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란다스의 개



사랑스러운 노랑비옷 커플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배두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정말 관리사무소 직원을 데려다 쓴 줄 알았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외모부터 망가지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게 볼품 없어 보이는 스무살 여자애의 모습 그 자체인 현남양.
게다가 젠틀하고 샤프하고 우수에도 젖어본 이성재가 보여주는 윤주도 가관이었다. 
소심하기는 하면서도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약자를 괴롭히는 비굴함, 
불의에 굴하면서도 좀 찝찝해할 수는 있을 정도의 털끝만한 양심, 
강아지 한 마리를 잡는데도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배운 놈 티내기 등등.
솔직히 이 영화로 둘 다 상 하나 씩은 받았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치면서 좀 김이 빠진 게 아쉽다. 
이성재와 배두나 모두 이 영화에서 만큼의 연기를 다른 영화에서는 아직 보질 못했다. 
인구에 회자되는 보일러 김씨의 독백은 개인적으로 무지하게 지루했지만 
그 외에는 구석구석 웃을 수 밖에 없는 재미있는 코미디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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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한 번 봤다.
이성재와 배두나는 여전히 큰 웃음을 준다 ㅎㅎ
다시 보니, 그냥 집들의 서랍장 같은 아파트 공간이
재미있게 사용되고 있었다.
장황한 설명을 한 장면으로 잘 보여주는 구도.
그런데 연출된 거라고는 해도
강아지 장면들은 너무 짠하다-던지는 장면은 어떻게 찍은 건지 정말 궁금.

설국열차나 괴물, 어쩌면 살인의 추억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다른 감독이 있을 법하지만
플란더스의 개야 말로 봉준호 뿐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늘려가던 살림살이 줄이기야 쉽지 않겠지만
가끔 이런 영화도 찍어주면 안될까.
봉준호의 단편 지리멸렬도 보고 싶다. 

영화|말아톤


김미숙이 이렇게 멋진 엄마가 되어 나타나 준 것이 너무 반가왔다
더 맘에 드는 포스터|초원이와 초원이가 사랑하는 얼룩말


누군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은 
그 사람 보다는 그 일을 하는 순간 행복한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희생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떼고, 상대를 앞서가지만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초원이의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보는 동안 많이 울고 많이 웃었다.
특별하지 못한 장애인들에게는 
오히려 상실감이 큰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 뿐, 
아마 그들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볼 사람들에게는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 될 지도 모른다. 
작업복을 입고 하드를 먹던, 더 이상은 달리지 못하던 초원이가 안타깝듯, 
곁에서 함께 하드를 먹던 다른 친구 누군가도 
다른 시선에게는 또 다르게 안타깝고 특별한 이름으로 남을 수도.

열심히 마트를 지나 수영장을 지나 초원을 달리던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런 영화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곤 한다.
 
영화의 모델이라는 배형진씨와 어머니의 미모도 배우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듯 


몽골관련 북마크


http://www.mongolschool.com  몽골어, 몽골개관 등등
http://www.samarmagictours.com  몽골에 있는 여행사 Samar Magic Tours
www.mongoliatourism.gov.mn  몽골관광청인데 로그인하라고 함. 잠시 이상한 건지도.
http://www.mongolembassy.com 주한몽골대사관
http://www.mongolcenter.org/  몽골문화원. 지금은 개편중이지만.
http://home.dankook.ac.kr/mongol/frame06-0201.htm 몽골문자 기초공부
http://www.kmca.or.kr/mong_study.htm 한국몽골협력협회. 몽골어도 배울 수 있다.
http://www.travelblog.org/Asia/Mongolia/ 몽골여행기
http://www.panoramicjourneys.com 몽골여행정보
http://selenatravel.com/about-mongolia.html  여러가지 몽골정보와 링크사이트
 
올해 나담축제는 7월 6일부터 19일까지 인데,
시작 이틀간과 마지막 날이 하일라이트라고 한다.
여기저기 뒤져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몽골가이드북을 구할 수가 없다는 슬픈 사실을 알았다.
에휴....

몽골|론리플라넷

몽골(Mongols)

몽골(Mongolia)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항상 징기스칸(Genghis Khan)장군, 고비사막을 떠도는 낙타, 대초원을 질주하는 야생 말과 같이 야성적이며 이국적인 광경이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몽골은 지구의 끝자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인 올란바토르(Ulaan Baatar)외곽에서는 다른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세기에 발을 들여 논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곳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모험이 남아있는 곳이다. 몽골이 독립국가로 남아있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한때 방대한 유라시아(Eurasian)대초원의 지배자였던 몽골은 여러 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식민속국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몽골인 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서 유목민족은 완전히 사라지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제 이 나라는 법령과 다수정당 투표방식을 채택하였고 민주연합여당이 있는 나라이다.몽골로의 여행은 매우 힘들 것이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서로 격려하며 여행을 다니며, 따뜻한 겨울코트를 여밀 수 있고,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면 여행하는데 문제없다. 유목민의 땅으로 걸어서 여행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몽골 지도(13K)


통계 자료

Area: 1,566,000 sq km (610,740 sq mi)
면적: 1,566,000 sq km (610,740 sq mi)
Population: 2.5 million
인구 : 2천 5백만명
인종 : 칼카몽골족(86%), 카자흐인(6%), 중국인(2%), 러시아인(2%), 그 외 수많은 소수인종언어:몽골어, 튀르크어, 러시아어, 중국어
종교: 티벳불교, 회교, 샤머니즘
정체: 의회민주주의
대통령: 나차긴 바가반디(Natsagiin Bagabandi)
수상: 린친냐민 아마르자르갈(Richinnyamiyn Amarjargal)

지리 및 기후

몽골은 거대하고 대륙에 둘러싸여 있으며 프랑스의 3배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징기스칸(Ginghis Khan)과 쿠빌라이칸(Kublai khan)의 몽골 정복시대에는 몽골의 영토는 끝없이 넓었다. 20세기까지 몽골의 국토면적은 지금의 2배였으며 시베리아의 커다란 땅과 몽골내륙(지금은 중국에 속해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라이기도 하며 평균고도가 1580m(5180ft)이다. 많은 높은 산이 서쪽 멀리 위치해 있다. 몽골알타이누루(Mongol Altai Nuruu)들은 만년설로 덮혀 있고 그것 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타반보그드울(Tabanbogd Uul)(4370m/14,350ft)로서 몽골, 러시아, 중국보다 높이 솟아오른 멋진 빙하가 있다. 봉우리들 사이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 있다. 몽골의 다른 지역에는 많은 염수호 와 담수호가 있다. 가장 큰 호수는 홉스굴누루(khovsgol nurr)로서 전세계 담수의 2%에 해당하는 물이 있다.

몽골 남부의 3분의 1은 고비사막(Gobbi Desert)이 자리잡고 있다. 비록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에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풀이 양, 염소, 낙타 때들에게 충분히 공급될 정도로 있다. 몽골의 나머지 대부분은 초원으로 유명한 타키(Takhi)말의 원산지이다. 이 타키(takhi)말은 징기스칸이 정복을 위한 원정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말이다.

비록 1년에 260일이 맑은 날씨를 나타내고 '푸른 하늘의 땅'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의 기후는 매우 극단적이다.  대부분의 날씨가 긴 아 북극지방의 겨울기후의 영향을 받아 4월 말 까지도 고비(Gobbi)사막에서 눈을 볼 수 있다. 어떤 호수는 6월까지 얼어있다.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짧은 우기가 있지만 소나기는 짧고 조용히 내린다. 높은 고도 때문에 여름에도 밤에는 춥다. 울란바토르(Ulaan Baatar)의 겨울(10월부터 4월까지)은 길고 추우며 1월과 2월에는 기온이 -30℃(-22℉)까지 내려간다.  짧은 봄기간(5월에서 6월) 동안에는 끔찍한 모래폭풍이 발생한다.

