되지 않더라고. 목소리가 따라와.
목소리요?
차마, 차마, 하고 내 목소리가. 하여간에 십 리도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어. 어처구니가 없었지. 나라는 놈은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하고, 하면서. 그 밤에 달이 얼찌나 밝은지 분화구가 다 보이고.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분화구 윤곽이 선명한 달이 뜬 밤에 구불구불 늘어진 그림자를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 씨 아저씨의 모습을 나는 생각해 보았다. 
여 씨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여간에 말이지,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서랍 속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앰프 껍질에 꽂힌 나사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 씨 아저씨는 그림자를 따라나섰던 길에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했다. 아직 마음이 다잡히지 않은 그림자가 남아있는 삶. 이 체험담은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평범한 경구를 반복하면서, 본능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잡아끌었다는 목소리의 질긴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 대목이 강렬하게 와닿았던 건 저런 본능적인 담백하고 진솔한 여 씨 아저씨의 고백속에서 분화구와 달과 그림자와 여씨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수묵화를 그려 낸 은교의 상상에 대한 묘사였다.

그림자가 일어난 두 연인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하는 이야기.
그들 삶의 터전이
다른 작가들은 별로 쓰지 않는
내가 기억 속 느낌 그대로의
내가 가본적 있는 곳이어서 반가왔다.
서로의 말을 반복해주는 은교와 무재의 은교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심리상담 기법 중 '반영'이 생각났다.
상대의 말을 마치 내가 잘 들었다는 걸 확인시켜주듯 반복하는 것.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대화법은
평소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큰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매력적인 소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쓰는 황정은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즐거운 2014년이다.

PS1. 책 내용을 옮겨 적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띄어쓰기 어렵다!!!!!!
국어학자들은 띄어쓰기 시험보면 다 백점 맞을수 있을까?

PS2. 책의 끝에 이 소설을 읽고 기사도 정신이 발동한 신형철이 현실의 자명성, 불행의 평범성, 언어의 일반성, 윤리적인 무지, 연인들의 공동체라는 다섯 개의 제목을 붙여가며 이 소설이 잘못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 담아 쓴 정성담긴 서평이 실려있어서 놀랐다. 아니 이런 서평도 썼으면서 왜 문학이야기에 황정은이 안나왔던 걸까. 

양성원과 엔리코 파체 듀오 리사이틀

마티네공연의 학습효과인지
연주가 끝나면 양성원이 일어나서 설명을 해줄것만 같았다^^

마티네공연때 양성원의 첼로에 반해 갔던 공연.
양성원의 첼로는 
몸체에 갇힌 소리 실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자신있게 뽑아내는 것 같아서 매력적이었다.

엔리코 파체의얘기를 들어보면
양성원은 자유로운 곡해석을 한다는데
내 귀에는 두 사람 보두 모범생같았다.
자유로운 모범생인가...?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피아노곡으로는 완소하는 작곡가들인데
첼로 소나타는 확 와닿지 않았다.
유튜브를 검색해 다른 연주자들을 들어보니
브람스의 1번 소나타를 빼고는
곡들이 내 취향이 아니었던듯.
마티네때도 느꼈지만
양성원의 선곡은 나와 취향이 좀 먼 것 같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와 만추|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and Late Autumn 1981

어제와 오늘 EBS가 골라준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1981년 김수용 감독의 두번째 만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 로버트의 말을 빌자면, 
평생 한 번 뿐인, 
그것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른다는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소설로 읽었던 매디슨 카운티의 모든 감동이 
비를 쫄딱 맞고 선, 
퍽 안쓰러운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의 강렬한 비주얼로 
한방에 날아가버렸던 안타까운 기억의 영화라서
딱히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끝까지 보고 말았다.

로버트의 절절한 고백이 좀 닭살스러웠던 것은
그의 말의 간절함이 
보여준 간절함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운명의 사랑의 시들어감 보다는 
일상의 시들어감을 선택한 프란체스카의 선택이 이해가 됐다.
결국은 희생을 한 사람만이 공감도 얻을 수 있다는 
연애人들의 안타까운 선택.
순수의 시대에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자면 만추는 
그들의 선택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렸고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다시 못할 재회를 약속하고 털어놓지 않은 남자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렇게 잊어달라는 고전적인 배려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다음주는 탕웨이의 만추던데 혹시 지난주엔 오리지널 만추를 해줬던 걸까?
놓쳤다면 아쉽네....


김혜자와 정동환이라니...멋진 조화.

이미 치열하게 다쳐도 보고 지쳐도 본 여름을 지나
바람부는 계절에 만난 특별한 연인들.
여름의 뜨거운 상처가 가을을 익어가게 했지만
지금은 좀 스산해 보였던 그들의 가을 사랑 이야기.
하지만 누구도 후회는 하지 않았을테니
겨울도 좀 더 따뜻해 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