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The Way We Were|1973

from http://www.celebuzz.com/photos/most-romantic-movie-quotes-of-all-time/the-way-we-were/
생각해보니 나 은근 로버트 레드포드 DVD 쫌 있네.... 
잘 생겨서 무시했는데 분위기가 정말 매력적인 미남....


불쑥 '원데이'가 떠올랐다.
원데이는 더 많이 드러내면서
성큼성큼 지나가버렸지만.

온전한 자신을 욕심내면
사랑에 실패한다는 명제를
아주 강렬하게 '참'으로 각인시키는 영화.
그 밖에도 똑똑한 여자는 남자가 못 견딘다 거나
여자가 좋아하는 건 소용 없다거나 등등
참 우울한 직관을 사실처럼 새겨주기도 한다.
사실 케이티는
폭풍애정표현을 빼고는
자신의 방식을 바꾸려들지 않는
고집불통 아버지 스타일인데.

전에 봤을 땐
케이티가 이렇게 허블을 많이 좋아했는 지 몰랐다.
근데, 아무리 사랑해도 안되는 거죠, 함께 할 수 없으면.

노래를 찾다가 삭제된 장면 동영상을 찾았다.
나도 이 장면들 삭제 반대~~!



파파로티2013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편견이 너무 쎘던가.
윤종찬은 윤종찬이되 왠지 심기일전에만 힘을 모아 이전의 윤종찬이 아닐 것 같았으며
한석규는 한석규이되 힐링캠프 출연 부터 이전의 한석규가 아닌 것도 같았으며
들려오는 소문속이 이야기는
7번방의 기적과 쌍벽을 이룬다 하니
감동의 마음가짐을 닦고 들어가
준비한 감동을 받고 나오기 싫어하는 마음이
셕규형님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보다 컸던 모양인지
생애 최초로
석규형님의 영화를
빤히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극장에 걸린 시기를 지나
결국 굿다운로더의 한 사람이 되어 보고야 말았다.

한가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건
내가
음악영화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에 약하다는 것이었으니....

처음 20-30분은
그래, 이럴 줄 알고 극장가기 싫었어-가 생각나는 클리쉐들의 연결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정한 커플이 된 그 순간 이후로는
무방비상태로 울고 웃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게 된다.
흔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람, 나도 저 둘이 부러운데.
두 사람의 인생이 실린 노래를 듣는 것은 역시나 짠했다.


상진도 장호도 배우라면 탐났을 인물.
석규 형님, 이번엔 욕망에 충실하셨던 거군요.
..난 죽었다 깨나도 너 못 따라가...
이 대사를 할 때 어떤 표정이었을 지
몹시 궁금. 
다만, 피아노 장면의 기능적인 연기도 좀 더 신경 쓰셨더라면
형님의 애정이 더 찐하게 전해졌을 것 같아요.
내멋대로 해라에서의 신구 오라방보다는 좀 나았지만요.
하지만 파파로티는
빌리 엘리엇보다는
호로비츠를 위하여 였답니다.
하긴 호로비츠를 위하여가 빌리 엘리엇일지도 모르겠네요.


형님 주름 신공 한장
 
동생 살인 미소 한장
파수꾼 전엔 대체 어디 있었던 겐가....이 청년은...!
 영화속엔 없지만 장호의 마음을 한 컷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일 것 같은.
형님은 등짝도 열연하고 계셔^^

지나치기 섭섭한 중간 형님도 한 장
큰형님은 흔적을 안 남기셔...

이것은 한석규 이재훈 버전의 행복을 주는 사람


Nessun Dorma Three Tenors 1994 Carreras, Domingo, Pavarotti
소리통이 남다른 파바로티가 돋보이는 3테너의 무대
아무리 잘생겨도 소리에서는 밀리는 까레라스와 도밍고^^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만의 어쩔 수 없는 후유증 측정법은 
그 영화를 얼마나 오래 검색해보는가 인데..
그러다가 TV영화소개 프로그램 중 이동진의 언급을 듣게 됐다.
이제훈이 폭발에 강하고 코믹에 어색한 배우라는 것,
조폭과 음악의 어색한 만남이라는 평은
굳이 이 영화를 보기전에도 대강 짐작가능한 
(내가 이 영화를 결국 극장에서 보지 않았듯이)
너무나 전형적인 감점 요인 아닌가?
적어도 돈 안내고 영화를 보고 
그 영화 감상으로 밥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좀 더 촘촘한, '감상'이 아닌 '비평'다운 한 마디를 기대한다.
특히 적극 반발하게 된 부분은 
립싱크는 클로즈업이 꽝이라는 단정이다. 