역사

이미 알려진 대로 몽골인 들은 800년 전쯤에 문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들의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입으로 전해져 온 서사시로 기록하였다. 주변국가와의 많은 접촉(대부분 불행하였지만)으로 인해 몽골에 대한 역사가 주변국가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 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 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대략 1216-94)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몽골의 최고 전성기였다.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몽골의 원 왕조는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그들의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사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대부분의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도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하에 놓였다.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 후에 청 제국은 점점 부패와 독재성을 띄게 되었다. 중국과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약간의 반항에도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야했다. 결국 몽골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하였을 때 몽골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였고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몽골은 젭준담바(Jebtzun Damba: 살아있는 부처)의 지도하에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정부를 세웠다. 1915년 5월25일 몽골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카야카다조약(Kyakhta)에 몽골, 중국, 러시아가 서명했다.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은 몽골의 귀족정치에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은 1919년 몽골로의 진격명령을 내렸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1921년 초에 후퇴한 백러시아(White Russian)의 반공산주의 군대가 몽골로 진군했고 중국을 내몰았다. 야만적인 중국과 러시아군대로 인해 몽골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타올랐다. 시베리아에서 백러시아군대에 비해 러시아 공산당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에 도움을 청했다. 같이 힘을 합쳐 1921년 6월에 올란바토르를 다시 되찾았다.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명목상의 대표로서 계속 유지되었고 새롭게 구성된 몽골인민당(몽골역사에서 첫 번째 정당이었고, 그후 69년 동안 유일한 정당이었다)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1924년 11월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MPR)을 선포하였고 몽골은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몽골 공산주의는 1920년대 후반 스탈린(Stalin)이 절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소련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충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숙청은 곧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앞잡이인 코루지니초이발상( Khorloogiyn Choibalsn)이 몽골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초이발상은 스탈린의 지휘에 따라 토지와 가축을 몰수한 후 소작인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32년 700명 이상(대부분 승려였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압류 당하고 공영화되었다. 농부들은 협동농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개인사업은 무너졌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무역상들은 추방당했고 모든운송수단은 국유화되었다.

정부의 종교반대운동은 특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공포의 시간이 수도원에 도래하였고 수천의 승려들이 체포되거나 사형 당했다. 1939년에 27,000명 정도의 시민이 사형에 처해졌으며(그 당시 몽고 인구의 3%에 다다른다) 그중 17,000명은 승려였다고 알려졌다.

1980년대 초기에 소련정부가 침체상태로 흔들리고 있을 때 몽골은 잠빈밧몽크(Jambyn Batmonkh)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의해 재정비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밧몽크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와 글라스노스트정책의(몽골에서는 일토드(il tod)로 알려졌다) 조심스러운 시도를 종용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었고, 1989년 완전한 외교상의 관계가 다시 확립되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몽골의 자치권인정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소련의 붕괴정도에 신경을 쓰거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0년 3월 올란바토르의 국회건물 앞 광장에서 과거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밧몽크는 권력을 상실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났고 격렬한 시위와 항의는 계속되었다. 5얼에 정부는 헌법을 수정하여 1990년 6월부터 다수정당 선거제도를 허용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올란바토르의 유권자들은 다른 정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으나 외곽의 시골지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여러 명 의 젊은 민주주의 자들과 힘을 나누겠다고 발표하였다.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었다. 4년 후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경제

GDP: US$5 billion
GDP: US$ 5 십억
GDP per head: US$1970
일인당 GDP : US$1970
Annual growth: 6%
년간성장율: 6%
물가상승률: 53%
주요산업: 구리, 가축, 캐스미어 실, 울
주요수출국: 구 소련 과 동유럽, 중국, 호주

문화

몽골인의 생활방식은 유목생활이며 가축들의 이동경로와 친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초원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몽골 인은 이동하기 쉽고, 크며 흰 펠트천으로 만든 텐트의 일종인 게르(Ger)에서 산다. 저는 보편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즉,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하게 트고, 뒤를 향하고 약간 서쪽에는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 있으며 저의 뒤쪽에는 연장자나 가치 있는 소유물을 두는 곳이 있다. 그리고 검정색의 벽에는 부처상과 함께 가족제단, 가족사진 그리고 옷장이 있다.  전통적이고 종교적이며 미신적인 수많은 규칙과 게르에 관련된의상에 대한 설명을 지방주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몽골인 들은 티벳불교를 독실하게 믿고있으며 몽골과 티벳과의 연계는 깊고 오래되었다. 모든 독실한 몽골의 불교신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신성한 도시인 라사(Lhasa) 에 가보려고 시도한다. ; 티벳인들은 그들의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의 지원을 번갈아 가며 받고 있다. 1921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몽골에는 110,000명의 라마승려가 700 여러 곳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930년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승려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현장으로 보내졌으며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약탈당했으며 모든 종교적인 제례와 축제는 금지되었다. 1990년이 되어서야 종교의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 후로 불교(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띄었다. 수도원은 다시 문을 열었고 심지어 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중 일부가 라마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수도원과 사찰(sum)은  항상 티벳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주목할 만한 소수 수니회교파(Sunni Muslim)는 대부분 카자크(Kazaks)종족으로 되어있는 몽골의 서쪽멀리 있는 지역에 발달하였다.

몽골의 그림, 음악 그리고 문학은 티벳불교 와 유목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타삼(Tsam)춤은 악마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한 춤이며 유목생활과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공산정권시절엔 금지되었다가 다시 충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전통음악에는 방대한 종류의 악기와 노래형식이 사용된다. 몽골 구미(Khoomi)노래는 매우 정성 들여 연습한 남성들이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사용하여 고음을 내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한번에 여러 개의 음을 발성하기도 한다. 고대 몽골의 전통곡예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통음악과 춤의 행위는 완벽하지 못하다.

공식언어인 몽골어는 우랄알타이어(Ural-Altaic)계 언어중 하나이며 필란드어, 터어키어, 카자흐어, 우즈벡어 와 한국어도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 1944년부터 러시아 시릴문자(Russian Cyrillic alphabet)가 몽골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으며 그것들 중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최근에서야 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이며 몽골의 위대했던 날들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몽골루니푸차토치얀(몽골의 숨겨진 역사)을 번역하였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몽골의 격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아침식사는 너 자신을 위해 먹고 점심식사는 친구들과 나눠먹고 저녁식사는 적들에게 적선하여라. 가장 잘 차려지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이다. 보통 기름기가 많은 끓인 양고기와 밀가루가 식탁에 올라오며 때때로 약간의 낙농식품과 쌀이 곁들여 지기도 한다. 몽골 서부의 카자크족의 식사에는 말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다. 몽골인들은 차를 매우 즐겨 마시며 일반적으로 수테차이(suutei tsai (소금차))가 있다. 아르히(arkhi)(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가축들이 그들의 집을 만드는 기간동안에는 발효시킨 말 우유에 3%의 알콜을 넣어 만드는 아이락(aikag)을 양조한다. 많은 몽골인들은 이것을 증류하여 알콜 함량이 12%로 증가한 쉬밍아르히(Shimiin Arkhi)를 만든다.

축제 및 행사

연중 가장 큰 행사는 나담축제(Naadam Festival)로서  에린거반나담(eriyn gurvan naadam)으로 알려져 있고 레슬링, 활쏘기, 경마의 "사내다운 스포츠"를 펼친 후 열린다. 축제는 보통 7월 11일부터 13일 사이에 전국에 걸쳐 열리며 1921년 몽골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행사는 축제의 첫날과 둘째 날 에 주로 열린다. 차강사르(Tasgaan Sar(백월))은 1월이나 2월에 있는 음력신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끔찍한 겨울철을 보낸 후에 몽골인 들은 3일 동안 많은 음식과 술과 노래로 축제를 여는 것이다.

