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는 남자|Mies Vailla Menneisyytta|2002

이름이 없다면 생기는 불편함이라-지문을 등록하는 우리나라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야.
인권후진국에도 편리함은 있겠군.
 
결국 행복해지는데 기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늘 현재를 뒤집어 버리는 거대함이었던 '기억'의 역할에 대한 참신한 도전.
담담한 과거의 확인과
설레는 현재를 이어가는 결말이 신선했다.

과연 기후는 사람의 정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서늘한 유머감각.
들러붙거나 오그라드는 일 없이 산뜻하게 웃기고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
레닌그라드카우보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별로 웃을 일 없을 상황에 처한 이 가련한 기억상실증환자의 과거와 현재에서도 그렇다.
못본 그의 영화들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

이런 영화를 뒤늦게 이렇게 발견하게 될때면 느낀다.
소비자들은 모두 적극적인 것도, 열혈도 아님을.

세바스티앙 살가두 아프리카전|2010

전쟁의 끝이라서일까.
긴 난민생활에 지쳤을 법한 어른들은 귀향에 설레기도 하는데
아이들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다.
이것이 미래를 살아야될 아이들의 시간을 맘대로 저당잡으면 안된다는 무언의 항의처럼 보였다.
그나마 조금의 움직임이 살아있던 어른들의 눈조차
사막이 되어버린 호수 앞에서 말라가면서는
알수 없는 먼 곳을 보며 기약없는 기적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원망이나 복수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흙의 붉은색과 나무의 초록과 마른 노랑을 기억하지만,
흑백은 화면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백의 사구들은 바다와 더 닮아보였고
덤불들은 옷감의 패턴처럼 독특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평화롭고 익살맞은 마운틴 고릴라,
횡한 사막에서 구식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출전준비를 하던 군인,
젖을 물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진지한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던 난민.
순간을 붙잡는 사진의 매력.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아프리카의 영상을 볼 때마다 갔던 곳들은 똑같이, 가보지 못했던 곳들은 더해서
다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아, 난민, 내전을 몰랐던 건 아닌데도
나에게 아프리카는 원시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환상이 더 컸다.
시작은 사하라였는데도 왜 다채로운 색깔의 아프리카를 떠올렸는지도 참 이상하긴 하다.

사진전이라 하기엔 좀 적은 작품수였지만
99년에 내가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70년대의 사람들부터
여러가지 모습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었기에 만족한다.

채식주의자|2010

두 팔로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며 살려했던 영애를 시들게 만든 건
나무가 되려던 그녀의 말처럼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약을, 음식을 부으려고만 했던 그들일까,
아니면 탄생의 흔적조차 지워지지 않은 동물은 나무가 될 수 있다고 꿈꿨던 그녀의 착각일까.
실은 두팔로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뿌리를 내리고 싶을만큼 살고 싶은 어느 나무여자이야기.
꽃을 그린 두 몸은 아름다웠지만
살갗위로 부벼지던 붉은 꽃잎은 말라붙은 피 같았다.
책한권을 참 잘 읽어준 것 같은 느낌.
굳이 원작이 궁금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쁜 사람들이 눈꺼풀의 주름 하나라든가 비례도 안맞는 가슴에 집착할때
왜 이쁜 사람들이 자기 이쁜 것을 못 알아보는 지 참 안타깝다.
그런 사람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면 더 안타깝다.
클로즈업을 감당할 수 없는 흔적과
자신의 아름다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
좋은 배우가 되기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힘들테니까.
그런면에서 오랜만의 김여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예술과 욕망사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문제

의형제|2010

형제끼리 사이좋게 사이즈도 사이좋게

배우가 넘나드는 폭은 역시 크게 느껴진다.
하이킥의 정보석처럼.
역할은 이전과 비슷한 것 같지만
물고 늘어지는 대신 적당한 귀퉁이에서 마무리하고 넘어가며
어지간한 입맛에는 다 맞음직한 성실한 밥상같은 영화에서
송강호는 무게감을 더해주면서도 송강호를 잃지 않았다.  
열광시키진 않지만 즐거움을 주는 배우.

관람동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강동원도
설정 상 어쩔 수 없이 가장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슬픈눈을 빼고는
강동원 필모그라피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전우치의 계산된 오버를 털어버리고
진지하게 보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제대하면 고수보다 멋져질건가 봐~

전작의 소지섭이나 강지환에서 봤듯
장훈 이란 사람도 배우들에게 힘이 되는 감독인가 보다.
살짝 날 것의 느낌을 섞어
신선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보는 사람 즐겁게 만드는 재주.
군데군데 생기는 물음표를 쏘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 것도 아니지만
위대한 해피엔딩에 무릎을 꿇어버리련다.
 