노다메 칸타빌레 인물들을 놓고 
실제 연주가들이 가장 연기 잘한 사람을 뽑은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실제로 피아노를 많이 연주했던 노다메양이 꼽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들의 선택은 치아키였다.
이유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와 지휘를 열심히 소화했다는 것.
(연주자들이 다 여자였던 것은 아님!)
밀양의 전도연을 떠올려도 그렇다.
전도연은 거기서 완주에 노력하기 보다는
잠깐이어도 진짜 선수 같은 손목을 보여주었다.
내가 석규형님의 손목에 아쉬워 하는 것은
그 정도는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훈은 어디로봐도 테너가 되기에는 약한 몸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윤종찬은 실제 인물인 김호중보다는 훨씬 가는 목소리의 강요셉을 선택했고,
이 정도 입맞추기라면 
클라이막스가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라이브든 립싱크든 
극장에서 소리는 스크린이 아닌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예전에 필모그래피를 꿰서 만든 질문으로 인터뷰할 때의 성실함은 어디로 가고....
평론가들도 평론받을 필요가 있다^^ 


구가의 서|2013


from enews24
1.
처음엔 행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담이의 비명을 뒤로 하고
버텨달라 독백하는 행수는
결국 서화를 싸고 돈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서화의 기개가 지켜주고 싶은 이유었다면
담이의 의리와 희생은 왜 이유가 되지 못할까.

아마도 담이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담이는 종년이라서
다 내어준 댓가가
한마디 감사의 인사였다.
고맙다-는 우체부아저씨 에게도, 물건을 사면서도, 전화를 끊으면서도 하는 인삿말인데
담이가 들은 '고맙다'가 뭐가 특별했는지
알 수 없다.
정말 무신경하다.
그냥 월령만 기억하자!
(그리 오래 살며 인간 세상을 기웃거렸담서
천수련에 빠지지 않았다니,
서화는 예뻐서 넘어간 게 아닌 걸로^^)

김태희와 비교할 사람은 수지가 아니라 이연희.
여기서는 외적인 환경의 영향이 더해져
짜증나는 민폐캐릭터에 은혜도 모르고 에미노릇도 꽝인
최악의 멜로주인공에 등극.
인물에 빠지기보다 카메라만 똑바로 쳐다보는 그 버릇 못고친다면
언젠가는 이뻐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 .

어디선가 본적있는 이야기들에
본 기억 안나는 것 같은 새 것을 살짝 섞어내는 장인 강은경의 드라마.
오랜만에 보는데
오홋~ 1단계,
쳇, 이럴 줄 알았어 2단계를 거쳐
지금은 착한 드라마의 기운을 느끼며
이쁜 커플의 재롱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인물을 볼때는 좋지만
좀 없어 보이는 연출에 왠지 웃음이 나던 액션장면들도
쫌 쫀쫀해졌다.

2.
오늘 강치는 배운 도둑질을 연애질에 썼다.
가위손 에드워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학교가서 무서운 가위오빠가 됐다가
정원사가 됐다가
미용사도 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적극적인 구애활동에 재주를 사용하고 만 것!
수지의 매력은 (요즘 퓨전사극들이 경계를 없앤 덕일수도 있겠지만)
감정의 순간은 보여주는 그대로의 느낌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인간극장의 감동같은 느낌~

일상적이지 않은 대사들에선 맘껏 어색어색한데도
여전히 이승기와 수지의 연기를 칭찬하는 건
어찌보면 아직 이 둘을 연기자로는 인정안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몫은 이쁜 장면을 이쁘게 만드는 것-까지라는 거겠지.
하지만 수지가 약간 기대되는 건 발성때문이다.
게다가 참 오글거릴법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하는 걸 보면
속에 뭐가 들었는지...ㅋ

찰랑 거리는 청년들 틈으로 돋보이는 분들이 많은데
그 중  볼수록 빠져드는 죽 할배 이도경!
사진 한 장 없으니, 이거라도...
월령에게 너무도 허망하게 지셨쎄여, 사군자 라면서...


3.
근데 월령, 
끝까지 자네 편이었던 소적이 있는데도
여자사람 한명이 배신했다고
그렇게 삐뚤어져도 되나...
게다가 요즘은 최악의 아부지 ㅎ
아빠가 다 해 봐서 아는데
다 집어 치웟! 안 그럼 다 죽는다!
철없는 애비지만 
섹시해서 봐줌^^

4.
어제 오늘 월령의 미스테리가 쫌 풀리긴 했는데
아들 손에 죽겠다니 이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만약 성공한다면 아들 눈 앞에서 커플로 자폭하신 영화 비천무의 성이네 부모를 능가할 터..
하지만 오늘의 큰 반짝은
질질 끌법한 갈등은 커녕,
식상한 형식적인 까탈까지도 시원하게 건너뛰어 버린 강치와 여울.
부모를 극복 하려는, 그리고 상대를 의심하지 않는 둘의 단단한 믿음은
출생의 비밀 드라마의 혁명이다. 

