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비밀 11-12회 미스터리

센스있는 인물소개^^

일상이 정치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현상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응원하는 나를 너무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드라마를 보는 것도 그렇다. 그냥 재미있게 보기만 하면 될텐데 추적자나 비밀같은 드라마들은 거기에 보태 응원까지 해주고 싶어지니 말이다.
처음에 비밀은 좀 궁금하긴 했다. 오랜만에 컴백하는 대스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도 낯선 작가와 연출자에 정통멜로라니...그래서 1회를 봤는데 솔직히 별로 재미없었다. 그래서 그냥 잊고 있다가 우연히 리모콘 지나는 길에 6회를 보다가 그만 멈춰버린 것이었던 것이었다....!

시작은 세 개의 사랑이야기였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던 도훈과 유정, 현재의 서로에 깊이 빠져있던 민혁과 지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연의 짝사랑.
이제 11회에 이르러서는 채 못다한 사랑을 복수로 달래보려던 민혁과 열심히 사랑했지만 모든 것을 읽은 유정이 새로운 끌림에 다가서고 있고, 여전한 짝사랑이되 그간 더 많이 망가진 세연과 온전한 사랑을 버리고 괴물이 되어가는 도훈이 남았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도훈이었다. 유정의 넘치는 사랑, 부담은 되었을지언정 절대적인 가족의 사랑속에 살아온 도훈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린 게 목표의 좌절이라는 걸 보면.
도훈은 유정이 떠나서 망가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꿈꿨던 검사가 되고 나서 겪은  목표의 좌절로 망가졌다. 하지만 그는 이 지점에서 아랫것들 최고의 꿈을 비현실적으로 꾸고 있는데 감히 재벌가의 아들을 적수로 생각하는 것, 그 재벌아들의 약혼자와의 특별한 관계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그렇다.
민혁과의 대결에서 꽤 설득력있는 항변을 펼쳤음에도 도훈이 기껏해야 이카루스의 결말을 맞게 되리란 건 뻔하다. 정신나간 사이코패스로 봐야할지 다크 돈키호테로 봐야할 지 알 수가 없다.

유정도 대책없이 착하지만은 않다. 착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도 늘 참고 양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 그래서 사랑도 참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게 신선하고, 그런 열심의 결과에 배신당했을 때의 폭발은 절대 다 이해 될 수 밖에.
잊고 웃으면서 살까봐 그게 더 무섭다는 유정-비현실적일 정도로 지독한 고난 속의 주인공이지만 그녀의 변화는 꽤 현실적이다.

비밀은 일단 보는 사람은 존중해주는 느낌이 든다. 내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를 진한 감정들이 묻어나는 한마디 한마디가 인물을 만들어가고, 서서히 빠져들게 된다.
명대사는 말빨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다던데
11회와 12회의 베스트 대사,  "넌 툭하면 남의 건물에 와서 이러더라.(민혁)"
정말 민혁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깊이가 느껴졌다.

11회와 12회에서 베스트 7.

7.거울에 와인잔을 던지고 쓴사랑을 시인하는 신세연.
세연의 손 위로 도훈의 눈물이 떨어지던 장면만큼이나 보기에 멋졌다.

6.파일복구됐다는 소삭에 걸어나가는 민혁과
K그룹 복도를 걸어가는 도훈의 연결-멋진 속도감 이었다.

5.사장님 빽이 있는 직원인 줄 알면서도 야단치는 호기로운 점장,
회장이 병중이라 하더라도 이사회의 결정이 공식 후계자를 위협하기도 하는 재벌.
K그룹 나름 상식적인 대기업일세~

4.생일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달겨들어 생일빵 하는 언니들 완전 귀여웠는데
원플러스원 등 명대사를 남발하는 산드라 황, 유난히 눈을 번득이며 던벼들던 이자영. PPL걸 노릇하느라 욕보고 있는 양해리-멋지다.

3.생일노래 하나 듣겠다고 수작 부리는 민혁,
눈치보면서 노래하는 유정에
짬도 안주고 산통깨는 세연의 등장,
현란한 카메라끈을 매고 뻘쭘하게 등장하는 광수까지
타이밍마저 디테일이 살아있던 (무려 웃기기까지 했던) 명장면.

2.민혁과 도훈의 대결.
단지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수인이 저 도망갈 구멍을 파놨다고 해서,
처음 음모를 꾸민 민혁이 당당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도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명령이 가혹할수록 아랫것들은 더 추잡해져야 한다-감당할 것이 많아지니까.
그러나 우아하게 한마디 했다고 해서 그 범죄까지 우아해질 수는 없다.
다만 아랫것들도 한 짓만큼은 벌을 받기를 바란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므로.

