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F|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


왜 고행과 수도에는 항상 '침묵'과정이 있는지 알겠다.
지켜보는 것 조차도 어렵다..정말.
그들이 대화하는 잠시 그 경건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순간을 보고 나니
침묵은
경건해지고 싶은 인간들이 깨달은 마지막 통과의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의 가장 손쉬운 발산.
아마 굳게 다문 입술을 다스리는 그들은
그 욕망을 승화시키는 방법도 배우고 있으리라.
어찌보면
절대의 사랑을 일찍 깨달아
영혼까지 닦는데 인생을 다 써버리겠다는
또 다른 이기적 결심의 주인공들일 뿐인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사는 본보기로서
어느 순간 누구나의 삶에 크게 다가간다는 것이
과연 그들에 삶에 대한 합당한 평가인지......
사계절을 나는 그들의 일상은
텃밭을 가꾸며 사는 시골노인들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름진 얼굴의 수도사들도
그 노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은 삶을 따라가며,
그 삶의 흔적은
어디,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 있는 것임을 살짝 일러주고 간다.
보기에는 무척 기나긴 시간이기는 하지만--;;

EIDF|Sicko|2007


보통은 낄낄거리다가 마지막에 정리 좀 하는 것이 마이클 무어영화에 대한 보통 나의 태도이지만,
이번에 좀 눈물이 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치료였을 뿐인데.
 
무상급식 때문에
자유주의 미국의 맹방 혹은 호구인 대한민국에서도
이젠 낯설지 않은 사회주의 논의.
공산주의가 뿔달린 공산당의 사상이라서가 아니라,
그 우아한 목적은 현실적으로 실패하고
최악의 억압수단으로 전락해 처절히 패배했듯,
이젠 더 증명할 필요도 없이 우월한 제도로 인정받은 민주주의도,
누구네 집에서 빌려왔든
좋은 것을 잘 먹여 키우면 되는 것이다.

이따금 무어의 영화속에 등장하는 미국시민들의 순진함과 무지함이
아마도 안티 마이클무어 세력의 힘이 아닐까 짐작은 되지만,
사실 미국의 힘은
이렇게 미국을 사랑하고
사랑을 열렬히 표현하는
개별적 애국자들에게 있다고 본다.
수사로 치장하며 연기하는 상원의원들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희망과 변화를 주니까.
그의 블랙유머가 냉소적으로 보일진 몰라도
냉소주의자는 이렇게 돌아다니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바라볼 뿐.
호기심 많은 낭만적 애국주의자랄까..?

과감한 과장과 편집을 쓰면서도
슬프고 분한 상황의 본질을 흐리지 않으며,
사람들의 집중력을 꼭 잡아두는 그의 유머감각도 여전하다.
이제 몇 편의 다큐를 통해 그는
그의 이름을 빌려 보험사 CEO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생활속의 후계자까지 탄생시키지 않았나, 하하하^^

정말 구석구석 어디하나 돈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본주의 순수혈통이자 병폐의 전시장인 미국에서 나고 자라
촘스키와 하워드진이 끊임없이 비판하는
부실한 시스템의 교육을 받았는데도
911테러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들고,
미국민으로서의 자의식과잉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진심으로 전세계 재난과 재앙의 희생자들에게 선한 마음을 보내는
정의로운 개개인들의 맥이 끊기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정의가 이긴다"거나 "착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냉소주의자들의 반찬 같은 명제가
계속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런 정의로운 국가나 조직은 영영 세상에 없을 지 몰라도
그래야
그 명제가 거짓인 현실에서
그 좌절에 똑같이 분노하며
참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아름답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또 태어날테니까.