르 아브르|Le Havre |2011



착한 버전의 브레이킹더웨이브 같은 느낌.
그래 그 이야기는 이렇게 콩쥐스타일로 변신할 수 있었어.
노년이라서 성숙한 사랑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돌봄을 받아본 사람들 사이 따뜻함의 전염으로 보이기도 했다.
노숙자를 품어준 이방인 아내의 애정은
구두를 닦는 게 일인 남편의 구두를 닦아주고
그녀의 빈자리는 또 그의 새 친구가 잠시 채워주고.
다만, 카우리스마키의 유머감각이 약해진 건 아쉬움.


연극|만선(자유연극시리즈)|2013

 



자본의 욕망이
가난의 욕망은 잡아먹는
슬픈 동물의 왕국.
60년대가 배경이라서인지
딸이 팔려갈 밑천으로 등장하는데
오랜만에 보는 이 어이없는 설정이
또 꽤 슬프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배우' 스타일의 두 마초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지만,
찰진 연기를 보여준 황영희,
이상하게도 눈물나게 만들던 이진희,
지주의 재현 김재건,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단 한번의 앵콜커튼콜도 없던 일요일 무대,
배우들이 좀 섭섭했을 듯.


1박 짜리 제주


















이름은 촌스러워도 볼만한 에코랜드,
-이름처럼 산 안다치고 만든 것 이길..
안팎이 다 어여쁜 김영갑 갤러리,
낡았지만 경치 좋은 해비치.

살인 당나귀(은교)|박범신


집을 둘러싼 소나무숲은 한겨울에도 여전히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보다 몇 배나 오래 산 노송들이다. 저것들이 좋아서 이 집으로 들어왔지만 이젠 시들 줄도 모르는 저것들의 그늘이 지긋지긋하다. 저것들의 뿌리는 지금 오래된 이 집 전체를 동여매고 있을 것이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계속됐다. 고요하면서도 밝은 나팔 소리 같았다. 햇빛 한 점이 소녀의 뒤꼭지에서 쨍 했다. 발빠른 어린 짐승 같았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 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젊은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섹스에 대한 아무런 환상이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연스럽게 그것을 ‘다스리면 된다’고 여겼다. 섹스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섹스의 욕망에 끌려 스스로 누추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은 어디든 있었다. 나는 그런 자들을 경멸했다. 어째서 한 뼘도 안 되는 살덩어리에게 몸 전체를 내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섹스의 욕망을 나는 평생 동안 아침이 오고 나면 저녁이 온다는 식으로, 자연의 사이클에 맞춰 다스렸다. 필요하면 남몰래 여자를 샀고, 사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때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다. ㅡ셰익스피어, 『햄릿』중에서. 