1.아마도 내가 본 가장 진한 키스.
참 많은 사연과 역사가 캐릭터를 타고 키스씬으로 드러난다.
사랑할 여유도 없는 유정의 닫힌 마음과 정말 말 그대로 '미친'상태를 숨기지 않던 민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작을 하기까지를
긴 키스씬으로 이어가다니...
외과의사 봉달희 이후 처음으로 연출자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드라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재미있는데도 보는 사이 여러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재미있어서 꼴딱 넘어갔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연결이 한 두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비밀 미스터리

1. 안도훈 만난 일로 혼난 유정과 기껏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레스토랑을 나선 민혁이
생일 축하 바람을 맞아 패악을 떠는 세연의 스튜디오 장면 이후에
갑자기 다시 레스토랑에서 유정에게 생일노래를 시킨다. 어떻게 된 일?

2.딴 때는 전화를 잘도 하더니, 유정이 맘고생하는 거 빤히 알면서 투자유치라는 엄청난 소식을 굳이굳이 직접 전하는 민혁-그나마 거기서도 안 만났으면 계속 전화한통 안 할 생각이었어?
언제부터인가 둘 사이에는 전화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3.민혁사마, 12회 키스 미수사건 이후 전화받고 나가면서 유정에게 광수 보낼테니 기다리래 놓고 왜 아무 소식 없었쎄여..?

4. 해리가 불쑥 내미는 화장품을 젖히고 다녀오겠다는 인사까지 하고 나간 유정이 갑자기 레스토랑에서 해리와 같이 애기손님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그냥 같이 나오지, 인사는 왜 했을까?

5.도훈의 회상속에서 민혁은 지혜를 외쳤다,
유정에게 고백할 땐 지희를 따라 죽지 못했다고 했는데.
돌아가신 그 분은 지희? 지혜?

6. 어머니 사연은 모르겠지만,
유치원 때부터 일편단심인 것 같은 신세연에,
절대적인 애정을 보내는 아버지에,
믿음직한 충신까지 거느린데다
꽤나 서로 좋아했던 애인까지 있었던 민혁이
원하는 것 얻고 나면 너도 떠날거냐고 묻다니,
주변에 원하는 걸 얻자마자 떠난 사람 있었어?

7.이건 뭐 옥의 티 수준이지만
한남동에서 출발할 때와 유정의 집에 도착했을 때
차에서 앉은 자리는 갑자기 왜 바뀐 거지..설마 차에 탈 때 유정이 든 핸드백 때문...?

8.생일노래를 부르던 유정과 민혁은 텅 빈 레스토랑에 있었고
세연은 스튜디어에서 바로 들이닥친 것처럼 연결되는데
대체 시간은 몇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건 파리의 연인에서 아예 씨리얼 광고문구를 읽어주던 조은지 생각이 날 정도로 맹활약 중인 PPL걸 해리씨다. 항상 이런 역할은 왜 연기 잘하는 조연들한테 떠맡기는 지 몰라. 슬프게도 '비밀'역시 유한회사 작품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눈이 벌개진 제작환경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를 골라낸 그 모험정신은 고마우나 뜬금 없는 PPL로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김은숙 드라마를 방불케한다. 
광고는 신세연의 옷이나 장신구들, 민혁의 식당처럼 납득이 가는 수준에서 끝내면 안될까?
우느라 눈이 퉁퉁부은 주인공한테 연결도 안되는 장면에서 화장품까지 들이미는 건 너무 했다. 삼겹살에 허브오일도 그렇고.
이런 제품들은 꼭 확인해서 불매운동까지 해주고 싶은 심정.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막판 PPL이 정말 짜증났었는데...차라리 시청률이 낮은 채로 유지되는 게 드라마 품위유지에는 도움이 될 듯.
이제 미스테리는 그만~

***13회
민혁과 도훈을 대할때 180도 달라지는 유정을 보는 재미-안도훈이 새로운 유정을 탄생시켰다고나 할까? 네 사람의 먹이 사슬(^^)같은 관계!

민혁-도훈: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밀리지 않는 최고의 대진
도훈-유정: 도훈이 아무리 기를 써봐야 이길 수 없는 역사의 힘
유정-민혁: 민혁에서 유정으로 힘의 균형이 옮겨가는 중~
민혁-세연: 좀 미안해서라서라도 고분고분할만한데 어제부터 전쟁모드-나쁜 남자 스타일?
세연-유정: 유정 성격에, 세연 앞에서는 계속 미안해할 듯.
세연-도훈: 끝날때까지 세연의 승리일 듯...
>그러고보니 모두에게 이길 수 있는 세연이 제일 불쌍하구나...