여행자 정보

비자: 어는 국적의 사람이든지 출·입국 비자는 필요하다.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초대되거나 몽골인, 몽골회사 또는 주거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후원을 받아야 하며, 또는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에 참여하여야 한다. 어떤 상담소나 영사관에서는 다른 곳보다 까다롭지 않은 겨우도 있다. 비자 수수료는 US$25정도이다.
주의해야할 질병: 브루셀라병, 콜레라, 수막염, 선페스트
시간: UTC/GMT+8시간; 우스코브드(Uus Khovd)와 같은 바얀올지(Bayan-olgii), 우브스(Uvs) 와코브드의 서부지역-UTC/GMT+7시간
전기: 220V/50Khz
도량형: 미터법(환산표를 참고하여라

경비 및 환전

Currency: togroog (T or MNT)
통화 : 투그릭(togroog)(T or MNT)

저렴한 식사: US$3-5
일반 식사: US$5-10
고급 식사: US$10-20
저렴한 숙소: US$5-10
일반 호텔: US$10-20
고급 호텔: US$20이상

만약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을 한다면 하루에 US$100 정도를 쓰게 될 것이다. 관광상품과 똑
같은 풍경, 같은 숙소, 같은 장소를 혼자서 여행할 경우 하루에 US$80으로 관광할 수 있다. 비용을 개인지프차 와 야영에 지출하면 값비싼 저에서 지내는 것보다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숙박과 식사는 하루에 최소 US$10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2배정도의 예산을 짜두는 것이 좋다. 시골지방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호텔에 머문다면 하루에 US$15가 소비될 것이고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한다면 하루에 US$7정도 소비될 것이다.

미국 달러로 된 여행자수표와 약간의 현금을 미국달러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몇몇의 호텔과 공항에서는 편리하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면 신용으로는 어떠한 것도 살 수 없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8년 이전에 발행된 미국달러는 사용할 수 없다.

아마도 울란바토르의 고급식당과 호텔에서는 필수적으로 10%의 세금이 징수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계산서에 세금을 포함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세금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곳도 있다.  고급식당에서는 봉사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저렴한 물건은 공공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몽골현지인 보다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한다.

여행 시기

여행시기는 보통 5월에서 이른 10월까지이며 울란바토르는 지독한 추위를 견딜수 있다면  연중 방문할 수 있다. 이른 7월에 몽골의 남부지방은 최적의 날씨를 보이며 또한 몽골의 나담 축제가 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가 울란바토르의 부적절한 숙박시설과 형편없는 교통수단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6월과 9월은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이고 많지 않은 방문객이 있다. 고비사막을 가기에 가장 좋으며 뜨겁지 않은 시기는 9월과 10월이다. 10월 중순과 3월 중순 사이에는 눈보라 와 심한 추위로 비행기가 결항되고 도로가 끊길 수 있으며 몽골의 교통수단이 운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주요 여행지

울란바토르

외국인들에게는 UB라고 불리는 몽골의 조용한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이제는 한물간 1950년대 유럽풍의 도시형태와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구 소련제 자동차와 버스들은 서서히 새로운 일제 자동차와 버스로 교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들이 거리를 거닐고 염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척이며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몽골의 벼락부자들과 거리를 함께 거닌다.툴(Tuul)강을 따라 세워졌으며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울란바토르는 공산국가형식의 고층아파트건물이 있는가 하면 약 250,000명의 지역주민이 도시주변의 확장된 게르가 밀집한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펠트천으로 만들어진 게르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가지고 있어 특히 봄철에 심한 바람을 막아준다. 지형 상으로 산중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기에 매우 좋으나 겨울철에는 공해로 인해 보기 어려우며 기온이 상당히 내려간다.

도시의 중심은  수헤바타르(Sukhbaatar) 광장이다. 이곳에서부터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헤바타르(Damdiny Sukhbaatar)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광장은 또한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집회의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한다. 평상시에 이곳은 조용한 곳으로 비둘기와 3류 사진사들만이 배회하고 있다. 회색의 주 의회건물이 광장을 마주하고있고  높이가 높은 현대적인 문화의 궁정(Palace of Culture)은 유용한 건물로서 인상적인 몽골아트겔러리와 다른 몽골문화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있다.

광장에서 한 블록 북서쪽에 있는 자연사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은 만약 시골로 가려면 한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몽골의 지리, 동물, 식물 에 관해 것들이 전시되어 있고, 최근의 몽골역사에 대한 전시물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2개의 공룡 뼈로서 고비에서 발굴된 것이며  고기를 먹는 거대한타보사우르스(Tarbosaurus)와 이것의 첫 번째 사촌으로서 오리너구리 부리를 가진  초목을 먹는 작은 사우로포스(Saurolophus)이다. 자나바자르 미술박물관(The Zanabazar Museum of Fine arts)에는 회화, 조각에 관련된 훌륭한작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이중에는 존경받는 조각가, 예술가 그리고 승려, 자나바자르들의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탕카스(tangkas; cloth painting)와 불상 등과 같이 보기 힘든 종교적 색채의 전시물들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100여 개 이상의 티벳 불교 썸(sum; 사원)과 키이드(khiid; 수도원)가  50,000명 이상의 울란바토르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부분의 사원과 수도원 및 그것들에 속한 소유물들은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한 숙청작업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간단테친렌 키이드(Gandantegchinlen Khiid)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 하에 파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대략적인 의미로 ' 완전한 즐거움을 위한 최상의 장소'인 간단(Gandan)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사원이 여러 개 있다. 이곳에 사는 150명 이상의 승려들이 많은 찬불과 의식을 행하며 사원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트칸(Bogd Khaan)의 겨울별궁(Winter Palace) 역시 가 볼만한 곳이다 1893년과 1903년 사이에 세워진 이곳은 몽골의 8번째 복트칸(살아있는 부처)과 마지막 왕이 2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어떤 역사책을 보는 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트칸은 육식과 술등의 불경스러운 즐거움에 취해있었고 매독으로 맹인이 되었다고 쓰인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그가 신통한 예언자였으며 민족주의자라고 쓰인 역사서가 있다. 그가 1924년 죽었을 때 소련이 이끌던 몽골의 공산당은 그를 대신하는 어떠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게 금지하여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울별궁에는 6개의 사원이 있으며 복트칸에게 바친 선물들이 수집되어있고 박제한 동물들을 환상적으로 세워놓은 곳도 이곳에 있다.

Four Holy Peaks

신성한 4봉우리

울란바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봉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테스트시검(Testseegum), 친겔타이(Chingeltei), 송지노카이르칸(Songino Khairkhan) 과 바얀거크(Bayansurkh)산은  나침반상의 4위치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하이킹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고 유명한 낙엽수림, 대초원과 매력적인 조류와 아이벡스(야생염소)와 검은담비 등과 같은 동물들이 있다. 테스트시검울(Tsetseegum Uul)은 가장 장엄한 봉우리로 취급된다. 테스트시검울의 높이는 2260m(7400ft)이며 울란바토르의 남쪽을 내려다보는  복트칸울(Bogdkhan Uul)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으로의 여행은 6월 초순부터 9월 말까지 만 가능하며 입산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울란바토르에서 15km(9mi)정도 떨어진 복트칸국립공원의 입구에서 얻을 수 있다.산의 남쪽에서 테스트시검으로 가는 만츠쉬르키히드(The Manzshir Khiid) 코스는 가장쉬운 코스이다. 이 코스를 따라서 넓은 목초지, 암석, 오보스(ovoos)(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남겨진 돌무더기)가 많은 지역이 펼쳐져 있다. 자이산(Zaisan)코스는 가장 풍경이 좋은 코스이며 가장 어려운 코스이기도 하다. 6시간정도 걸리며 길을 따라서 위험스럽게 보이는 가파르게 놓인 돌들이 있다. 언제나 등산할 수 있으나 항상 허가가 필요하며 나침반과 많은 물, 음식, 보온용 옷가지 등을 가져가야 하며 갑작스러운 폭우와 냉풍으로 인해 여름에도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Khustain Nuruu Nature Reserve 쿠스타인누루 자연보호구역