무섭고 못된 그림자네이터 아저씨
한사람 더 꼽자면 국정원의 택배변장 전문 후배아저씨

임동혁 리사이틀


라벨_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M. Ravel_Pavane pour une infante dafunte
라벨_ 밤의 가스파르
M. Ravel_Gaspard de la nuit
----------------------- Intermission --------------------------------------------
쇼팽_ 마주르카 e 단조, Op. 17, No. 2
F. Chopin_Mazurka No. 11 in E minor, Op. 17, No. 2
쇼팽_ 마주르카 C 장조, Op. 56, No. 2
F. Chopin_Mazurka No. 34 in C Major, Op. 56, No. 2
쇼팽_ 마주르카 c# 단조, Op. 63, No. 3
F. Chopin_Mazurka No. 41 in C sharp minor, Op. 63, No. 3
쇼팽_ 폴로네이즈 판타지 Op. 61
F. Chopin_Polonaise- Fantaisie in A Flat Major Op. 61
프로코피에프_ 피아노 소나타 No.6

낭만과 서정의 정수였던 라벨,
임동혁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던 쇼팽,
전체를 끌어주는 큰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아 화려하기만 했던 프로코피에프.
좀 따뜻해진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직 마음이 끌리지 않는 아름다운 연주...
그래도 마주르카가 맘에 들었다는 게 임동혁의 힘이라고나 할까.

잘알지도 못하면서|2009

자봉애들 술도 안사줬죠? 무책임한 인간.

구경남의 첫번째 만남, 공연희
뭔가 시선을 끌지 않으면 불안해할듯한 여인.
화를 엉뚱한 곳으로 돌려 발산하는 어쩌면 일반적일지 모를 빗나간 화통함의 소유자.
그녀가 연애할 남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흥행감독
설마했는데 정말 김연수 였다, 핫핫....
신인배우 입성을 놓치지 않을 만큼의 어색함도 좋았지만
강간범 변신 전의 눈알 굴리기는 정말 압권~

부상용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맴돌지만 어긋남을 느낄 때 격렬히 저항할줄도 아는 용감한 소시민.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그의 운명의 사랑의 뒷얘기가 궁금하다.
공형진의 연기가 요즘 새로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노에서도 그런 것 같고.
웃기는 것이 참 큰 재능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하는 일이 많은 배우인 듯 하다.

영화보면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요

부상용의 아내 유신.
놀라운 힐링체험자이나 광신도의 위험에서는 살짝 비껴나 있는 정상인 지향형.
받는 사랑을 즐길 줄 알며 주는 사랑에도 몸을 사리지는 않지만
엄청난 오해 앞에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는 무심한 여인.
어쩜 그렇게 자기얘기를 영화로 만들어요?

구경남의 과거이자 구경남의 우상이었던 양천수의 현재인 고순.
느닷없는 고백에 망설여주기까지하는 친절한 여인이자 열애공세를 의연히 막을 줄도 아는 현명한 여인.
경험에서 배운 것을 그렇게 착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며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것은 참 감탄할만한 일이다.
처음엔 포스터에 왜 엄지원이 아닌 고현정인가 했지만 어쩌리.
구경남에게 가르침을 주신 해변의 여인인걸.
고현정이 홍상수와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면 좋겠다.
굵은 연기 사이사이 이런 감성이 꼭 어디선가 큰 힘이 될거니까.

양천수
술마시다가 팬의 머리를 툭 건드리고 들어가던 능청.
고순이 무릎꿇고 싶어한 부분은 그건 아니겠으나 얼핏 그 힘이 느껴지기는 했다.
인간적인 면에서 얼추 완성되었는데도 여전히 수컷을 극복하지 못하는
많은 지식인 혹은 이성적 인간들의 꼼꼼한 샘플.

고국장
전직은 모르겠으나 보통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유형의 인물.
이따금 살짝 미치나 싶게 증폭이 커지는데
흔들리는 감정앞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치졸함까지 보여주는 섬세한 인물이다.
유준상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해준.
조씨.
후배 또는 친구의 범주에도 들지못하면서 일방적인 연모와 친분만으로 예술가의 주변에 머물면서도 충성심을 발휘하는 단순충성형 인간. 모두에게 예의바른 양천수가 무심하게 누나김치까지 주문을 할 정도로 무시당하는데다 직함도 이름도 없이 조씨인 인물.
꽤 생각많음직한 자연인 하정우가 단순무식한 인물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연기하는 게 재밌다.
억울합니다-진정성이 느껴지는 단무지 대사.

구경남
구경하는 것도 구경당하는 것도 아닌 늘 밥이 되는 주인공.
영화에 대한 그의 열변은 마치 홍상수인듯 흥분까지 진짜 같았다.
김태우는 이제 키크고 잘생긴 홍상수 같아.
이런 영화를 왜 만드시죠라는 질문은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평가이자 비호감의 표현이다.
나도 가끔 충동을 느끼지만 홍상수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질문.

요즘 홍상수가 만나는 여자친구들은 좀 멋진 사람들인가 봐.
즉흥이라고 소문났지만 이번엔 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실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어떤 대목에 들어가도 너무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제목.
그래서 나오는 사람들을 한번 쭉 정리해보고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