어제는 조민혁의 디테일에 지성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멋있게 세팅된 장면들보다 커피가 뜨겁다는 아주 일상적인 대사들이 반짝반짝.
인디언썸머를 생각나게 하던 철문대화장면은 안타깝기도 했고.
하지만 엔딩에서는 정..말....오그라듦-설정도 설정이지만 느린화면까지...
조민혁이 열심히 손의 위치를 잡는 모습만 안쓰럽게 봤음...

***14회
오늘은 다들 여기저기로 서류배달 다니다 끝났네...
드라마의 최후품질은 아무래도 PPL손에 달린 듯...

***15/16회
드디어 비밀의 아쉬운 마지막회.
유정이 민혁을 재벌가의 후계자라는 후광에 눌리지 않고
자신과 아버지의 정을 보듯 민혁과 '회장님'의 관계를 이해했을 때
대인배가 되었다.
재벌가들이란 부모자식간이건 형제간이건 사촌간이건 돈싸움하다가
선대의 창립자들이 죽고나면 뿔뿔이 갈라서다
늙으나 젊으나 법정소송에 까지 이르고 마는
결국은 콩가루 집안들이 아니었던가.
다행히 소송할 형제들이 없는 민혁이라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정이 각별한 것을
편견없이 개인적으로 바라봐주다니 오지랖 유정.

계옥이 큰소리치며 아이를 빼돌린 것을 합리화 시킬때,
그렇게 못 키웠을까봐라고 큰소리 치던 유정도 멋있었다.
그렇다-니가 뭔데!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게될테니 산이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자랄 것 같다. 
어쩌면 엄마아빠 마음고생까지 품어줄 수 있을 지도...

슬퍼하는 유정에게 건네던 자영언니의 정리도 깔끔하고 멋있었다.
거친 듯 바른 말하시는 자영씨 좋아요~

게다가 마지막 회에서까지 등장한 지성의 먹는 모습 이쁨^^
-앞으로 광고에서 많이 보다가 질릴 것 같은 예감ㅎ

도훈이 검찰에 출두할 때
도훈을 깔아 뭉개 버릴 것 같던 불안정하고 거대한 압박으로 나타난 건물 장면 멋있었다.

자기 앞의 생-읽고 친구에게 추천까지 해주고
추천해준 친구에게 엄청 울었다는 인사까지 받은 책인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남--;;

마지막회가 되어서야 자세히 보여주던, 다섯 사람의 운명을 바꾼 사고의 순간.
하나의 사건은 여러 우연의 매듭이라는 설정은
그 때 그사람들이나 분노의 윤리학에서도 있었지만
어쨌든 성실한 짜임새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벌을 받은 건, 억울한 유정과 결국 내버려진 도훈 뿐...
그림로비, 갤러리들의 자금세탁, 대기업법무담당자의 양심선언..
드라마 소재를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해주기만 할 뿐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불쑥-씁쓸하다.

Q1. 15회 민혁과 유정의 이별은 정말 그렇게 시간 점프였을까?
다시보기 하면서 느낀 거지만 이 연출자는 대본을 막 잘라먹는 것 같던데
만약 그 이별 장면도 맘대로 짜집기한거라면
오래 전 김수현마마님께서 드라마 속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작가로 데뷔하시기를 권함.
예쁜 그림이 연출의 전부라 믿고 이야기의 힘을 과감히 생략해버리신 게 맞다면.

Q2. 신의원님이 하신 일은 과연 무엇?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1995-2004-2013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은
나를 닮은, 때로는 내가 알던 사람을 닮은 사람들이  
언제든 내가 문을 열기만 하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주는  
바래지 않는 추억상자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려 20년에 걸쳐 나타나 준 제시와 셀린느.
최근작인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 벼르다 드디어 세 편을 연달아 봤다.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IMG:http://www.theguardian.com/film/movie/58808/before-sunrise