쿠스타인누루(Khustain Nuruu)자연보호구역은 1993년에 몽골의 야생 타키말과 그것들이 살고있는 스텝초원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타키말은 가장 확실하게 인식되었고 명성을 얻은 몽골의 다양하고 진기한 야생동물의 상징이다. 프르체발스키(Przewalski's)말( 이 말에 흥미를 느낀 첫 번째 사람인  폴로(Polo)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로도 알려진 타키말은 많은 가축이 떼지어 있는 시골을 돌아다닐 때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대부분 멸종되었는데 밀렵꾼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마구 사냥하였고 개발과 가축들이 풀을 다 뜯어먹어 먹이가 부족해 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에 국제환경보호단체의 도움으로 많은 타키말 들이 쿠스타인누르의 90,000ha(222,300acre)에 달하는 넓은 특별보호구역과 고비 남쪽에서 다시 도입되었다. 이제 200필 정도가 이 보호구역과 야생에서 살고 있다.자연보호구역은 울란바토르에서 약 100km(62mi)북서쪽에 떨어져있다. 울란바토르의 남쪽으로 40km(25mi)떨어진 준모드(Zuunmod)에서 쿠스타인(Khustain)으로 여행하는 편이 쉽다. 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미니버스 그리고 공용택시가 울란바토르에서 준모드까지 운행된다. 준모드에서 자연보호구역으로 가려면 지프차가 필요할 것이다.

Kharkhorin (Karakorum) 카라코람

1220년 징기스칸은 카라코람에 그의 방대한 몽골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건물은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오그다이칸(Ogedai Khan)에 의해  완공은 되었으나 카라코람이 수도로서 사용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0년간만 사용되었다. 수도를 옮긴 후 몽골제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카라코람은 버려졌으며 나중에 약탈자들과 같은 만주족 군인 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남아있던 것들은 16세기에 에르덴주(Erdene Zuu)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숙청작업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카라코람의 현대적이고 적막한 도시는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에르덴주(수많은 보물 이라는 뜻)는 몽골 라마교의 본산지였다. 수도원은 1586년에 짓기 시작했으나 300년 후가 되어서야 완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60에서 100개의 사원과 외곽벽안에 위치한 300여 개의 게르가 있으며 매우 높은 곳에 있어서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 카라코람과 같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사원은 버려진 후 파괴되었다. 스탈린의 암살단원에 의해  에르덴주에 있는 사원 중 3곳을 제외한 모든 사원이 파괴되었고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승려들이 살해당했다. 수도원은 1965년에 종교적 장소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 다시 개방할 때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야 수도원은 제 기능을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그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대한 벽이 복합적으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고 3개의 사원 안에는 유년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성년시절의 3단계 부처 생애를 기리기 위해 헌납되어있다. 주 사원이며 중심사원은 부처의 주(Zuu of Buddha)라 불리며 어릴 때의 부처 상이 있다. 수도원 벽의 외곽은 2개의 '거북 돌'이다. 이것들 중 4개는 한때 고대 카라코람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근형태의 돌로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수도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언덕중의 작은 계곡사이에 숨겨져 있다. 이 돌을 보고 온 모든 여자는 24시간 내에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그 지방의 전설이 있다.

카라코란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70km(230mi) 떨어져 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도시사이를 운항하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여러 번 있다. 년 중 운행하는 버스는 7-8시간 정도 걸리며 자주 있는 편이다.

Khovsgol Nuur 홉스굴누르

2760sq km(1080 sq mi)넓이에 물이 너무나 깨끗해서 마실 수 도 있는 고산지대호수를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나서 2000m(6560ft)높이를 가진 많은 산과 무성한 소나무 숲 과 싱싱한 목초지 와 그곳에 방목하여 기르는 야크 와 말을 상상해 보아라 그러면 심장이 멎도록 웅장한 몽골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가진  홉스굴누르(Khovsgol Nuur)에 대한 막연한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상수원지역이다.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이곳을 '어머니'로 취급하는 지역 몽골인들 에게 신성시되고 있다. 이곳은 물고기로 가득 차 있고 주위에는 양, 아이벡스, 공, 무스, 2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호수주위에는 안내자 없이는 찾기 힘들지만 수많은 동굴이 있다. 이 지역에는  다크해드몽골족(Darkhad Mongols), 부리아트족(Buryats) 과 타스탄(Tsaatan)와 같이 3개의 독립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경탄할 만한 90개의 강이 호수로 흘러들어 오지만 한 개의 강만이 호수에서 흘러 나간다.  에진골(Egiin Gol)이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Baikal)에 다다른다. 홉스굴누르는 겨울에 얼고, 그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가로질러 오는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거대한 도로로 사용된다. 이 호수가 녹았을 때 방문객들을 카약을 즐길 수 있고 그 주변에서는 하이킹이나. 말타기(또는 야크타기)를 즐길 수 있다.

홉스굴누르의 남부 경계는 울란바토르에서 775km(480mi) 북서쪽으로 떨어져 있고 임시항공기나 버스 또는 지프를 손수 운전하여 갈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은 춥고 호수가 얼어있기는 하지만 봉(4월부터 5월까지)이다. 여름(7월과 8월)은 따뜻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호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카트갈(Khatgal)시의 남쪽입구에 도착하기 몇 킬로미터 전에 있는 홉스굴누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주도로에서 얻을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Amarbayasgalant Khiid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

카라코란의 에르덴주키히드(Erdene Zuu Khiid)이후에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Amarbayasgalant Khiid) 은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으로 인식되었다. 이곳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북부 중앙몽골에 위치한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은 1737년 몽골의 위대한 불교신자로 봉헌되었을 뿐 아니라 조각가이며 만주족왕인 칸수자나바자르(Kansu Zanabazar) 에 의해 세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이곳에서 그들의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37개의 사원과 불상 중 10개를 파괴하였다. 오늘날 사원은 평소에는 문을 닫고있으나 수장승려에게 개방하기를 요청할 수 있고 또한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30여명의 승려들의 환영과 매일의 의례를 볼 수 있다.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자주 운행하는 특급열차가 울란바토르와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219km(136mi)떨어진 다크한(Darkhan)까지 연결되어있다. 수도원은 다크한에서 남동쪽 140km(87mi)떨어져있으며 다크한에서 수도원까지 가려면 지프가 필요할 것이다.

Gurvansaikhan National Park

거반사이칸

고비사막의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거반사이칸(Gurvansaikhan)에는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많이 있으며 저 캠프와 도로 등의 편의시설이 상당히 잘 마련되어있다. 공원에는 산, 공룡호박과 특이하게 형성된 모래언덕, 바위와 년 중 얼음으로 덮힌 계곡 등이 있다. 또한 이 공원은 몽골사막 되새, 회색독수리(Cinerous Vulture), 사막 휘파람새와 호우바라 능애(Houbara Bustard)를 비롯한 200여종의 조류들의 서식지이다. 드문드문 자란 초목들은 검은꼬리 가젤, 눈표범, 아벡스, 아르갈리 양과 멸종위기의 야생낙타와 같은 동물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준다. 적은 입장료를 동물박제를 전시해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는 욜린엠(Yolyn Am)계곡에서 받는다.

많은 외국인들은 고비를 외지며, 색다르고 신비한 장소로 알고 있다. 그런 점들을 보이기도 하지만 고비는 주로 풀, 관목 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오아시스와 모래는 사막의 3%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한번 극심한 폭우가 내리며 기온은 여름동안에 40℃(105℉)를 넘고 겨울에는 -40℃(-40℉)를 기록한다.