 그 애가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르게 거실 앞을 돌아 목제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 발걸음을 내딛고 나자 망설임이 없었다. 목제층계는 쫑, 쫑, 쫑, 울지 않고 통통통, 울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그 애, 제 그림자를 톡톡 차면서 숲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골목을 걸어 나가는 그 애가 떠올랐다.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길게 엎드렸다. 갑자기 가슴 한 켠을 어떤 단검이 깊게 에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을 따라 물처럼 차오르는 건, 슬픔이었다. ‘눈 감으면 송장’ 혹은 ‘썩어가는 관 같은’ 나는, 그래서 엎드린 채 조금 울었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통했다.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문덕수(文德守)의 「침묵」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수록 분노가 내 속에서 놀라운 폭발력으로 빅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보들레르는 노래했다.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C. 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감각이 무딘 그로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제가 알고 싶은 것을 내 표정에서 읽어낼 수 없었을 터이다. 그 애가 한 지붕 아래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달콤했다. 왜 그 애를 열렬히 품에 안고 자고 싶지 않았을까마는, 그런 욕망이 있었을지라도, 그런 욕망을 수습해 곱게 간직하는 일이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그 애에 대한 어떤 욕망도 나의 본원적인 달콤함에 장애는 되지 않았다. 저 위에 그 애가 있다, 라고 나는 잠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아침이면 통통통, 작은 북소리를 내면서 내려와 그 애는 내 귓가에 대고 청명하게 우짖을 것이다. “할아부지, 밥 먹어요!” 평생토록 그런 아침을 맞은 적은 없었다. 또 평생토록 꿈꾸어온 아침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전에 냉장고를 몇 번이나 열어보며 그 애의 아침 식탁을 무엇으로 어떻게 차릴까 궁리하다가 잠들었던 것이었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정갈하고 정다운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메뉴가 떠올랐다. 양식으로 할까, 한식으로 할까. 나는 한밤에 주방과 식탁을 닦고 치우며 생각했다. 식탁을 거울처럼 닦았다. 남비들도 닦고 식기들도 다시 씻었다.식탁의자를 그애가 앉기 좋게 맞춤하게 놓아보기도 했다. 비오는 한밤에, 이층을 가끔 올려다 보면서, 히죽거리기도 하고 상기되기도 한 상태로 주방을 치우는 나를 누가 보았다면 살짝 미쳤다고 했을 터였다. 메뉴를 무엇으로 하든, 그 애보다 좀 일찍 일어나 시내로 나가 찬거리를 사와야겠다고, 잠으로 끌려가면서까지 계속 생각했을 정도였다. 비로소, 관능과 욕망이 언제나 비례해서 나아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달리, 그애를 내게서 '저만치' 떼어놓고 들여다 보는 일이 조금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숨을 멈춘 듯한 긴장을 가지고 그 애를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이 불편하기는커녕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달콤했다. 달콤하게, 나의 사랑이 끝간데 없이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관능을 오히려 그때 나는 느꼈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과 연민의 완전한 합일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의 일방적인 승리일까.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서 
부정(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불행이 있다. 
―P. 엘뤼아르의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사실 책을 산 것이 아니라 박범신의 블로그에 연재된 내용을 읽었다. 
원제는 어딘가 미스테리의 느낌이 난다. 
안 봤지만 영화는 '은교'라는 제목이 당연히 잘 어울릴 것인데, 
살인당나귀와 은교 중 소설에 더 맞는 제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은교와의 조우는 인상깊다.  
이적요가 시를 쓰듯 순간을 잡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우에 대해선 가차 없다.  
이미 가족같은 관계에서 돌이켜보는 시간이기도 하려니와,  
부푼 감성의 연정과 어지간해서는 꺼내놓지 않는 정의 정서의 차이랄까. 

읽기 전 롤리타 컴플렉스 때문에 이 소설에도 편견이 있었다. 
이적요의 사랑은 다행이 영화 '데미지'와는 달랐고, '연인'과도 조금 달랐다.  
게다가 머릿속의 생각과 상관없이 나는 
이적요가 은교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등산길에서,  두 번 이별할 때 
두 번 모두 은교의 말에 울컥했다. 

이적요. 
인간적인 모욕은 참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욕망에 대한 모욕은 힘겹게 참아낸 노인. 
그의 사랑이 손을 잡는 것,  
관능과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랑을 기린 것에서  
이런 사랑도 사랑이다-라는 평범한 명제 이상의 감성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지 전략으로 삼았다는 시인의 인생에도  
사고파는 섹스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눈높이는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고하고 순결한 외피를 내세우더라도  
 남자라면 응당 그렇다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서지우같은 단순무식한 순정파라도 남자라면 이 정도 성일탈은 기본인가. 
노인의 욕망에 대해서라면 이미 
코엘료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아흔을 넘긴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욕망을 추하다고 여기는 통념에 대한 한소리라면 몰라도 
특별한 시인 이적요에 대해서라면 좀 실망이기도 하다.  
한 뼘도 안되는 살덩어리라고 불렀으면서  
그 역시 그 살덩어리의 비행에 인생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몰아부친 것이나 
늙음에 대한 모욕에 사랑까지도 이용해 복수하겠다는 결심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빛나는 순간들을 전하는 문장과  
몇 번 사전을 찾아봐야 했던 단어들과의 만남, 
청년 박범신과의 만남은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든 힘이 있었다.  
박범신의 비겁해서라는 부언이 안타까울 만큼  
그 환상속의 사랑도 좋았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시와의 만남. 
앞으로 읽을 시에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은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는 알 수 없다. 
이적요과 서지우의 시선이 비껴가는 사이  
그녀는 항상 두 사람과의 삼각형의 꼭지점에 세워진 대상이었으니까. 
어쨌든 마지막은  가장 슬픈 서지우의 죽음에 애도를.

오늘 뉴스 속의 박범신
이렇게 밖에 연명할 수 없는 문학인생이었다면 청년임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