EIDF|딸에게 보내는 편지|The Kids Grow


어쩌면 영화같은데서 봤던
평범하고 다정다감한 미국가정이 등장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극적인 상황, 독특한 삶, 아니면 전쟁같은, 치열한 진지함의 무게를 벗은,
잔잔하지만 일상에서는 제일 소중한 '관계'를 찬찬히 짚어간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기에 '사랑스러운' 부모들.
그런 아버지 조차도
자신의 이기심과 딸에 대한 애정을 함게 인지시키는데에는 실패해서
중간에 이 영화는 심각한 제작위기를 맞기도 했다.
루시도 어릴 적 그렇게 좋아하던 '사진 찍히는 일'이
하루아침에 싫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딸과 카메라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들뜬 아버지가
여러 번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사랑을 만끽하는 동안
아마도 세상고민을 다 짊어지면서
'혼자'였을 어머니의 지쳐보이는 얼굴은
그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킬만큼은 그녀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말,
천진난만하게 늙어가는 배우자 옆에서
혼자 지친 그들의 짝의 얼굴을 보다보면
내마누라, 내남편이 아니어도 난 화가 난다--;;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다른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감독이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결말에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났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신선하지만
우리는 하다못해 지루한 TV다큐멘터리 어디에도 기본으로 깔려있는 그 정서.

충격실화들 속에서는 그래도 짦은 휴가같던 영화.

방자전|2010

음란서생만큼이나 멋진 포스터

솔직히,
하도 졸아서,
뭐 길게 할 말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다들 괜찮은 캐릭터들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지루했을까...싶기만 하네.
그저 음란서생에서 못벗긴 한을 여기서 다 풀었나 싶기만 할 뿐.
계급이고 뭐고를 떠나
연정에서 수컷전쟁을 거쳐 사랑으로 넘어간 것도 어쩔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이었다 쳐도,
결국 그 정인을 뒷방에 앉혀 놓고
본인은 전설의 건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까지 이해한다 쳐도,
그랬으면 순정으로 포장하지는 말아야지.
그냥 돈 많이 벌어서
업어주기 머슴하나 고용하지 그래, 순정남 행세따윈 집어치우고 말야^^

음란서생에서 김대우라는 사람에 호감이 생겼다고 한다면
방자전은 못난이수컷의 그림자를 한껏 드러내주는 것 같았다.
뭐 모르는 사람이니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결국 흥행은 노출인가...안타깝네...
게다가 오랜만의 승범을 그렇게 무난하게 방치하다니...
김대우는 내게 즐거움이 될 감독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한 줄기 및-변학도

EIDF|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The Cove|2009


건강하지 않은 괴로운 환경에서 자란 소가 해로우니 먹지 않겠다는 채식주의자,
이렇게 다 잡아먹다가는 다 사라질테니 좀 살려둬가며 천천히 오래먹자는 해양자원보호가,
이들이, '보호'하자는 존재의 생존권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한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살려달라고 달려오다 죽어가는 생명을 본다면
그게 꼭 붉은 피를 흘리는 동물이 아니라
진액을 온몸으로 뿜으며 폭발해 버리는 나무라 하더라도
마음이 아픈 일일 것이다.
그렇게 코브는
왜 돌고래만 안되냐는, 예상 질문 1위를 가뿐히 젖힌다.
아주 개인적인 교감의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들의 관심은 설득력이 있었다.
이들이 비난하는 것은
작은 어촌마을의 측은한 사양산업 종사자들이 아니라
본의는 아닐지 몰라도 무심하게 유지하고 있는 세계 제1 돌고래수출단지의 권력자들인 것이다.

전통이라 하기에는 보편성이 없고,
현실적으로도 불법유통이 되며,
식품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는 제품을 고집스럽게 생산하는
'적'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확인시켜주고
사실에 근거해 전방위로 공격하는
이들의 접근 방법도
힘이 있다.

예스맨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보여주는 정의감의 실천은 참 놀랍기만 한데
공감도에 따라 늘 아름다와보이지 않기는 해도
분명 가치있는 일인 것 같다.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경탄을 받을만큼 지능이 있는 존재이기에
더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 고민스럽게 남았다.
그럼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은?
지능을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생명체는?

'지구를 구하자'는 표어에 일침을 놓던 누군가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어차피 지구야 태어날 때 그랬듯이 피곤하면 폭발해버리면 그만인데
결국 인간들이 지들 살자고 환경보호를 외치면서 양심자연 한다는.
하고 있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지나치게 포장될 때 거부감을 느낀다.
게다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양심의 문제는
따라가는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괴로와진다.
이쁜 돌고래를 먹는 것, 혹은 존중할만한 생명체를 먹는 것 뿐 아니라
독성이 있는 식품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같은 충격을 주는 현실에
이들은 만족할까?