거반사이칸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40km(211mi)떨어져 있으며 달란자드가드(Dalanzadgad)시에 근접하였으며 중국국경에서 멀지 않다. 고비로 가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달란자드가드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지프를 빌린다. 울란바토르와 달란자드가드사이를 1주에 한번 운행하는 버스도 있다.

Khovd

코브드

한때 작은 농업지역사회였고 나중엔 러시아와 몽골의 무역중심지 이였던 코브드시는 이제 주요산업도시이며 서부몽골로 떠나는 탐험의 출발지로 좋은 장소이다. 도시의 북부지역은 1762년 이곳을 정복한 후 강제로 통치자가 된 만주족 장수에 의해 세워진 지금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폐허만 남은 상진커렘(Sangiin Kherem)유적지가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복합건물들은 1911년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중국혁명 후에 완전히 방치되었다. 유적지의 북쪽에 있는 메마르고 울퉁불퉁한 언덕에서는 좋은 풍경을 볼 수 있고 하이킹하기에도 좋다.

코브드는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1425km(884mi)떨어져 있고 아발리키르(Arvaikheer), 바얀콘거(Bayankhonger) 와 알타이를 거쳐서 서쪽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경유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코브드까지가는 정규항공편이 있고 그곳에 도착해서는 지프를 빌려 도시외곽으로 관광을 갈 수 있다.

레저스포츠

울란바토르주변의 신성한 4개의 봉우리에는 도전할만한 하이킹코스와 깜짝 놀랄만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테스트검(testseegum)봉우리의 남쪽측면에 있는 만즈시르키히드(Manzshir Khiid)등산로는 가장 쉬운 길이다  자이산(Zaisan)등산로는 가장 볼거리가 많고 가장 어렵다. 코브드언덕 주변의 거반사이칸(Gurvansaikhan)국립공원과 고비사막에는 더 많은 하이킹 코스가 있다. 거대한 홉스굴누르(Khovsgol nuur)호수는 낚시와 카약을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이고 호수가 주변의 동굴에서 이루어지는 동굴탐험도 즐길 수 있다. 1월과 2월은 스키를 즐기기에 좋다. 활강스키와 크로스컨트리스키 여행은 울란바토르에서는 즐길 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다. 울란바토르와 그 주변에서는 지금도 말, 낙타, 야크 등을 사로잡아 길들여 타고 다니며 그 옛날 징기스칸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상기하고 있다

몽골로 가는 길

대부분의 관광객은 베이징,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울란바토르까지 항공편으로 이동한다. 오사카나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몽골에 입국하는 관광상품도 있다. 국제적인 몽골항공회사는 MIAI이며 장난스러운 말로 '아마도 나는 오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Maybe I'll Arrive Today)'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라고도 한다.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생기는데 좋지 않은 기상조건 때문이다. 공항이용료는 US$10정도이다.외국인이 몽골로 입국하거나 출국하는 유일한 다른 방법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Trans-Mongolian Railway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곳은 중국-몽골 국경의 에른자민오드(Ereen-zamyn-ood)와 러시아-몽골 국경의 나우시키소크바타(Naushki-sokh baatar)가 있다.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지프나 버스를 이용하여 국경을 넘었다고 하는 여행자들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이것은 지금도 불법이다.

국내 교통편

하부조직 없이 방대한 지역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 몽골은 항공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80여 개 이상의 공항이 있으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활주로를 가진 공항은 없다. 주요항공사인 MIAT는 지방도시와 주요도시, 그리고 관광지역으로(모든 곳은 아니지만)운행하는 항공편을 가지고 있다. 항공 시간표는 정기적으로 바뀌며 외국인은 몽골 현지인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으며 컴퓨터 전산화된 예약시스템은 없다. 따라서 출발지에서 되돌아오는 항공권도 같이 구입해야 한다.

도시를 관광하기에는 버스가 가장 좋으나 서비스가 엉망이고 버스가 오래되어서 여행은 안락하지 못하고 매우 느리다. 여행을 오래할 경우엔 버스의 파손도 발생할 수 있다. 버스노선은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하여 그곳에서 끝나며 서부몽골로 가는 버스노선은 없다. 관광지를 순환하는 조금 비싼 미니버스는 빠르고 좀더 안락하다. 몽골의 1750km(1090mi)에 다다르는 철도는 남북을 가로지른다. 이 철도는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Trans-Mongolia Railway의 일부이다.

택시는 포장된 도로에서만 유용하다 즉 전체길이가 47,000km(29,150mi)에 달하는 도로 중 1200km(744mi)만이 포장도로이므로 택시는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프는 포장되지 않은 대부분의 도로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이며 원거리에 있는 관광지를 방문할 땐 필수적이다. 지프는 속도가 느리고 기계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보통 지프에는 운전사와 안내자 그리고 공용지프라면 다른 승객들이 함께 탄다.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한다하더라도 개인지프로 여행을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경찰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고 사고를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추천 도서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Mongolia's most famous book, has no known author. This epic history records the life and deeds of Genghis Khan.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the Origins of Genghis Khan, by Paul Kahn, is regarded as the best study of The Secret History.

Written by Charles Bowde, The Jebtsundampa Khutukhtus of Urga is a renowned Buddhist history of the greatest Mongolian lamas. Well written and full of photos, In Search of Genghis Khan provides an in depth and fascinating look at the nomadic life of the Mongols. The Lost Country: Mongolia Revealed by Jasper Becker is an insightful, well written travelogue.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 몽골










 

 

소설|이렇게 쩨쩨한 로맨스|다이도 다마키


'째째한'이 아니라 '쩨쩨한'이 표준말이랜다. 

-사실 이 나이가 되면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안 나. 
그가 진지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전히 잠자리에 대한 얘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어.
-그게 무슨 뜻이죠?
-그저 응접실의 장식처럼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단 말예요?
-그래, 괜찮아.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섹스 같은 것도 필요 없다, 그거 참 저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생활이네요.   
-난 당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밝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아니, 웃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바로 조수석 앞의 물품보관함에서 천천히 통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당신 명의로 된 통장이야. 
또 시작이다. 또 돈으로 나를 옭아매려고 한다. 그래도 나는 그의 이런 호의를 거부하고 싶지 않다. 고마운 일이다. 사실은 이런 걸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
(72~73쪽)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꽤 식상한 사랑고백의 전형이지만 머리도 벗겨지고, 가족도 없고, 축 늘어진 배에 멍청한 쓰쿠모씨의 고백이기에 아주 절박하게 들렸다.  
 
1인칭이어도 소설에서의 '나'는 100% 정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표현이 서정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빠진 상태에서 비약적인 적나라함으로 툭 뱉고 가는 주인공들이 그랬다.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드물게 아주 정직하다. 
한 마디를 하기 전에 오가는 여러 가지 얍삽한 생각들, 한 번은 미화시키려고 노력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밑바닥까지 고백해버리는 진짜 같은 허구의 인물이다.
 
저렇게 말한다고 해서 쓰쿠모씨가 진심으로 미호를 사랑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차마 내색하지 못한 짝사랑의 뒤늦은 발현일 수도,
가족에게 외면 당하는 그가 외롭기 싫어서 택한 최상의 카드일 수도 있다.
물론 미호 역시 사랑인지 아닌 지는 모른다.
저렇게 뻔뻔하리만큼 솔직한 미호이기에 내숭일 리는 없겠지만, 쓰쿠모씨에 대한 오랜 시간동안의 감사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에게 기대온 익숙한 시간들을 그냥 살아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미호라는 아주 인간적인-단점과 약점 모두- 여자의 얘기를 튀지 않게 만든 얘기방식이 신선했다. 약간 한국적이라는 느낌은 끊임없이 중얼대는 듯한 내용 때문일까, 아니면 일본소설에 대한 엽기적인 편견 때문일까.       