마침 대판 싸우고 있는 중년 독일부부의 고성을 피하다가 만나게 된 제시와 셀린느.
제시는 스페인으로 1년 동안 고대하던 여자친구방문여행을 갔다가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서 기차에 몸을 맡긴 상태였고, 셀린느는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 얘기, 세상 얘기, 사람얘기를 웃기도 발끈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나누는데,
입시지옥의 탈출구인 '대학생'에 담긴 선망의 20대와
돌아보면 꼭 같진 않아도 비슷하게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은 추억의 20대를 합쳐놓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치기어리게 운명에 모든 것을 걸고 아쉬움과 그리움을 만끽하는 마지막 까지 
풋풋하고 예쁜 그림이었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고음을 못알아 듣고, 여자는 저음을 못알아듣게 되는 것이
셀른느의 말처럼 불통의 씨앗이 될 지, 제시의 말처럼 안잡아먹고 살게 해주는 힘이 될지를
그들이 20년 후 보여주게 되리란 걸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테지만^^
레코드가게의 좁은 청음실에서 수줍게 서로를 바라보던 모습과 
레스토랑에서 친구와의 통화를 가장해 고백하던 장면들이 풋풋한 연애감성을 불러일으킨다.

Kath Bloom 'Come Here'
아마도 분위기 있는 멜로디를 떠올리며 집어들어들었을텐데 
담백한 목소리에 의외로 대담한 가사가
수줍게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의 풋풋함과 정말 잘 어울렸다. 

여기만 봐서는 정말 연애고수 같은 셀린느^^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IMG:http://e-filmblog.blogspot.kr/2012_08_01_archive.html

성공한 작가가 되어 파리로 책소개 여행 초대를 받은 제시와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셀린느의 재회.
잘 알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두고 소원한 부부관계에 외로움을 느끼는 제시와 
종군사진기자와 만나면서도 비엔나 재회 실패 이후로 
헤어진 남자친구들이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에 상심한 셀린느가 
울컥 마음을 열다가 다시 시작할 듯한 전조를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아쉬움속에서 마침 제시가 고른 셀린느의 자작곡-왈츠는 이 영화속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
하지만, 중요한 건 9년이 세월을 너머,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와의 대화를 원하고 즐기고 있다는 것.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 
셀린느의 공간속으로 들어간 제시는 
여행에서 생활로, 
좀 더 넓어질 두 사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


IMG:http://www.flixist.com/sundance-review-before-midnight-214447.phtml

파리에서의 재회로 쌍둥이의 부모가 된 제시와 셀린느의 여름휴가. 
그리스로 작가초청여행을 온 제시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공항에서 배웅하며 아쉬워한다. 
이혼 후의 문제들-전 배우자와의 관계, 사춘기 아들과의 관계, 집안일, 거주지, 주도권싸움 등등 
이제 10주년을 바라보는 부부의 문제는 이 낭만 연애커플도 피해가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는 이제 자기 자신의 생각보다는 서로가 잘 아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고, 
더 이상 털어놓고 나누는 것만으로 끝날 수 없는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이 대부분의 대화를 잠식한다. 
앞의 두 편의 기억이 아련한 상태로 처음 비포미드나잇을 봤을 땐, 
쉴세 없이 잡다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좀 피곤도 했지만, 
연작으로 다시보니 그 대화들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 둘은 다른 무엇보다도 대화로 이어진 연인이 아니었던가. 
애틋함과 설렘,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라진 자리엔 
무게도 부피도 있는 실체적인 일상의 감정들이 역사처럼 쌓여 
더 이상 그들은 낭만의 세계를 유유히 헤어쳐나가지는 못하지만, 
언제든 쉽게 관계를 끊어버릴 법한 격한 감정의 발산조차도 
감정의 역사의 한 장으로 쌓아올리는 단단한 성숙을 이뤄낸다. 
다시 시작하는 그들의 마지막.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내가 셀린느라도, 
다시 돌아간 오스트리아 기차에서 제시를 따라 내리기를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 
어찌보면 더 깊은 낭만을 보여주려는 일상으로의 침투였는지도^^ 

해뜨기 전, 해지기 전, 한밤이 되기 전...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성취한 것으로 나이를 세며 
마치 그 순간이 결승지점인 것 처럼 표현하는데 익숙한데 반해, 
모두 before로 시작하는 연작의 제목은 
삶을,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정작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한 밤이 왔을 때의 그들의 삶은
영화 밖에 있지만,  
삶은 그렇게 계속 되고, 그러니 
남아있을, 오지 않은 것들을 계속 기대하라는 희망적인 부추김 같기도 하다.
  
PS. Before Sunrise가 만들어진 95년은 경제한파가 몰아치기 직전이었고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지도 몇년 지나 우리나라에도 배낭여행이 번져가던 때였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들 '만나면 뭘하냐, 말이 안통하는데'라고 한숨들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이 '현실적'이라는 절대신에 복종하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다시 본 낭만의 소소한 스케치가 보고 난 뒤 조금 울적하게도 만든다... 