어차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다.
그래서 교감을 느낀 사람들의 눈물은 진심으로 와 닿는다.
하지만 궁극적인 환경보호의 표어는 너무 고차원적이다.
산이 괴로와 하니까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가 아니라
냄새나고 불쾌감을 주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고 하는 게 어떨까.
그냥 지구를 사랑한다고 하지말고
"우리 적당히 해먹고 삽시다, 나중에 굶어죽기 전에"
라고 솔직히 외쳐주면 안될까?

인셉션|Inception|2010

예상치 못했던 꽃밭이라니^^

중반의 살짝 지루함을 말끔이 씻는 엔딩.
다크나이트의 'CUT TO BLACK'만큼이나 적절한 타이밍의 컷.
엔딩전문가라 부른다면 본인은 섭섭할까?
건물로 친다면 단순하게 4층짜리인지 혹은 100층이 넘는 것인지 알수 없는 층층꿈세계.
내가 정작 궁금했던 건
뭐가 진짜인가 보다는
(맬은 인셉션의 성공한 마루타라 치더라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이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기구한 처지의 코브가
맬의 초대를 거부했던 이유였다.
그는 진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돌아보지도 않을만큼
'레알'에 집착하는 사람인가?
남의 꿈에 들어가 아이디어를 심거나 추출하는
'형이상학'적 직업인으로서는 좀 모순이 보이는 설정.
꿈속에서 만나는 맬 또한 자신의 상상속에 조합물이니
그런 존재가 끊임없이 설득하려 드는 건
자기도 끌린다는 뜻 아니었나?
하지만 가장 허무한 건 모든 시작이
라이벌을 두려워하는 사업가의 제안이라는 점이다.
협상할 배포도 없는 사업가가 미지의 꿈세계로는 잘도 뛰어들더군.
위험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짧은 언쟁으로 넘어가는 건 놀란 답지 않게 허술했고,
닥친 위험과 박진감이 넘칠수록
그 동기와 목적에 비하자면 감당할 가치가 없는 목표인데.
코브의 귀향이 목표였다면
사이토는 그냥 설레발만 좀 쳐준 거?
다크나이트 이후의 첫 영화라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의 소품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다지 잔 근육이 다져진 것 같지는 않다.
아이디어랑 관계있는 영화인 건 맞네^^
음악 중에서는 조커의 테마와 좀 비슷한 게 하나 있어 반가왔음.

처음보는 진공액션,
비행물체를 비행해서 찍는 카메라,
무슨 한 맺힌 사람처럼 실컷 등장해주는 부감,
기차의 도로습격.
볼거리의 성찬이긴 한데
어쩐지 촘촘함이 줄어든 것 같아
특A급배우들로 연출한 B급영화 같았다.
암튼 최고는 팽이 엔딩~

앗, 또 하나의 즐거움-꽃밭의 향연.
500일의 써머에서 이름을 기억시켰던 조셉 고든 래빗:  표정은 여전한 것 같던데 스타일은 쫌 아니...
주노의 발칙한 주노 엘렌 페이지: 이 처자는 다른 물 건너 처자들과는 완전 다른 매력이 퐝퐝~
낯설지 않지만 어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톰 하디: 섹시하다 말씀드리겠어요!
퍼블릭 에너미의 히로인 마리온 꼬띨라르(맞는 발음이길): 국적불명의 마력을 지닌 여인으로 재회
그리고 디카프리오.
이젠 정말 우리 같이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감성과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뽐내던 '아저씨' 직후가 되고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의 쿨함이 두드러져 보인다.
하고픈 이야기와 짜임은 있지만
감정은 들이지 않는 냉정한 영화.
뭐, 이 정도라면 둘 다 감사하지만^^

아저씨|2010

 

예상했던 것

원빈의 폼나는 화보-말이 필요없지만...난 머리밀기전 커튼 드리운 얼굴이 더 좋아~

대사를 절제한 원빈의 눈빛연기-대사가 참 없다...^^

시원한 액션-맨손, 총, 칼까지 등장하는 다양한 육탄전. 오랜만에 보는 맨손싸움이 젤 멋짐.         