촌철살인


신문지 신문을 안 본지가 오래라 신문만화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여전하다.
가슴은 답답한데 웃음이 나오는 것이.
 
(출처:오마이뉴스/http://news.naver.com/hotissue/read.php?hotissue_id=436&hotissue_item_id=5884&office_id=047&article_id=0000056951&section_id=3)
 
▲ 국민일보 만평
ⓒ2005 서민호

 
▲ 국제신문 만평
ⓒ2005 서상균

 
 
▲ 부산일보 만평
ⓒ2005 손문상

Quluri|Highway|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OST


 
Highway/Qururi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백 가지쯤 있어
첫번째 이유는 이곳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야
두번째 이유는 저 달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야
세번째 이유는 운전면허를 따 볼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야

차에게 소리쳤어 (고속도로에서 달리자)
늘 미래를 불러(오랜만이야)
무언가 아주 큰 일을 할 거야, 꼭
큰 일을 할 거야

달려 죠니, 아무 상관말고 몸의 껍질을 모두 던져버려
따뜻함도 부드러운 키스도 결국 전부 이루어져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용기 따위는 필요없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따위는 없어
한번 손을 놓아봐
차가운 꽃이 져버리려고 해

 
OST공동구매가 마감되어서 앨범을 구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는데
아쉬운대로 DVD에서 녹음했다.
소리가 작은 것이 좀 불만이지만 앨범을 손에 넣기 전까지 아쉬운대로.

 

DVD|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






Disc1
본편
본편의 화질은 다운받은 파일보다 조금 선명한 정도?
음질은 일부러 2.0에 맞추었다는데 소리는 좀 작은 감이 있는 것 같다.

이누도 잇신,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의 오디오 코멘터리
1년 반만에 다시 만나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세 사람의 수다.
장면에 얽힌 뒷얘기들 와중에는 한참 셋길로 빠진듯한 수다도 있지만
이따금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에서 감독과 두 주연배우들이 몰입해서 감상을 들려주는 데에
공감을 느꼈다.
그런 장면들이 나오면 세사람 모두 각자의 감상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제일 많은 애정을 가진 사람은 침묵한다.
이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 저 정도로 빠졌었기에
그런 표정과 목소리들을 보여줄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씬에서 엔드크레딧이 나오기 직전
다들 Highway의 박자를 세며 전주를 따라하는 것까지,
세 사람이 이 영화에 가진 애정을 담뿍 느낄 수 있는 귀여운 코멘터리 였다.
사토시병을 근심했던 나이건만 코멘터리를 듣고 나니 치즈루병까지 생길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의도가 너무 궁금했던 두 씬이 있었는데
그 씬들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도 없었다는 것.
너무나 궁금한데 누구한테 물어보나.

Disc2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촬영일기
영화와 똑 같은 배경속에 다른 표정의 조제와 츠네오를 볼 수 있고,
스탭과 배우들의 인터뷰가 있는데, 서플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삭제된 씬
별로 없기도 하고 인상깊은 것도 없고.

단편-Bunny|각본.감독.와타나베 아야
코지역을 맡았던 아라이 히로부미와 조제의 아역배우 그리고 조제의 토끼인형이 출연해서
코지의 무뚝뚝한 그림자 사랑의 한면을 보여주는 번외스토리.

뮤직비디오-Highway|쿠루리
츠마부키 사토시가 출연하는 뮤직비디오. 그냥 그런.

일본 첫시사회 스케치
무대인사를 할 때, 코지역의 아라이 히로부미
-솔직히 영화에서 연기 너무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한 됨됨이에 놀랐다.
말도 재미있게 하고.
하지만 압권은 영화소개를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던 츠마부키 사토시가
이 영화가 자신의 얘기 같다는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울먹하면서 눈물을 보인 것.
덕분에 치즈루도 깜짝 놀라고. 그 모습들이 참 예뻐 보였다.

예고편
예고보다는 영화가 좋다.

임지훈|내겐 사랑이 필요해|친구에게(2집)|1989




언젠가 동물원의 콘서트에서 김창기가 부르는 것을 듣고 반한 노래지만
불행히 김창기의 목소리로는 들을 수가 없기에
원곡으로 대신.
김창기의 가사들은 김창기가 부를 때면 고백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임지훈의 목소리로는 슬픔만 커지는 것 같다.


 

남자|임성민


 
링크사진 다 깨짐...이거라도 남아서 다행.

내 기억속의 미남배우의 계보는 신성일-이영하로 시작된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 달리, 이 두 배우의 전성기는 직접 보질 못했는데,
내가 TV드라마를 훔쳐보기 시작할 무렵에는 노주현-한진희의 투탑이
화면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세자매라는 드라마도
투탑 남자배우들과 트로이카를 이루던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 중 두 명이 나왔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는 사람은 막내딸 이었던 정소녀 뿐이다.
임성민은 그때 어느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터로 처음 등장했다.
연기력을 볼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배역이었던 데다가,
정소녀를 짝사랑하는-또는 정소녀가 짝사랑 하는-벙어리 청년. 
당시만 해도 그 정도로 훤칠한 키에 완벽한 마스크를 가진 배우는 하나도 없었기에
임성민은 그 단역으로도 눈에 띄었다.

열심히 TV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지만 이 잘생긴 남자는 한동안 보이질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대를 갔었던 것이었는데 제대 이후 임성민의 화려한 비상이 시작되었다.
웬만한 로맨스, 멜로물의 주인공은 거의 다 임성민 이었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커플은 임성민-김미숙 커플이었는데,
은빛여울과 사랑의 굴레는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좀 난다.

임성민의 연기스타일의 독특한 점은 대사에 있었다.
특유의 ‘-하오’체를 사용하는 그의 말투는
사춘기 때 열심히 읽어대던 하이틴로맨스의 남자주인공들을 연상시켰는데,
그런 말투는 다른 남자배우들의 입에서는 별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통하면 신비감과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배역은 늘 유능한 남자였고 직업도 거의 사업가가 많았다.
보스보다는 실력 있는 참모, 그러니까 물려받은 재산 같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하는 그런 남자였다.
물론 늘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하기야, 개천에서 난 용이야말로 유능함의 최고봉이 될 수 있겠지만,
여자들이 바라는 임성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고생에 찌들어 팍팍한 심성을 갖거나 야심에 눈이 먼 출세지향형 인간이어서는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럽고 이해심 많은 이상형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기에
아마도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겠지.
한정된 역할만을 맡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연기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의 역할들은 그가 연기함으로 해서 100%이상 매력이 증폭되곤 했으니까.
그건 연기파 배우들의 소름끼치는 연기폭발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만족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아주 가끔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데,
말하자면 임성민은 그런 호감을 주는 매력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필모는 의외로 다양하다.
임성민은 TV문학관에서 주말연속극, 에로영화까지 종횡무진 누볐다.
그가 출연하는 ‘만다라’를 엄마와 같이 본 적이 있는데
엄마가 ‘어머, 저 남자는 머리통도 잘 생겼네’ 하는 덕에 그의 완벽한 외모를 확인한 적도 있다.
그 시절 우리나라 영화의 반 이상이 18금이었기에
-그때는 임권택도 이두용도 신승수도 전부다 에로라 해도 무방할 영화들을 찍었다-
그의 필모도 내가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이 많다.
얼마 전 케이블에서 ‘장사의 꿈’을 봤는데 정말 묘한 느낌이었다.
분명한 주제의 그늘에서 심하게 벗어대는 영화였는데,
아마 요즘 같으면 어느 톱스타도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산해보니 살아있다면 그는 아직도 40대다.
이제는 우리나라 배우들도 전성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미남으로 시작해서 나이 대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의 역사를 만들며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에 대한 자료는 정말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드라마들은 출연작마저도 온전히 알 수가 없으니.