2013 아람누리 마티네콘서트 5 - 건반을 타고 흐르는 낭만의 대서사시


기다리고 기다리던 콘체르토의 아침과 함께 막을 내리다...
내년은 All that String이라고 한다.


-모두 1악장만 연주-
라흐마니노프 2번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지만 또 다른 콘체르토의 세계를 구경했다.

첫번째, 스크리아빈.
박종훈이 아름다운 곡이지만 들을 기회가 별로 없어 아쉽다며 소개한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콘체르토 F # minor OP20은 연주되는 동안 곡번호를 외워둘 만큼 맘에 들었다.  



두번째, 드디어 라흐마니노프.
내가 이 곡을 들을 때 피아니스트에게 반하는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시작할 때-소리가 얼마나 단계적으로 깊어지는 지와 1악장의 클라이막스 직전-얼마나 영롱하게 또로록 구슬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지이다. 피아니스트 이효주에게 깜짝 놀란 건 어마어마한 파워. 즐겨 듣는 리흐테르 스타일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섹시하달까? 그 격정에 끌려 눈물까지 흘렸다. 1악장 뿐인 것이 아쉬웠고, 정말 멋진 연주라서 엄청난 환호와 브라보를 예상했는데 헐..이번 공연 관객들은 너무 얌전^^
독주회를 찾아가고 싶은 피아니스트.

세번째 쇼스타코비치.
트럼펫 에서 트럼펫과 피아노에서 결국 피아노콘체르토가 되었다는 2번. 이상하게도 스크리아빈과 쇼스타코비치에서 유난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의 소리가 따로 들렸다. 오케스트라도 매끄러웠고, 피아노도 좋았는데...왜 그랬을까.

네번째 차이코프스키.
들을 때마다 망아지 같이 건반을 열심히 달리던 소년 키신의 모습이 생각나서 일단은 웃으면서 듣게 되는 1번  콘체르토. 박종훈은 오케스트라에 잘 맞춰주는 피아니스트인 것 같다. 이 공연에서 가장 오케스트라 호흡이 좋았던. 1악장이긴 해도 워낙 긴데(리흐테르 버전은 무려 22분) 연주 끝나고 숨을 몰아쉬는 박종훈을 보니 그동안 여러 번 얘기하긴 했지만 정말 그동안 큰 일했구나 싶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짝짝짝~~~

(중간에 짤림...)

다섯번째 프로코피에프.
아마도 이런 극적인 분위기 때문에 발레음악을 많이 작곡한 게 아닐까? 듣는 동안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밝은 성격의 주인공에게 극 초반 갑작스런 시련이 닥친다.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다가온 익살스런 친구의 충고. 충고를 따르는 주인공에게 다시 닥쳐오는 또 다른 시련. 힘겹게 헤쳐가다 포기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펼쳐지는 행복한 평원-뭐 이런 거^^ 어느 대목에서 발레리나가 달려나와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던 음악. 김영호 피아니스트는 박종훈이 20년 전 듣고 바로 악보를 사서 연습하게 만든 연주자라고 한다. 연주자도 관객도 기억하는 공연이라니 듣기만 해도 멋지다.

박종훈의 앵콜은 항상 겸손하게 시작해서 즐겁게 끝나는 열린마당이다. 관객들에겐 아쉬움을 달래주는 뒤풀이지만, 연주자들에겐 사귐이 시작되는 인트로 같은 느낌? 오늘은 마지막 러시아민요 앵콜을 두고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가위바위보를 했다(김영호 피아니스트가 젤 귀여웠음^^).
차례로 두손, 네손, 여섯손, 여덟손이 될때까지 반복되던 멜로디.
2월 시작공연만 해도 언제 10월이 올까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아쉽다.

두달만인데도 가을이 깊어져서인지 달라진 아람누리 풍경.
예전을 떠올려보니 어마어마한 변화가 느껴진다. 5년 전 공연장은 피아노콩쿨을 앞 둔 것 같은 꼬맹이들과 보호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새 공연장은 중년들로 가득 차 있다. 혼자 오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지만, 특히 해가 갈수록 연령이 높아지면서 부부가 함께 오는 모습이 늘고 있다.
덩그마니 놓여있는 공연장이 아니라 동네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세월을 쌓아가고 있는 느낌.
가까이 있어 더 즐거운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