스토리-초반 여자어린이의 신파와 별안간 응징자로의 변신이 좀 까슬까슬했지만

          증폭되는 액션에 어울리던 스토리였던 듯.

 

예상외의 것

모든 조연의 빠짐없는 호연-어떻게 단 한명도 빠짐없이 감탄스러울수가...!

카메라-맨손싸움 장면을 가슴높이에서 정면각으로 잡은 앵글. 만화에서만 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찍었을까?

디테일한 범죄의 재현-정말 무서운 세계다....

강력한 초지일관 캐릭터-죽기직전까지 자신의 개성을(^^) 불태운 놀라운 캐릭터 열전

 

흥행에는 이유가 있구나 싶다.

예상대로의 것도 물론있지만 예상외의 것들이 주는 더 큰 즐거움.

오빠라고 불러주면 쓰러지는 아저씨들이 천지인데

굳이 아저씨를 자청하는 꽃돌이오빠의 도전.

남자배우라면 이런 화보 하나씩은 갖고 싶을거다.

혼자 쓴 시나리오 같지 않았는데 크레딧에는 단 하나의 이름 뿐.

뭔가 슬픈 이야기가 숨겨져있는 것은 아니길.

어린이 여러분.

이런 아저씨가 있을 확률은 거의 0이지만

성추행범은 많이 있으니

아저씨들하고는 놀지 않도록 하세요...

참 슬프군요.

 

 

 

마지막 충알을 쏠 때의 표정-이와 비슷하나 이보다 멋졌던

어색함이라고는 전혀없던 김희원에게서 어색한 장면을 찾아낸 스틸의 놀라운 재능

이 머리가 더 좋았다는 거죠...^^

얼굴도 좀 닮은 것 같은데 제2의 손현주를 기대하게 하는 이종필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

열연에 대한 무례로만 기억될 영화

어디까지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걸까.
그리움? 이끌림?
그런 아릿함에 대한 이야기라 보기에
이들은 너무 거칠다.
단지 욕과 육탄전이 몸싸움이 넘쳐나서만은 아니다.
헤어지는 혹은 헤어졌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이 떠올렸을 서로의 얼굴이 무엇이었을지
영화속에서는 대체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작은 통증을 일으키는 그리움이 되고 싶은 추억에 대한 욕망도
살아있는, 순간의 공명이 필요할텐데
이들의 전쟁같으면서도 질긴 연애는
그 공명을 관객과 나누지 않았다.
함께 있는 순간조차 멍투성이면서
대체 이들은 뭘 그렇게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걸까.
굳이 물건이란 범주를 벗어나도 된다면
이들은 그저 집착증 환자인 것만 같다.
아쉽게도 당신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었을 뿐이죠.
어쨌든 제목에서도 사랑을 쓰지는 않았지만
사랑이 아닌 연애였기에
사랑을 더 기대하게 만들면서
결국은
심약한 마초와 상처많은 생활녀의
물고 뜯는 '연애'라......
 
수 년을 떠돌던 '끝내주는 책'이 죽는 게 아까워 영화를 찍었다는 김해곤.
감독보다는 차라리 연기자로서의 재능이 더 아까울 지경.
기괴한 촬영이 한둘은 아니지만 마지막 장면의 트랙백에서는 실소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감독이 별거든 별게 아니든
어쨌든 특정 기능이 필요한 직업인 것은 사실인데......

사회학에의 초대-인간주의적 전망|피터L.버거

따라서 사회학이 지향하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적으로 제약된 수단이 허용하는 한에서의 순수한 인지 행위이다.