올해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아마 지금쯤이면 임성민의 외동딸도 많이 자랐을 텐데.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도 많은데.

임성민 프로필생일: 1957년 4월 18일
데뷔: 1977 TBC 공채
가족관계: 4남 중 네째, 딸 하나
혈액형: O형
학교: 건국대학교 체육학과 졸업
취미: 낚시
수상경력: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1991) 사의 찬미
1995년 8월, 지병으로 작고

내가 본 그의 출연작

세자매(TBC)벙어리 웨이터역. 검은 바지, 흰 셔츠, 나비넥타이와 동그란 은색쟁반을 들고 우뚝 서 있다가 정소녀가 말을 시키면 열심히 듣는 척하던, 착한 남자였다. 수화를 했던 모습은 기억이 안난다.

푸른 해바라기(KBS)정확한 배역이 생각나지 않는다. 홍요섭과 허윤정이 함께 나왔던 게 맞다면 홍요섭과 친구사이. 아무튼 배종옥이 짝사랑하는 오빠였는데 이게 아마 배종옥의 데뷔작일 것이다. 동그란 귀여운 얼굴로 임성민이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서 고백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은빛여울(KBS)임성민은 까탈스런 방송작가 김미숙과 사랑에 빠지는 기자였다. 김미숙은 드물게 당차고 야무지고 좀 공격적이기도 한 성격이었는데 좀 유들유들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의 임성민과  콩당콩당 연애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꽤 인기가 좋았던 일일드라마. 김미숙이 늘 ‘유바보 기자’라고 불렀던 것도 기억난다.

사랑의 굴레(KBS)고두심의 ‘잘났어, 정말’이라는 유행어와 눈알을 도로록 굴리던 모습이 장안의 화제였던 주말드라마. 임성민은 있는 집안의 유능한 사업가로 가난한 고학생이자 조카의 과외선생인 김미숙을 사랑하게 된다. 나중에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가 될 뻔한 김미숙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기도 하는 헌신적인 모습도 덧붙여졌다. 완벽한 남자주인공의 샘플이었다.

대박.....유튜브에 있었다...... 



장사의 꿈(1985)앳띤 미모의 술집여자 금보라, 임성민이 호스트로 취직하게 되서 만나는 첫손님 김애경, 임성민의 포주 김영애, 잠시 따라다니며 일한 김인문 등등 호화캐스팅에 빛나는 영화였는데 옛날 영화인데도 노출이 꽤 쎄서 놀라웠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베스트셀러 원작의 영화, 최진실의 캐스팅이 어이었었던, 유오성의 연기가 처음 시선을 끌었던, 그리고 드물게 아직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그의 영화.

사랑과 결혼(MBC, 1995)임성민의 유작이 된 드라마. 지금도 그 이름들이 짱짱한 김희애, 김혜수, 이영애의 사랑을 동시에 받던 유능한 회사실장으로 나왔다. 원래는 김희애와 연결되는 스토리였다는데 임성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손창민이 대타기용 되었다.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김희애와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지만 선을 봐서 김호진과 결혼하는 김혜수, 이 남자 저 남자 고르다가 다루기 까다로운 남자 송병준을 만나서 결혼하는 이영애 등등 스토리도 재미있었던 드라마였다.

시식시종|우고디폰테



이 책은 피터 엠블링이라는 미국사람이
이탈리아 여행중에 우연히
우고 디폰테라는 중세 이탈리아 시식시종의 일기를 손에 넣게 되어
감정해 본 결과 진품고서여서 직접 영역한 것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우고 디폰테라는 남자가 소작농으로 태어나서 우연한 사랑을 하고
아내를 잃음과 동시에 얻게 된 이쁜 딸아이와 먹고 살기 위해
폭군의 시식시종이 되는 이야기다.
폭군의 시식시종이다 보니 두려운 순간이 많았겠지만
우고의 모험은 대부분 자작극이거나 예견된 것이어서 긴장감이 좀 떨어진다.
자서전이라고 했으니 안 죽을 것을 미리 알고 본다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우고 디폰테라는 중세 작가지망생의 소설이
피터 엠블링의 손에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후기에서도 그럴 가능성을 슬쩍 비치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이 책을 중세 시식시종의 진짜기록이라 홍보한 것은 새로운 상술이로다.
진짜 기록이 아니라면 좀 특이한 직업을 소재로 한,
현대작가가 쓴 것보다는 상상력이 부족하나, 기지는 더 번뜩이는
그런 소설쯤이 될 것 같다.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읽기 전의 반짝이던 기대에는 미치치 못하는.
음식에 대한 묘사들이 가장 인상깊었다고나 할까.

책 홍보카피
살기 위해 죽음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남자-그렇다
박진감 넘치는 영화를 보는 듯한 매력이 넘치는 이야기-아니다

the Dooleys|Wanted



 

Wanted/The Dooleys

You're the kind of guy that I gotta keep away
But It's all right
you know you can't deny It's the price I've gotta pay
but It's all right
'cause though your lips are sweet as honey
your heart is made of solid stone
one look and boy you got me runnin'
I bet you saw me comin' after you alone

(Boy you know you've got me 'cause you're)
Wanted
Boy you're everything I ever wanted
now all I've got's a memory, I'm wanted
livin'in the shadow of your love
boy you know you've got me 'cause you're
Wanted
boy you're everything I ever needed
but now you're gone and let me down and cheated
Livin'in the shadow of your love

I'm the kind of girl that'll swallow every line
but It's all right
You only gotta call and I'll be there any time
And It's all right
And now the flames are getting higher
I'm losin' all my self control
so come on boy and feed the fire
I'm burning with desire don't you leave me cold.

(Boy you know you've got me 'cause you're)
Wanted
Boy you're everything I ever wanted
now all I've got's a memory, I'm wanted
livin'in the shadow of your love
boy you know you've got me 'cause you're
Wanted
boy you're everything I ever needed
but now you're gone and let me down and cheated
Livin'in the shadow of your love

오랜만에, 갑자기^^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도스또예프스끼


-말하기를,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상을 할 때는 흔히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정신에 빠져들기도 하고, 만일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지낼 수 없으며, 이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있게 되면, 그의 개성은 바로 나의 자존심을 짓누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하루만 지나면 나는 그를 증오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식사 시간에 너무 오래 먹는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은 감기에 걸려 계속 코를 풀어 댄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단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나는 사람들의 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나의 보편적 사랑은 한층 더 타오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땐 절망에 빠져야 합니까?-아닙니다. 당신이 그 문제로 상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악하게 느끼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것이니까요...
사랑을 성취하는데 자신의 소심함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실행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어서 유감스럽지만, 실천적인 사랑은 공상적인 것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잘난 척 하는 놈의 본질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이야.    


자, 내 가족들을 소개해 드리지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내 새끼들이지요.
그러니 내가 죽어버리면 대체 누가 저 애들에게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반대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저 애들 말고 누가 나처럼 추악한 인간에게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이것은 나 같은 부류의 모든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위대한 사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인간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 방법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문제에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법이니까. 어리석을수록 선명해진다는 말이지. 어리석음은 간결하면서도 결코 교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지성은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꼬리를 잘 감추지. 지성은 비열하지만, 어리석음은  솔직하고 정직하잖니.


사람들의 자유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뿐이오.
당신은 인간을 너무나 존중했기에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았소. 그건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오. 그건 자신보다 인간을 더 사랑했던 당신의 행위였소! 인간을 덜 존중하고 그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하면 그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 더욱 사랑으로 다가가는 길이 될 거요.


옛날 옛적에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이 살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할멈은 평생 선행이라곤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악마들은 그녀를 붙잡아다가 지옥 불에 빠뜨리고 말았지요.
할멈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할멈의 선행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지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천사는 <저 할멈이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너는 바로 그 파 한 뿌리를 가져가 지옥 불 속에 내밀어서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라. 만일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도록 하고, 파가 끊어지면 지금 있는 곳에 계속 머물게 해라.>
그래서 천사는 할멈에게 달려가 파 한 뿌리를 내밀며 <자, 할멈, 어서 붙잡고 나와요>하고 말했지요. 천사는 파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해서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지옥 불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할멈이 올라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고 너도나도 할멈한테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은 <나를 끌어 올리는 것이지, 너희들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야. 이건 내 파지 너희들의 파가 아니야.> 하고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한 순간 파는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할멈은 지옥 불에 떨어져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지요.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고 말았어요.


정말로 자넨 나한테 화를 내고 있지. 우레와 섬광을 동반한 채 붉은 광채 속에서 화염에 휩싸인 날개를 달지도 않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말이야. 첫째로 자네의 미적 감각이 상처 입었을 것이고, 둘째, 자존심이 상했을 테지. 어떻게 자네처럼 위대한 인물에게 이처럼 평범한 악마가 찾아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지? 


우리들은 자식들에게 불가능한 자제심을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문을 품은 자식이 들을 수 있는 판에 박은 대답은 <아버지가 널 낳았다. 너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은 <아버지는 나를 낳을 때 나를 사랑했을까?>하고 더욱더 충격을 받으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나를 위해서일까? 아버지는 분명히 그 욕정의 순간에, 어쩌면 술에 잔뜩 취한 그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 알기는커녕,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만 나에게 음주벽만을 물려주었으며, 그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은혜의 전부인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낳고도 한평생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만일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질문에 훌륭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비적인 편견에만 의지하지 않는, 이성적인 자의식에 입각한 엄밀한 의미의 박애의 기초위에 세워진 진정한 가족인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단숨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읽고 나서의 가장 큰 보람은 1300여 페이지를 다 읽어냈다는 것보다, 이 책에 대한 극찬이 더이상 궁금증이 아니라 공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고도 했는데, 나 역시 읽은 책 들 중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설가-참 흔해진 이름이지만 도스또예프스끼 같은 작가가 있는 이상 같은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그 이름을 챙피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서약이라도 좀 해야하지 않을까.
톨스토이의 단편에서 느꼈던 부담스러운 종교색들이 이 책에서는 인간적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이따금 내게는 위안이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이라면 읽는 사람마다 완전히 다른 북마크들이 엄청날 것 같다.
어두운 이야기들과 불행한 가족사를 얘기하고 있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마도 스스로를 포함한 인간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최악의 처벌이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을 편치 않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정말 그런 것을 모든 인간이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살면서 누군가에게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고?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대중소설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파격적인 소재도 그렇지만 후반부의 법정공방은 법정드라마 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2권은 궁금해서 책 덮기가 싫을때도 많았다. 고전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데, 고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는 중.
 
ps.기억하고 있던 제목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는데 주인공이 막내아들이라서 개정판의 제목을 바꾼 모양이다. 

영화|썸|Some


제일 볼만한 고수의 미소
 
전반부-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의 데자뷰는 어차피 설득력이 없는데, 
그냥 이상한 날이라고 하면 됐지 무슨 설명을 더 하겠다고 그렇게 반복암시를 하는 겐지. 
같은 장면 같은 대사 두번씩 들어야 하는 사람도 생각 좀 해주지.
부수기는 엄청 부수고 달리기도 엄청 달리는데 빨리감기로 봤다--;;
 
후반부-음모의 등장.
지겹던 데자뷰가 미래를 예견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집중이 잘되기 시작했다.
결국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본 것 때문에 누군가가 소중해지고 
그 얘기를 듣고 다시 그만한 애정을 되돌린다는 것이 좀 이상했지만 가능하다고 치고.
히스토리가 전혀 없는, 참 오랜만에 보는 고전적인 나쁜 놈-이유없다, 그냥 나쁜 놈이다-이 
등장해서 후반부의 긴장을 팍 풀어준다. 
결정적인 결투씬은 앞부분의 박력에 비해 너무나 조신하다. 
이왕 맨주먹 배틀이라면 여기서 좀 세게 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좀 허무.
 
고수-별로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는데 마지막 미소장면 하나로 많은 것이 용서 되었다^^
윤지효-올드보이의 윤진서만 못할 거 없는데. 어쩌랴, 이 영화가 올드보이가 아닌 것을.
 
하지만 소름끼치게 연기하는 주연 하나 없이, 알아서 받쳐주는 조연 하나 없이
2시간 동안 교통사고와 싸움, 피만 보고 참으라는 주문은 너무 안이하다.
고수는 열심히 키아누 리브스를 벤치마킹했지만  
영화는 스피드 대신 와쳐(Watcher)가 되어 버린 듯.

일본드라마|오렌지데이즈|オレンジデイズ


청순버전
순정버전
명랑버전
 
제일 좋았던 장면
제일 맘에 드는 커플 사진

츠마부키 사토시를 향한 단기집중력 발아의 마지막 단계였던 드라마.
여자주인공이 좀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남자주인공의 사랑이 더 멋있어 보인^^
그런 드라마였다.

평범한 대학생 카이와
화려한 뮤지션이 될 뻔 했던 청각장애를 가진 사에의 사랑이야기가 큰 줄기인데,
대학 4학년들이 겪는 진로, 사랑에 대한 고민들이 귀엽게 그려진다.
아마도 일본대학생들이 그런 대학생활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작년 일본드라마 시청률 1위 였다는데
초창기 트랜디 드라마 같기도 하고 왠지 파리의 연인과도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매회가 사건보다는 에피소드와 대사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느낌.
대신 오렌지데이즈는 사람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정작 두 사람이 만났을 때보다는
두 사람이 다른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더 정직해지는.
이따금 정곡을 찌르는 대사들-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하게 되는 말을
배우가 바로 그 타이밍에 해준다거나 하는 것들-도 좀 닮았다.
대신 우리나라 드라마를 선이 굵다고 표현하게 만드는 특징
-식상하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깔고 시작하는
피를 둘러 싼 운명의 굴레 같은 것-없어서 별로 꼬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기에
비슷비슷한 일로 투닥투닥 하는 것이 좀 지루한 회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한 디테일 면에서는 꼼꼼하기 때문에
내 취향에는 좀 맞았다. 물론 내가 엄선된 드라마만 보긴 했지만.

이 드라마에서 카이의 친구 케이타역의 남자배우는
얼핏 김남진과 비를 섞은 듯하지만, 어딘가 약한 아우라.
참, 사에의 약혼자는 좀 멋있었다. 어른스러운 매력이 있는.
공교롭게도 조제에서 츠마부키의 애인이었던 배우가
이 드라마에서 사토시의 배역인 카이의 친구동생이자 카이를 짝사랑 하는 역할로
조금 나온다.
나의 시청동기였던 츠마부키 사토시의 연기는 맘에 들었다.
역시 여린 아이로 나올 때 표정들이 좋아.

카메라밖에서도 밝은 그들

Replay
너를 믿지 못했던 건 내가 약해서였을거야-
라는 사에의 말이 새롭게 와닿다.

사토시의 얼굴에 푹빠져 
그땐 충분히 보지 못했던 사에의 매력을 흠뻑 느끼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주연작인 이 드라마에서
시바사키 코우는 감성이 풍부하고 별나 유창해야만 하는 수화실력을 
굉장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어마어마한 표현력의 수화로 나를 사로잡았던 
진짜 수화사용자 말린 마틀린만큼이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만큼이나 격정적인 수화를 구사하던 카이가 
극에 빠진 배우의 매력을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오렌지데이즈의 끝을 알리는 카이의 뒷모습.
하지만 사에의 성장이 마지막 인사였기에 우울하지는 않은.
처음 볼 때 몰랐던 새로운 매력이 새록새록...