현시적 기능은 사회적 과정의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기능이며, 잠재적 기능은 무의식적이며 비의도적인 기능이다. 그렇다면 도박금지법의 현시적 기능은 도박을 금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잠재기능은 도박조직을 불법적인 세계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

사회학의 정체폭로동기는 말의 연막(verbal smoke screen)을 이처럼 꿰뚫고 들어가서...때로는 불쾌한 주요 동기에 도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사회학적 문제는 당국자와 사회적 상황의 관리의 관점에서 어떤 일이 왜 `잘못되고`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로 체계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 전제는 무엇이며 그 체계전체가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사회학적 문제는 범죄가 아니라 법이며, 이혼이 아니라 결혼이고, 인종차별이 아니라 인종적으로 정해진 계층이며, 혁명이 아니라 통치이다.

사회학자가 해결하고 싶어하는 `문제`는 양쪽의 사회체계속에서의 가치와 행동양식, 두 사회체계가 공간과 시간속에서 공존하는 방식 등 사회상황 전체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다.

성숙은 정착해서 현재의 상태와 타협하였으며 아울러 모험과 성취의 무모한 꿈을 포기한 마음의 상태이다.

개인은 사회속에서 즉 사회적 통제의 체계들 안에 위치하며 또 이 체계 하나하나는 정체성을 발생시키는 장치를 수반하고 있다. 가능한 한 개인은 그의 대인관계(특히 친밀한 관계)를 과거에 그에게 만족을 주었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예컨데 그가 하는 말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처녀와 결혼한다든가, 그를 재미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친구로 선택한다든가, 또는 그를 정력적인 인간으로 인정하게 하는 직업을 택하든가 하는 방향으로-조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그러한 조종이 불가능하다...편견이 한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은 그를 그에 대한 편파적인 이미지가 규정하는 인간이 되게끔 한다는 것이다...얼굴을 비춰볼때 눈을 흘기는 괴물의 얼굴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진 거울만을 들여다보도록 강요받은 인간이 그 자신도 전에는 다른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그는 다른 거울을 가진 사람을 미친듯이 찾지 않으면 안된다. 이 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사회적 승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고의적인 기만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상당한 정도의 자제력을 필요로 한다. 위선이 오히려 드문 현상은 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리부동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것이 심리적으로 취하기가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믿고 있고, 전에 한 행동을 편리하게 잊어버리며, 인생의 모든 욕구에 대해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확신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성실성은 자신의 행위에 자기가 속는 인간의 의식이다.

어떤 관념이 사회의 어떤 기득권에 봉사할 때 우리는 이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려는 도덕적 노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ㅇ훨씬 더 쉽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거짓, 기만, 선전 또는 속임수 등의 개념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말장이는 그 정의대로 자신이 거짓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데올로기 신봉자는 그것을 모른다. 대부분의 모의설(謀議說)은 모의자들의 지적인 선견(先見)을 심히 과대평가한다.

`잘못된 믿음`은 실제로는 자발적인 어떤 것을 필연적이라고 핑계대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된 믿음`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선택의 고통`을 불성실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체계에서는 세인이라는 개념이 진실함과 진실하지 못함에 대한 그의 논의와 관련이 있다. 진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체성의 독특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또 비길데 없는 성질을 완전히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실하지 못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성을 사회적으로 구성된 추상적 관념에 넘겨주면서 세인의 익명성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는 방식에서 특히 중요하다. 사실 죽는 것은 항상 하나의 개별적이며 고독한 개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각각의 죽음을 그것의 공포를 완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적인 범주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유족과 또 그 자신들도 죽을 운명인 사람들을 위로한다. 어떤 사람이 죽으며 우리는 "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야 하니까"라고 말한다. 이 `우리 모두(we all)`는 세인의 정확한 번역이다. 그것은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그 일반성 속에 포함시키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혼자서 고독하게 죽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숨긴다. 하이데거 자신은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죽음에 직면했을때의 진실하지 못함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1959.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New York

버거의 사회학 설명: 일상성의 가면을 벗기고 그 정체를 폭로하고 싶어하는 동기, 점잖치 못한 것에 주목하고 싶어하는 동기, 상대화하고 싶어하는 동기, 보편화하고 싶어하는 네가지 동기에 의해서 구성된 현대적인 비판적 사고의 한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